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의 도시락
오후 2시 30분.
한때 점심의 중심을 차지하던 시간은 이미 기지개를 켠다. 을지로 직장인들은 테이크아웃 커피를 한 손에 들고 청계천을 거니는 사이, 한 숟가락의 순두부와 함께 고요하게 존재감을 발산하는 이들이 있다.
“아, 저 사람도 대표구나.”
비단 정장도 아니고, 명함을 돌리는 것도 아닌데 —
이건 그냥 보면 안다.
누가 봐도 대표.
혼자서, 말없이, 조용히 밥을 먹는다.
이상한 일도 아니다.
대표는 본디 혼밥의 귀재다.
점심시간의 사회적 허들 따위는 이미 오래전에 뛰어넘었다.
함께 먹자고 누가 부르지 않는 것도 있지만, 굳이 부르지 않아도 된다.
왜냐고? 혼자 먹는 게 더 편하니까. 그리고 이건 거의 생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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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직장인들. 우르르 몰려 나가 설렁탕 한 그릇씩 앞에 두고 “어제 회의 진짜 지옥이었죠”로 시작되는 점심의 미학.
하지만 실상은 ‘정크푸드 in disguise’ — 매일 같은 메뉴에 같은 이야기, 같은 커피, 같은 담배 타임이었다.
그에 비해 10년간의 뉴욕 시절의 나의 점심시간은 정말 느낌이 사뭇 달랐다.
쿠킹포일에 싸 온 식빵 두 조각 안에 햄 한 장, 상추 한 장, 치즈 한 장.
그리고 근처 수프 가게(1)에서 사 온 스몰 사이즈 토마토 바질 수프.
이게 내 도시락 풀 세트였다.
그걸 사무실에서 먹으며 일도 하고 이메일도 확인하고 — 말하자면 점심은 잠깐 쉬는 시간이라기보단, 덜 일하는 시간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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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돌아와 회사를 운영하며 보니, 점심이란 게 무척이나 ‘사회적’인 이벤트가 되어 있었다.
정해진 1시간.
이 시간을 어떻게든 꽉꽉 채우려는 움직임들.
“오늘 뭐 먹을까?”로 시작해 “커피는 어디로 갈까?”로 끝나는 장대한 여정.
거기에 어울리지 못하면 소외감을 느끼기 딱 좋은 구조다.
그런 면에서 대표는 자유롭다.
초대받지 않아도 괜찮고, 누굴 초대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1인 회덮밥 하나 시키면 된다.
심지어 초고추장도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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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대표의 점심이란, 생각보다 깊은 내향의 길이다.
MBTI 따위 몰라도 대부분의 대표는 점점 I가 되어간다.
물론 원래부터 혼자 먹는 걸 좋아했던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놀라운 건, 예전엔 사회성 만렙이었던 사람도 대표가 되면 혼밥 스킬이 10 렙 찍힌다는 사실이다.
왜?
일단 먹자고 같이 나갈 사람이 잘 없다.
그리고 대표가 식당에서 2인분 이상 주문되는 메뉴를 마주할 때의 침묵.
닭갈비, 삼겹살, 부대찌개… 이 땅의 점심 메뉴 절반이 혼밥 금지다.
하지만 여기서 의연하게 혼밥을 먹는 사람. (대개는) CEO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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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예외도 있다.
말 그대로 ‘사교의 왕’인 대표.
회식 좋아하고, 점심 약속이 주 5회 이상인 사람.
그런 대표 곁의 직원들은 종종 식사 스트레스를 호소한다.
“오늘은 혼자 먹고 싶은데요…”라는 말 한마디가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그에 비해, 나처럼 (이제는) 식단을 철저히 지키는 대표는 혼밥의 신세계에 진입한 셈이다.
샐러드, 포케, 회덮밥 — 모두 훌륭한 1인 메뉴.
주문도 간편하고, 메뉴 선택도 자유롭다.
그리고 무엇보다…
같이 먹는 사람의 입맛 눈치 안 봐도 된다.
누가 뭐래도 샐러드가 좋다.
(물론 닭갈비도 영양학적으로 나쁘진 않다, 다만 치즈+볶음밥은 명백한 박용우 교수님에 대한 신의성실 위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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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글의 결론은 단순하다.
하나. 점심은 원래 혼자 먹는 음식이다. 특히 대표라면, 혼밥은 숙명이자 은혜다.
둘. 식단을 하는 대표에게 점심은 자유이자 구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사회에 1인분 회덮밥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괜찮다.
오늘도 나는 도시락 같은 마음을 들고 식당 문을 연다.
거기엔 또 다른 대표가 있다.
말없이, 같은 자세로 밥을 뜨고 있다.
고개는 숙였지만, 어깨는 안다.
“당신도 CEO의 도시락을 드시는군요.”
(1) Panera Bread라는 미국에서는 꽤 김밥천국 포지션정도로 생각해 주시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