빛의 흔결 | EP.02
사랑은 왜 희생으로 증명되도록 배워졌는가
아픈데도 만난다.
힘든데도 온다.
그 장면은 언제나 이렇게 해석된다.
“이 정도로 힘든데도 널 선택했어.”
문제는,
그 선택이
사랑의 한 순간으로 지나가지 않고
사랑의 최대치로 저장된다는 데 있다.
그 순간의 고통, 무리, 불편함은
기억 속에서 미화된다.
그리고 그 미화된 기억은
관계 안에서 조용히 자리를 잡는다.
ㅡ
희생은 기억이 아니라 기록이 된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감당한 고통을 기억한다.
그게 나를 살게 했든,
나를 소모시켰든 상관없이.
그래서 희생은
의도하지 않아도 기록된다.
“그때 난 아팠고”
“그래도 갔고”
“그래서 지금 이 관계가 있는 거야”
이 기록은
말로 쓰지 않아도
마음속 장부에 남는다.
ㅡ
기록된 희생은 청구서가 된다
희생이 사랑의 언어로 쓰이는 순간,
그 희생은 화폐가 된다.
처음에는 이렇게 느껴진다.
“난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아.”
하지만 관계에 불편함이 생기면
그 화폐는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내가 얼마나 너한테 잘했는데...”
“그때 난 아픈데도 갔어.”
이건 사랑이 식어서가 아니다.
진심이 없어서도 아니다.
희생을 사랑의 증명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본전 생각이 나는 것이다.
ㅡ
왜 깊이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이 구조에 들어가는가
깊이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사랑을 이렇게 받아들이기 쉽다.
그의 희생은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에 대한 증거로
그의 아픔은
나에게 향한 진심의 깊이로
그의 서운함은
이 사랑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그래서 초반에는
감동이 커지고
밀도는 높아지며
“우린 정말 깊이 사랑하고 있어”
라는 확신도 생긴다.
ㅡ
감동이 거래로 바뀌는 순간
이 시기에는
아무도 이 관계를 거래라고 느끼지 않는다.
서로의 아픔이
서로의 사랑을 증명해주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 구조는 서서히 빚의 형태로 변한다.
한쪽은 준 만큼을 마음속에 쌓아두고
다른 한쪽은 그만큼 더 잘해야 할 이유를 떠안는다
그때부터 사랑은
자유가 아니라 정산의 문제가 된다.
ㅡ
본전 생각은 실패가 아니라 구조의 결과다
중요한 건 이거다.
자기 희생 위에 세워진 사랑에서
본전 생각이 드는 것은,
누군가의 인격 문제도
사랑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그렇게 설계된 구조의 결과다.
희생을 사랑의 증명으로 쓰는 순간,
그 사랑은 이미
무조건적인 영역을 벗어난다.
ㅡ
사랑을 빚으로 만들지 않으려는 선택
“아픈데도 오지 마.”
“나 때문에 네가 힘들면 그건 사랑이 아니야.”
“사랑은 증명이 아니라 선택이야.”
이 말은 겉으로는 차갑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히려 사랑을
빚으로 만들지 않으려는 태도에 가깝다.
자기 희생 위에 세운 사랑은,
아름다워 보이지만
그 안에는 반드시 장부가 생긴다.
그리고 장부가 생긴 관계에서는
누군가는 계산하고
누군가는 갚는다.
사랑이 오래 가기 위해 필요한 건
더 큰 희생이 아니라
희생을
사랑의 화폐로 쓰지 않으려는 용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