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고를 보았다. 무서웠다. 내 안에서 잔인하게 웃는 에너지가 느껴졌다. 내가 한 잘못된 행동을 해결할 수 있는 어떤 의지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무서운 에고가 나타났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사람이 도를 정하면 자연의 도가 아니고, 사람이 이름을 정하면 자연의 이름이 아니다.”
진리에 대한 관점을 본질론과 관계론으로 나눠보자. 본질론은 절대 불변의 본질적인 진리가 존재한다는 관점이다. 이런 구조에서는 서열이 생기고, 옳고 그름이 생기고, 집착이 생기고, 권력이 생기고, 종국에는 폭력이 생긴다. 한편 관계론은 모든 것은 관계로 이뤄져 있을 뿐, 절대 불변의 진리는 없다는 입장이다. 관계론의 바이블인 도덕경은 시작에서부터 이것을 분명히 한다. 하지만 마음은 이 구조를 아주 싫어한다. 나는 본질론에서 관계론으로 건너오는데 40년 이상이 걸렸다. 정확하게는 건너가는 중이다. 그 세월에서 얻은 한 가지가 바로, 본질론의 한계와 관계론의 가능성이다. 마음은 이해하고 소유하고 믿는 걸 좋아한다. 그런데 관계론의 구조에서는 ‘이것이다’라는, 마음이 붙잡을 만한 것을 내어주지 않는다. 마음의 기반이 사라지기 때문에 마음은 몹시 불편해하고 불안해한다.
본질론은 마약과 같고, 관계론은 자연치유와 같다. 본질론은 보통 심신의 강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취하는 경우가 많다. 마음이 좋아할 만한 것을 쥐어주면 고통을 잠시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마약과 같다. 고통을 잊은 시간보다 훨씬 오래 부작용을 겪어야 한다. 특히 심한 부작용은 중독성이다. 본질론적인 접근은 마음을 강하게 중독시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한다. 자꾸만 그쪽으로 마음이 향한다.
본질론이 자기의 힘을 믿는 것이라면, 관계론은 존재의 힘을 믿는 것이다. 본질론이 자기를 강화시켜 삶을 이끌려고 하는 것인 반면, 관계론은 자기를 점점 희미하게 해서 삶이 저절로 펼쳐지게 허용하는 구조다. 관계론이 마음의 착각과 오해를 바로 공략하는 것이라면, 본질론은 마음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개념들, 호흡, 진아, 참나, 도, 의식, 깨달음 등을 이용하는 방식이다. 본질론적 접근은 에고의 먹이가 될 가능성이 아주 크다. 본질론적 방법에 의존하는 마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본질론의 문은 ‘이것이다’이고, 관계론의 문은 ‘이것이 아니다’이다. ‘이것이다’라는 문으로 들어가면 마음이 거기에 들러붙어 집착하게 된다. ‘이것이 아니다’라는 문으로 들어가면 마음은 희미해지고 대신 그 자리에 삶이 들어선다. 나는 질문을 맞닥뜨리면 반대로 생각해보는 걸 좋아한다. 나는 누구인가 대신 어떨 때 나는 내가 아닌가로, 어떻게 살 것인가 대신 내가 살고 싶은 않은 삶은 어떤 것인가로,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대신 나는 무엇을 원하지 않는가로 말이다. 진리를 손에 쥐면 그것은 이미 진리가 아니다. 진리가 아닌 것을 잘 골라냈을 때 우리의 존재 자체가 진리다.
진리를 찾는 이유는 진리가 좋은 것이기 때문이 아니다. 진리를 좋은 것이라고 믿는다면 진리에 집착하게 될 것이다. 진리를 찾는 이유는 삶을 건강하게 하기 위함일 뿐이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에게는 진리가 필요 없다. 그들의 삶은 이미 건강하고 자연스럽고 활력이 넘치기 때문이다. 자라면서 어느 순간부터 자기가 삶보다 커지면서 삶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방해하기 시작한다. 이제 진리가 필요해진다. 항상 삶을 보자. 삶이 아름답다면 진리는 더 이상 필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