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에서 기술로
공부와 일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궁금한 사람에게
"현재의 지식기반 사회에서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해서 나는 잘못된 방향을 잡고 있었다. 지식기반 사회니까 많은 지식이 성공의 조건이고, 인문학은 오랜 세월 검증받은 지식이니까 인간적인 삶을 위해서 필요한 줄 알았다. 지식을 쌓고 인문학 책을 읽으면서 시대에 맞게 고차원적으로 살고 있다고 자위했다. 하지만 읽은 책과 지식이 쌓일수록 공허한 마음이 커져갔다. 온 사회가 강조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 걸까? 내게 무엇이 부족해서일까?
내 삶이 팍팍했던 이유는 지식 때문이 아니었다. 문제는 내게 기술이 부족하거나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장자의 윤편 이야기를 보라. 열자의 여러 이야기를 보라. 도는 지식이 아니다. 기술에 가깝다. 내 몸으로 익힌 것, 말로써 전할 수 없는 것, 이것은 지식이 아니라 기술이다.
그렇다면 지식 산업 사회는 무엇을 뜻하는가? 지식이 중요하다는 얘긴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 보니 크게 속고 있었다. 지식이 중요한 시대라는 얘기가 아니었다. 역시 핵심은 기술이다. 다만 이 시대에는 지식을 다루는 기술이 핵심 요소로 부상했다는 말이다
현대 사회는 과거에 비해서 지식의 증가 속도와 다루어야 하는 지식의 양이 엄청나게 늘었다. 당연히 이 속도와 양을 잘 소화할수록 생존력이 높아진다. 지식을 다루는 기술이 핵심인 사회, 이것이 현대 사회의 속성이다.
미국의 인문학 교육을 말하면서 무료 인문 강좌인 '클레멘트 코스'를 자주 언급한다. 흑인들에게 기술교육만 시키고 지식교육을 시키지 않으려는 백인들에게 반기를 드는 내용도 나온다. 이것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이때 지식과 기술은 어떤 의미로 쓰였는가? 흑인에게는 리더의 필수 자질인 지식을 다루는 기술을 훈련시키지 않겠다는 말이다. 지식이 기술보다 중요하다는 말이 절대 아니다. 토론이나 대화에서는 지식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말하는 기술이 있는 사람이 이긴다. 대표적인 사람이 소크라테스다.
철학은 생각하는 기술, 자기를 성찰하는 기술, 말하는 기술을 닦는 학문이다. 나는 어떤 기술을 가지고 있는가? 앞으로 어떤 기술을 가지고 싶은가
학교교육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학교 교육이 실패하는 이유는 기술이 아니라 지식을 다루기 때문이다. 성공적인 교육환경일수록 예체능과 독서, 글쓰기, 토론을 강조한다. 이것이 몸으로 기술을 익히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지식을 다루는 기술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다치바나 다카시는 현재의 시험은 시대에 맞지 않다고 말한다. 시험의 목적은 머릿속에 암기된 지식의 파편이 아니라, 필요한 지식을 찾아서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에 대한 검증이어야 한다. 정해진 시간 안에 대답 잘하는 능력이 아니라, 문제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중심을 두어야 한다. 이런 교육을 받은 사람은 학교 밖이라는 진짜 세상에서도 수많은 인생문제에 대해 스스로 헤쳐 나가는 건강한 인간이 될 것이다.
자신의 일을 지식이 아니라 기술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사람이 목표를 이루고 목적에 다가갈 것이다. 나는 정보를 해석하고 생각하고 내 글로 표현하는 기술, 명상과 산책을 통해 내면을 아름답게 가꾸는 기술, 사회에 공헌하는 기술을 갖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