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과 소문은 대중이라는 바람을 타고 사회를 잠식한다. 시간이 지나 진실이 드러나도 거짓의 편향성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어느 지인의 한탄이다. “그래도 뭔가 버팀목은 있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며 “날이면 날마다 하늘을 의지해서 산다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하는 회의다.
벌써 “사법부, 민주적 통제 필요하다”라는 말이 나돈다.
2300여 년 전 한비는 말한다. “법불아귀(法不阿貴), 승불요곡(繩不撓曲)”, 법은 신분이 귀한 자에게 아부하지 않고, 먹줄은 굽은 모양에 따라 구부려 사용하지 않는다.
왜인가? 법만이 지식 있는 사람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고, 용맹스러운 사람도 거들먹 거리며 엄포를 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청 말 이종오(李宗吾)는 <후흑학(厚黑學)>을 지었다. 나라가 서양의 열강에 갈가리 찢어지고 5천 년 중화의 역사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 것”을 가만히 살펴보니, 한(漢) 나라 이후 공맹(孔孟)만 숭상한 것에 분연히 반기를 들고, 얼굴이 두꺼운 ‘후(厚)’와 얼굴이 시커먼 ‘흑(黑)’ 즉 '낯짝은 두꺼워 뻔뻔하기 이를 데 없고 마음은 시커먼 그 속을 알 수 없는 놈'이 오히려 승자 된 것이 더 많은 것을 알고 무릎을 치면서 감탄하기에 이른다.
“하늘의 그물은 넓고 성긴듯하지만, 어느 하나라도 놓치지 않는다(天網恢恢 踈而不失).” (노자 제73장)
이놈은 이것이 옳다고 사기 처먹고 저놈은 저것이 옳다고 사기 처먹고, 이놈이 이것이 옳다고 나라 등쳐 먹고, 저놈은 저것이 옳다고 나라 등쳐 먹으니, 도대체 하늘에 계신 옥황상제님은 날이면 날마다 날아드는 송사에 누구의 말을 듣고 날벼락을 칠 것인가? 간절히 기도해봐도 들리는 대답은 없다.
무릇 모든 것에 경지가 있는 법, 후흑(厚黑)의 최고의 경지는 후흑을 드러내지 않는 것 즉 ‘불후불흑(不厚不黑)’이다. 겉보기에는 "파리 한 마리는커녕 가엾어서 뭇 여성의 도움을 받아야 될 듯한 백면서생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속이 시커먼 마공(魔功)을 지닌 자"였네 하는 꼴이다.
“저는 날마다 아내 대신에 음식 쓰레기를 버려요. 버스를 탈 때 줄을 서는 것은 기본이고요, 지하철에서 노약자분에게 양보하기를 30년 이상 했어요. 비행기 탈 때 한 번도 이코노미석 이상을 탄 적이 없어요”
누구인가? 날이면 날마다 그렇게 사는 선량한 우리네 모습이다. 뭐 특별한 것이 없다. 특별한 것이 없으니 글조차 남기지 않는다.
페북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낯 간지러울 정도의 잉꼬부부, 세상에 둘도 없는 가족 사랑, 공부 잘하는 사람은 있으나 마나 공부하지만, 꼭 공부 못하는 사람이 머리에 띠 두르고 “성실, 열공” 이렇게 한다. 억지를 부리는 것에는 다들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하늘의 그물, <노자>가 말한 하늘의 도(道)는 무엇인가? 부쟁(不爭)이요, 불언(不言)이요, 불소(不召)이다. 다투지 않아도 잘 이기고, 말하지 않아도 잘 응하고, 부르지 않아도 잘 온다.
민주주의의 근간은 정직과 신뢰다. 날마다 누릴건 다 누려놓고 또 공짜점심을 생각하면서 사회의 공동체가 온갖 모리배의 쓰레기 하차장으로 유린당하도록 방치한다면, 방직공장에서 오늘의 풍요를 안겨준 어린 소녀에게, 피의 능선에서 팔다리가 찢어져 수십 미터 떨어진 열아홉 살짜리 소년에게, 나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내 비록 “덥석 무는 데 용기 있는 자는 죽는다(勇於敢則殺).”라고 하여도 내 그렇게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