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석도 묵었다는 아자방, 천하람도 묵었다는 아자방, 절박함이 있어야 소원도 성취되는 법, 밤새 집나간 인왕산 소쩍새가 이리로 이사를 왔는지 왜 그렇게 우는지, 또 “끄~억”하는 부엉이 소리도 들리고 온갖 새소리가 한밤중에도 들리는 데 모두 울림이 깊다.
먼 지리산 산 능선에서부터 아침 햇살이 야금야금 산 아래로 내려오니 연둣빛 초록 잎이 새색시 얼굴마냥 뽀얗고 싱그럽다.
대웅전으로 올라간다. “3배만 해야지” 3배가 끝났다. 아직도 팔팔하다. “9배만 해야지” 9배가 끝나도 여전히 팔팔하다. “33배만 해야지” 마찬가지다. “에라이~ 그러면 108배로 끝내자” 그렇게 108배를 끝내도 내 육신은 말짱하여 숨소리 하나 없다.
내 잘 안다. ‘정신’이라는 놈은 육신이 힘이 들어 숨이 턱에 차고 혓바닥이 쑥쑥 나올 때, 그때 툭 튀어나온다. 육신이 말짱하면 그 안에 꼭꼭 숨어 안주하기를 바위딱지보다 더하다. 그래서 숨도 안 쉬고 108배를 하던지 3,000배를 하여 내 몸이 녹초가 될 때 그때 갑자기 툭 튀어나온 그놈을 잡아다가 패대기쳐서 ‘항복’을 받아내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아침 공양을 한다. 식판에 밥과 김, 콩자반, 나물을 담고 묵언 수행한다. 칠불사 공양주 보살님 절반은 그만 두었다. 어디 바람이 나서 도망간 것도 아니요, 문득 도를 깨쳐서 하산한 것도 아니다.
아무리 도력이 높은 절도 세월은 피해 갈 수 없다. 이 깊은 산중에 스님들의 삼시 세끼와 그많은 제(祭)를 담당할 보살을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산중일수록 세월의 변화에 더디게 반응할 듯하지만, 기실은 더 빨리 반응한다. 왜냐고? 여기가 문명의 변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울보다 더 훤히 손금보듯 세태를 읽으니 산중에 들면 ‘도사’라 칭하고 진짜 도사가 된다.
“여기 짜장면 세 그릇 배달이요. 거기에서 마늘, 파, 달래, 부추, 양파 빼고요” “아, 그럼 무슨 맛으로 먹어요” “여기, 칠불사 선방이거든요. 아~ 그렇군요”
이제는 공양주 보살을 조계종에서 해결해주든지, 배민에서 해결해주든지, 마켓컬리에서 해결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공양주 보살님은 산 아래에 살면서 드론으로 음식을 만들어 배달시킬 날도 멀지 않은 듯하다.
원 범왕골에서 제네시스를 파킹한 후 서울에서 내려왔던 네 사람만 오솔길을 따라 오른다. 노루나 산짐승만 다닐 수 있는 길, 바닥에는 낙엽이 깔리고 돌들은 울퉁불퉁하며 시작은 있으나 끝은 알 수 없는 길이다. 그렇게 반 시간을 걸은 후 능선을 살짝 넘으니 진문스님이 주석하시는 ‘사시암’이 눈앞에 나타난다.
법당은 아침 햇살마냥 고요하다. 앞면에는 자그마한 부처님 있고 옆면에는 유종원(柳宗元)의 <강설(江雪)>이 초서체로 걸려있다.
스님의 죽비에 맞춰 부처님께 구 배하고 스님께 일 배 맞절을 하니, 곶감 한 접시와 과일 한 접시 그리고 우전 찻잎으로 직접 덖어 발효시킨 황차(黃茶)를 꺼내 놓는다.
이 깊은 산중에 새들도 날지 않아 끊어지고, 사람도 다니지 않아 인적도 끊어진 이곳 암자에서, 아무리 억만금을 준다고 하여도 등짐 지고는 못 올라올 곳에, 분이 하얗게 내려앉은 곶감을 보니, 그만 내 칠불사에서 아작을 내어 항복을 받아야 하는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죄로 식탐이 작동되어 곶감에 황차를 마시니, 끊어질 것은 다 끊어졌는데 오직 끊어지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으니, 내 탐진치(貪瞋痴)뿐이로다.
“가만히 이 깊은 산중에 있어 보니 우주도 시(時)에 따라 흩어지고 모이기도 하니, 우리의 인생도 그러하지 않나 합니다. 그러니 시류에 따라 너무 집착 안 했으면 좋겠어요”
스님과 차담(茶啖)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칠불사에서 반야봉까지 한나절 만에 산나물 한 지게를 해온 이야기 하며, 이 절터가 화전민이 살던 터라는 이야기하며, 화개에서 걸어 온 이야기 하며, 오랫동안 홀로 수행하신 스님답게 말씀도 조용조용하시고 눈빛도 맑고 깨끗하여 뭐 하나 군더더기를 달 수가 없었다.
오솔길을 내려오면서 듬성듬성 보이는 고사리를 곁에 두고도 아직 따지 않은 여린 찻잎에 마음이 가는 것을 보고, “임 이사, 내년에는 동기들 왕창 데리고 와 암자 울력하고 찻잎 따고 그러 거래이” 하니 그렇게 하겠다고 한다. “내, 내일 내일 하는 놈치고 겁나는 놈 없데이” 하니 모두 껄껄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