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한강(그리고 그) 너머의 작가가 필요한 이유

문학적 소양의 양극화

{가장 내가 지양하고자 했던

토픽 (정치, 영포티식 훈계, 현학의 뽐냄 등)..

정식 회차는 아니고 외전으로 나눠 보고 싶어서 소개해 봅니다. }



최근 재미있게 읽은 책중에 한강 작가의 『빛과 실』이라는 책이 있다. 그녀와 나 사이의 정치색과는 무관하게, 순수하게 그녀의 글쓰기력(力)을 감상하기 위한 염탐의 자리.. 이제 어머니 생신에 맞춰 책 속 생일축하편지와 함께 떠나보냈다. (하지만 다시 한 권 구매하여 아내에게 전달할 생각이다)


그녀가 힘을 빼고 쓴 문장은, 오히려 내 마음에 묵직하게 와닿는다.

나는 이제야 알겠다. 문장이 꼭 화려해야 감동을 주는 건 아니라는 걸.

그녀의 문장은 그저 평범한 일상의 틈새에서 무심히 뚝, 떨어져 나온 운석 같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책을, 원문으로 읽고 있다.’

내가 이토록 깊이 빠져드는 건, 그녀가 의도한 말의 리듬, 숨결, 여백을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대부분의 세계 문학은, 우리는 번역으로 읽는다.

노벨문학상 작가들의 작품도, 그들이 공들여 쓴 수십 년의 문장도,

사실은 ‘번역가’라는 필터를 거쳐서 내게 도착한 것들이다.


가끔은 이런 생각도 해본다.


헤밍웨이의 문장은, 정말 그렇게 건조했을까?


“The sea is kind and very beautiful. But it can be so cruel…” (1)

— Ernest Hemingway, The Old Man and the Sea


동물농장, 나폴레옹의 연설은 조지오웰상(さん)의 의도대로 우리에게 전달이 되었을까?


아무리 훌륭한 번역가라 해도,

그 언어의 진짜 감각, 태어난 자리에서 뿌리내린 그 언어의 숨소리를 100% 옮겨올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생각해 보면, 문학도 결국 ‘언어 주권’의 문제인 것 같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나라의 사람들은, 수상 작가들의 문장을 ‘원어’로 느끼고,

그 감동을 피부 밑, 혈관 밑, 어쩌면 DNA 단위로까지 흡수할 수 있다. (너무 부럽다)

반면 우리는 번역을 통해 그 문장을, 정제수처럼 조심스럽게 흡입한다.

그래도 좋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거리는, 분명 존재한다.



문학적 양극화는 그렇게 생기는 건 아닐까?


언어 선진국과 문학 후진국 사이의 무형의 간극.

그리고 그 간극을 메우는 일은 생각보다 꽤 지난(至難)하고, 외롭고, 무지근하다.


그래서 나는 한국어로 쓰인, 훌륭한 문장을 읽을 때마다 고맙다.

그리고 한강 작가처럼, 번역 없이도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작가들이 더 많이 나왔으면 한다.

그러면, 우리도 언젠가는 그들처럼 —

수입된 문장이 아니라, 발화된 문장을 읽으며 자라날 수 있지 않을까.


(1). “바다는 아름답다… 그리고 잔인하다.”. - 나는 이 문장이 유독 성의 없지만 많은 것을 함축하는 표현이었다 생각하지만… 불쌍한 산티아고.. 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