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입맛대로 법을 집행한 장탕
2025.10.18.
법비(法匪), 법, 법(法)에 도적, 비(匪)를 합성하여 ‘법을 제 입맛대로 다루는 사람’을 말한다. 어원은 일제의 만주국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은 만주국을 세우면서 무모한 폭력으로 통치한 듯하지만, 기실은 자신에게 유리한 입법을 한 후 강제화하였으니, 현지인들은 그들의 교묘한 착취와 탄압이 총칼보다 더 가혹했다고 평했다.
바야흐로 한무제는 영토 확장을 위해 서쪽으로는 흉노를 격파하여 실크로드 회랑 둔황까지 이르렀으며, 동쪽으로는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했으며, 남으로는 남월을 정복해 현재 쓰촨, 윈난, 구이저우, 월남까지 확보했다.
그 시대의 사상은 전국시대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 잠시 휴식을 갖는 노장(老壯)사상이 서서히 쇠퇴하고 본격적으로 유가(儒家)들이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는 시기이며, 이에 법도 영토 팽창 시기의 강력한 법가에서 도덕 기반 유가의 입법으로 바뀌는 중이었다.
한무제가 옛 유가 성현의 글을 즐겨 읽는다는 소리를 듣자, 장탕은 중대 사건을 판결할 때마다, 옛 성현의 도의에 부합하는 글귀를 가져다가 판결문을 작성하여 평결했다.
참으로 교묘하지만, 이 시기에 처음 등장한 단어가 ‘곡학아세(曲學阿世)’다. 유생은 권력자를 위해 경전을 끌어 대기에 바빴고, 법 집행관은 황제의 입맛에 따라 판결하려는 노력이 돋보였으니, 그야말로 문인들의 춘추전국 시대였다.
장탕은 의심스러운 사건이 발생하면 먼저 한무제에게 사건의 경과를 보고하고, 이것이 옳다 하면 그 뜻을 받들어 판결의 원안을 삼았고, 그르다 하면 다시 보고하여 황제의 의중을 살피기에 바빴다.
만약에 한무제가 평결을 칭찬하면 “신은 이 안건에 대해 잘 모릅니다. 정, 감 아무개가 작성한 것입니다.”하고 칭찬을 부하에게 돌렸으며, 만약에 한무제가 평결을 기각하면 “(그들이) 진실로 신을 위하여 제시한 원안은 황상께서 신을 꾸짖은 바와 꼭 같습니다. 그러나 신이 이를 쓰지 않아 우매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하고 자신을 벌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러한 모습에 한무제의 신임이 점점 두터워지자, 장탕은 한무제가 기소된 안건을 벌하려 하면 법을 치밀하고 엄하게 집행하는 부하에게 맡기고, 한무제가 기소된 안건에 대해 용서해 주려 하면 재량권을 폭넓게 이용하는 부하에게 맡겼다.
그는 권세 있는 호족에게 법조문을 교묘히 해석하여 반드시 죄에 걸려들게 하였고, 가난한 백성에게는 한무제에 구두로 “유죄이지만, 현명하게 헤아려 달라”고 주청했다.
그럼, 왜 사마천에 의해 장탕이 '혹리(酷吏)' 대명사가 되었을까? 유방은 천하를 통일하고 공신들을 제후에 봉하여 위임통치를 시켰으나, 여전히 반란을 의심하여 하나하나 제거한다. 대표적으로 이것이 한신을 제거한 ‘토사구팽’이며, 점차 공신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유(劉) 씨 핏줄을 앉혔으나, 그것마저 불안하여 한무제에 이르러서는 마지막 남은 유방의 혈육인 회남왕 유안(劉安, 유방의 친손자, 한무제의 친삼촌) 마저 장탕으로 하여금 제거하고 왕권 강화에 힘 쏟을 때라, 가혹한 법치가 횡횡하였다.
후세 사가들은 말한다. 그렇다고 ‘장탕이 황제의 입맛대로 판결한 사실’을 결코 놓치지 않았고, 가혹한 칼잡이의 반열에 올려놓았으니, 역사의 무서움을 안다면 오늘날 입법 횡포의 법비와 법 집행의 주구(走狗)들이 반드시 새겨들을 말이다.
*내일은 마지막 ‘부국강병의 칼날을 휘두르다 반격에 당한 장탕’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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