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야 명상은 어떻게 하는 거야? 타이탄의 도구들 보니까 다 명상하던데, 나도 한 번 해보려구. 히히"
아내가 명상을 가르쳐달라고 했다. 네 살 아이에게도 명상이란 말이 익숙할 정도로 내 삶에 명상은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명상을 물어보는 아내의 물음에 나는 자신 있게 답할 수가 없었다. 나는 의문에 사로잡혔다. 가족에게 권할 수 없는 명상이 과연 올바른 명상일까?
"고요히 눈을 감고 깊이 생각함, 또는 그런 생각"
명상의 사전적 정의는 단순하다. 하지만 내 경험상 명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다들 명상이 좋다고는 하는데 막상 하게 되면 너무 모호하고 뭐가 좋은 지도 사실 잘 와닿지 않았다. 명상은 그 의미가 통일적이지 않다. 쓰는 사람마다, 단체마다, 문화마다 가리키는 내용이 다 다르다. 따라서 비판적인 자세 없이 받아들이면 명상이 독이 될 가능성이 아주 크다. 또한 명상은 상업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서 마트의 코카콜라처럼 설탕이 듬뿍 들어있는 상품이 된 경우도 적지 않다.
결론부터 말해서 자기 자신을 위한 명상은 해롭다. 자기를 위한 명상으로 상태가 점점 좋아지면 욕심도 점점 커진다. 결국 욕심을 위한 명상을 하게 되고 명상에 집착하게 된다. 명상은 삶을 위한 것인데, 명상이 삶보다 앞서게 된다. 이렇게 되면 명상이 자기를 장식하고 우월감을 느끼게 해주는 전혀 명상적이지 않은 도구로 전락한다. 이런 상황의 결론은 좋을 수 없다.
명상의 핵심은 '자기 자신에게 속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남들에게 속는 것에는 아주 예민하지만 정작 스스로에게 속는 것에 대해서는 인식조차 없는 경우가 많다. 자기 자신을 잘 들여다보면서 '이 생각과 마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하고 진지하게 물어보라. 삶을 살고 있는 존재가 자기 자신이 맞는지 살펴보라. 명상은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자신의 내면에 관심을 가지고 주권을 되찾는 작업이다.
명상은 보통 세 가지, 집중명상, 통찰명상, 자비명상으로 나눈다. 집중명상은 마음을 다잡는 것이고, 통찰명상은 현상의 실체 없음을 이해하는 것이고, 자비명상은 개체로써의 나를 넘어서 존재 전체에 관심을 가지는 작업이다. 이 세 가지 명상에서 공통적으로 중요한 것은 '나는 왜 명상을 하는가?'이다. 일상의 평범한 행동들에서 나를 빼면 모두 명상적이다. 경험상 나를 내려놓는 것이 가장 수월한 방법이 자비명상이었다. 나는 집중명상과 통찰명상에서 자비명상으로 시선이 옮겨가고 나서부터 명상의 효과와 의미를 더 깊고 현실적으로 느끼고 있다.
나는 자비명상을 세 가지로 진행한다. ~하기를(축복), ~해서 감사하다(감사), ~해서 참 좋다(축하) 이 세 가지다. 타인을 위해 축복하고, 삶에 감사하고, 타인의 성공에 함께 기뻐해 주는 작업이다.
축복은 타인의 행복이 증가하고 고통이 감소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자비명상의 시작은 타인이 나와 동일하게 행복을 바라고 고통을 원하지 않는다는 인식이다. 타인이 행복하기를, 편안하기를, 성공하기를 기도해준다.
세 가지 중에 가장 어려운 것이 감사다.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자칫하면 마음 없이 말로만 감사하는 공염불이 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타성에 젖기가 가장 쉬운 작업이다. 감사에 대한 관점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
감사는 가슴에 이는 뭉클함이 아니다. 감사를 그렇게 보면 감사가 어려워진다. 감사는, '있음의 자각'이다. 지금껏 아무 생각 없이 누리던 것들이 내 옆에서 나를 위해 존재하고 있음을 알아주는 것이다. 감사를 이런 시각으로 보면 감사할 일이 많아지고 감사가 쉬워진다.
좋은 일이 생김도 감사할 일이지만 나쁜 일이 일어나더라도 빨리 그치거나 생각보다 크지 않음도 감사할 일이다. 전자보다 후자가 감사하기가 더 어렵고 낯설다. 그만큼 감사의 효과는 더 크다. 이 둘을 섞어서 사용하자.
축하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속담에 반기를 드는 작업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함께 기뻐하며 덩실덩실 춤을 추는 마음이다. 타인이 잘 된 걸 마치 내 일인 양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것이다.
왜 자비명상을 하는가? 자비명상은 자신의 권력기반을 다지기 위해 대외선전용으로 사용하는 정치도구가 아니다. 에고를 위한 자비명상은 역시 해롭다. 타인과 공동체를 생각하는 마음은 자신을 만나기 위한 한 방편이다. 따라서 자기에 대한 성찰 없이 공동체를 강조하는 행위는 자기에게 속기 쉽다. 공동체를 내세우면 꼰대가 되기 쉽고, 자기 자신을 강조하면 자의식에 갇히기 쉽다. 자비명상은 타인을 통해 좁은 자기에서 벗어나고, 자기 안에 있는 자비심을 통해 공동체로 나아가는 훈련이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행복하기를, 편안하기를, 성공하기를. 내 글을 읽어주는 당신이 있어서 감사하다. 당신이 이 글을 읽을 수 있는 여유가 있어서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