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들 다 읽은 거예요?”
“아니.”
아는 동생이 놀러 와서 서재를 둘러보곤 물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잠시 망설였다. 서재에 책이 많진 않지만 동생이 보기엔 많아 보여서 물어본 것일 거다. 나는 ‘읽을 책을 사는 게 아니라, 산 책을 읽는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물론 읽고 싶어서 책을 사지만, 샀다고 해서 바로 다 읽지는 못한다. 책들은 저마다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 바로 읽히는 책도 있지만, 책장에서 숙성의 시간을 가지는 책들도 많다. 자기 시간이 되면 노크를 한다. 그러면 나는 가만히 뚜껑을 열어 깊은 맛을 즐기는 거다.
책이든 글이든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물건이 아니다. 나는 내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주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건 글의 성질에 맞지 않다. 글을 쓰는 것과 읽는 것은 같지 않다. 글을 쓸 때는 처음부터 끝까지 써야 한다. 하지만 읽을 때는 읽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 이유란 특정하거나 구체적인 이유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특별히 이유에 대해서 생각하라는 뜻도 아니다. 우리가 글을 잡을 때는 알든 모르든 이미 이유에 대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다. 마음이 이끌리는 부분을 찾아서 읽을 부분을 줄여야 한다. 다 읽으려고 하는 건 아무것도 읽지 않겠다는 것과 같다.
책을 읽을 때도 핵심을 찾아 자세하게 읽듯이, 내 글을 전할 때도 핵심만 자세히 읽어 주기를 바란다. 자기 상황에 맞아서 깨달음을 주고, 현 상황에서 한 걸음 물러나 여유를 가질 수 있게 하는 부분, 한 문장 혹은 하나의 표현을 찾아서 자세히 읽고 깊은 생각으로 몰입하기를 원한다. 이런 마음을 가지면 글 쓰는 이도 마음이 훨씬 편하다. 완벽한 사람은 없듯이 비평을 피할 수 있는 글은 없다. 깊은 통찰을 전해주면 어렵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고, 재밌는 글이면 가볍게 느껴질 수 있고, 값진 정보를 전해주면 표현의 매끄럽지 못함을 탓할 수 있다.
글을 너무 미남 미녀로 만들려고 애쓰지 말자. 글은 나 혼자 쓰는 게 아니다. 눈에 보이는 글은 내가 쓰지만 그 한편에는 눈에 보이지 않게 글을 쓰는 이들이 있다. 우리가 몸과 마음을 갖고 있듯이 글도 마찬가지다. 활자로 된 몸과 읽는 이들이 불어넣어주는 생명력과 마음이 합쳐져야 비로소 살아있는 글이 된다. 이렇게 보면 글을 창조하는 건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