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삼선 윤일원 Aug 06. 2024

문명의 길을 벗어나 흡수골로

네 역사를 내가 더 관심이 많은 것은



2024.8.3.


우리가 걸어온 이 길은 분명 문명의 길이다. 그것을 나타내는 징표가 많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도시화다.


오밀조밀 모여 사는 도시화는 고밀도 효율화를 추구한다. 단위 면적당 최고의 상하수도, 전기시설, 통신시설, 공동주택이다.


이런 우리의 삶은 바로 이곳 초원에서 시작되어 지구를 한 바퀴를 돌아 한반도까지 왔으나, 아직 그 시원인 초원은 이제 막 문명의 길로 들어서니 이런 아이러니도 세상에는 없다.


수흐바토르 광장이 빤히 보이는 스카이호텔에 머문 나는 습관처럼 이른 새벽이면 저절로 눈이 뜨인다. 가이드가 낯선 이방인을 당혹게 하는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경고에 따라 개와 늑대를 구별할 시간이 조금 지나자 얼른 광장으로 나왔다.


우리 일행은 나를 몽골 현지인이라고 놀리지만 딱 봐도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키가 훌쩍 큰 몽골 청년이 자전거를 타고 와 내게 말을 건넨다.


나는 칭기즈칸 동상 오른편에 날랜 갑옷을 입고 말꼬리를 쇠뭉치처럼 말아감은 수부타이(수베데이, 수베게데이, 속불대) 동상을 가리키면서 그를 아느냐고 물었으나 잘 모르는 눈치였다.


수흐바타르 광장에 있는 수부타이와 큰 길 건너에 있는 마르코폴로 동상



오호라. 그렇구나. 네 역사를 내가 더 관심이 많은 것은 내가 막혀서 그러니, 그대도 네 갈 길을 가 “부디 잘 커서 이 나라의 큰 기둥이 되거라”라는 작별 인사를 하고 큰길을 건너 낯선 동상으로 갔다.


그 동상은 오른쪽 어깨에 새를 얹고 날렵한 갑옷에 투구를 쓴 인물이며 마르코폴로라 쓰여 있다.


왜, 그가 북경이 아니라 이곳에 있을까?


그는 1271년 17세의 나이에 상인인 아버지와 삼촌을 따라 실크로드의 끝점 쿠빌라이 칸이 머문 북경에 도착한다. 그는 쿠빌라이 칸의 명령에 따라 17년 동안 중국에 머물면서 온갖 지역을 여행하고 한 권의 책 <동방견문록>을 남긴다.


그로부터 200년 뒤 그의 책에서 영감을 얻은 또 다른 사내가 지팡구(동방견문록에 나온 황금의 나라 일본)로 향한다. 그 시절이 바로 칭기즈칸의 대 수장 수부타이가 헝가리 대평원에서 유럽 최강 기사단 5만 명을 전멸시키고, 잠든 유럽을 깨운 지 만 200년이 지나서였다.


문명의 길은 빨라진다. 그 사내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딱 100년 후인 1592년 유럽 서쪽 끝 포르투갈에서 조총을 수입한 일본이 임진왜란을 일으킨다.


문명의 길을 벗어나 흡수골로 가는 길은 험난하다.



울란바토르 공항에서 무릉(Murun)까지 국내선을 타고 1시간 날아가 다시 포장도로 2시간을 달려야 겨우 호수 입구 하트갈에 도착한다.


어디 문명의 길을 벗어나는 일이 그리 쉬운가? 끝없이 이어지는 초원과 나무 한 그루 없는 산에 듬성듬성 반대편에 자라는 나무를 보니 타이가 숲으로 점점 다가가는 모양새다.


무릉에서 한 시간 달려 유목민 게르에 도착하여 그들의 사는 모습을 본다. 둥그런 게르 두 채에 말 수십 마리가 메여 있다. 아들 내외는 곁에 딴 살림을 차려 주어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었으나 나이는 내보다 많지 않은 듯하다.


할머니가 반갑게 맞이하면서 우유로 만든 과자와 버터, 마유주를 꺼내 놓는다. 게르 안쪽에는 발효 정도에 따라 꾸덕꾸덕한 우유 그릇이 놓여 있고 그 곁에는 가죽 부대에 말젖이 가득 들어 있어 마유주를 만드는 중이다.


우리는 수태차와 마유주를 마시고, 우유과자를 버터에 발라 먹으면서 극도로 단출한 그들의 삶을 본다. 여기 모인 우리가 이들의 삶을 대체한다면 보라매님을 빼고는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도망갈 사람이다.


그저 슬리퍼 달달 끌고 마트로 쪼르르 달려가 1만 원어치 사면 한 끼 푸짐한 넉넉 한 식사가 될 터인데, 사람보다 힘이 더쎈 말과 소를 다루고, 고집이 황소인 염소와 양 떼를 몰면서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자급자족 한다는 일이 얼마나 고달픈가?


내 알바해서 1만 원 벌어 그 돈으로 전 세계 120개국에서 수입되는 온갖 식품을 사 먹으면 될 일을, 이것이 문명의 길과 비문명의 길 차이다. 지독한 타인에 의존하는 삶과 지독한 나에게 의지하는 삶. 너 없으면 난 못살아와 너 없어도 난 잘 살아의 차이다. 우리는 이미 그 길을 건너왔고 몽골 유목민은 이제 반쯤 건너는 중이다.


우리 일행은 흡수골 남쪽 끝 하트갈에 도착한다. 흡수골 트레킹은 그리 만만치 않다. 여름철이라 수시로 내리는 비로 소똥 말똥이 물에 뒤섞여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질퍽함이 도회지 남녀 모두에게 당혹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이제 문명의 길로 들어선 우리, 비문명의 길로 한 발짝만 떼면 금세 짜증을 내면서 한 번의 체험이니 용서한다는 마음으로 겨우겨우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숲속으로 들어간다.


그렇지만, 아무리 이기적 도회지 인간이라 하더라도 깊은 숲속으로 100미터만 들어가면 숲이 주는 향기와 초록빛에 금세 감탄하고 방금 쏟아냈던 불평불만을 순식간에 잊는다.



오호라, 그러면 그렇지 로봇이 아닌 가슴 달린 인간이라면 보고 느낄 것이다. 우리가 자연에서 왔다는 사실을, 그 품에 안기면 넉넉하다는 사실을, 언제나처럼 숲이 끝나면 초원이 나타나는 안도감 같은 것을.


가이드가 저 멀리 산등성 아래에 머물라고 하지만 글쎄다. 이런 풍광을 두고 오르지 않는다면 어쩌리, 오기가 발동되어 산 능선으로 치고 오른다.


오오, 그토록 다큐에서 봤던 유튜버들이 자랑질하던 흡수골의 첫 모습이 빤히 보인다.


여기저기 감탄의 소리가 절로 나온다. 아직 온전한 모습이 아닌 귀퉁이에 살짝 걸친 모습이지만 이것만으로도 감동이다. 파란 하늘이 담긴 호수 주변을 검은 숲이 감싸고 있다. 낯선 이방인에 쫓기듯 하얀 갈매기가 무수히 날아들기를 반복하는 가운데 저마다 인증샷에 여념이 없다.


“말 드묾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회오리바람도 아침나절을 넘기지 못하고 소낙비도 하루를 넘기지 못하니 누가 이런 일을 하는가? 하늘과 땅이로다(希言自然 故飄風不終朝 驟雨不終日 孰爲此者? 天地!) (<노자> 제20장)


그렇구나. 말 드묾이 자연스러우니, 우리가 묵을 캠핑장 토일럭트(Toilogt)은 여기서도 비포장도로를 따라 1시간 30분 더 가야 하거늘, 여기저기서 벌써 입이 댓발 나오면서 한숨 소리가 요란하더라도, 그저 묵묵히 가야 한다.


이미 생존력을 잃어버린 문명인에게 비포장도로 1시간 30분이면 겁에 질리기에 충분하다. 글쎄 말이야, 우리가 그 신작로에서 벗어난 지 채 40년도 안 되었거든.


해가 뉘엿뉘엿 흡수골에 비출 무렵에야 토일럭트 야영장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저녁을 든 다음 하늘과 호수가 맞닿은 흡수골 풍경을 본다.


*내일은 제3부, ‘내 하늘을 일도양단하리라’로 이어지며, 이 기행문은 6일(7.27~8.1) 동안 혜초여행사와 함께했습니다.


#흡수골 #무릉 #혜초여행 #문명 #게르

작가의 이전글 나 몽골 간대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