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토요일 밤이 되면 두려움이 엄습한다. 아무 생각 없이 쉴 수 있는 날은 단 하루이고 이마저도 빠르게 흩어진다. 일요일이 되면 다가올 월요일을 걱정하고, 주말에는 한 것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예전의 나는 이렇게 살고 있지 않았는데, 언젠부터인가 해야 할 많은 것들에 압도당하며 살고 있다.
소설 '모모'에는 회색 인간들에게 시간을 뺏겨 버린 사람들이 등장한다. 회색 인간들은 사람들의 시간을 뺏어서 삶을 사는 존재로 그들이 사람들에게서 빼앗는 것은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맛있는 것을 먹으며 감탄하고, 울고 웃으며 보내는 시간이다. 사람들은 점점 그런 시간을 잃어버리고, 유용한 것들을 찾아 자신을 소진한다. 그 과정에서 돈은 많이 벌지만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 어쩌면 나는 회색인간에게 시간을 빼앗겨버린 사람들을 닮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주중에는 주어진 의무를 수행하는 것에 나를 소진해 버려서 주말에는 그저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은데, 아이러니하게도 주말을 그렇게 보내면 기분이 좋지가 않다. 새로운 곳에를 가든지, 새로운 것을 먹든지, 뭐라도 해야만 잘 보냈다고 느끼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내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뭘까, 무용하게 보낸 시간에도 과연 힘이 있을까
<토요일 일과>
오전 10시: 기상 후 사과 깎아서 강아지 주고 샤워
오전 11시: 남편이 내린 커피에 브런치
오전 11시 30분: 헬로우조조 사이트 잠깐 보고 강아지 유튜브 쇼츠 만들기
오후 12시: 남편이 화분 물 주는 거 잠깐 보고 강아지랑 놀기
오후 12시 30분~2시: 독서모임 책 읽기
오후 2시: 강아지 똥 누이기
오후 2시 30분: 강아지 목욕시키고 샤워
오후 3시: 낮잠
오후 4시: 치킨 시켜 먹고 담소
오후 5시: 낮잠
오후 7시: 산책하며 동네 구경
실외 배변을 하는 강아지가 아니었다면, 하루 종일도 누워 있었을 것이다. 강아지 위주로 토요일이 돌아가는 것이 맞나 싶으면서도 네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산책을 나와서 맞는 바람은 집에서 쐬는 에어컨 바람과 비교할 수 없었고, 그때 본 하늘은 이상하게도 최근의 어떤 하늘보다 예뻤다. 바닥에 앉아 있으면 엉덩이를 착 붙이고 앉는 강아지의 털결을 느끼며 한없이 쓰다듬을 수 있는 것도 내가 무용하게 시간을 보내는 토요일에만 할 수 있는 것이리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토요일로 하여금 나는 에너지를 얻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는 분명히 그냥 흘려보낸 시간만은 아니다. '즐겁게 보낸 시간은 낭비한 시간이 아니다'라는 말처럼 아무것도 아닌 시간은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믿어야지 어쩌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