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연기 수업에 가는 이유
(2021년 6월 1일의 글)
마스크를 벗을 수 없는 일상이 된 이후로 집에서 드라마를 참 많이 봤다. 밖에서 문화생활을 즐기긴 커녕 외출도 삼가야 했던 2020년 초반. 티케팅 성공한 내한 뮤지션의 공연도 취소되었던 그때…. 살면서 드라마와 영화를 제일 많이 본 시기는 아니었지만, 할 수 있는 활동이 확 줄어들다 보니 OTT 서비스로 콘텐츠를 보는 게 일상에서 거의 유일한 스펙터클이었다.
그래서 전과 다른 것이 관심사로 치고 올라왔나 보다. 그전에도 배우들의 열연을 보며 어떻게 저런 감정을 보여주냐고 감탄했지만 그건 어차피 나와는 전혀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다. 나는 영상 콘텐츠를 볼 때 영상미와 연출 쪽에 더 관심을 두었고,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내는 능력에 감탄했다. 그런데 작년부터 연기의 감각이 궁금해졌다.
넷플릭스 <킹덤>에 '영신' 역으로 출연하는 김성규 배우의 연기가 그 시작이었다. 극 중 호랑이를 잡는 군인 출신으로 나오는 그는 정말 조선 시대에서 온 사람 같았는데, 가장 놀라웠던 건 그의 몸짓이었다. 물론 캐릭터에 맞게 몸동작도 연구하겠지만 그렇다고 진짜 맹수랑 싸우며 훈련할 수는 없었을 텐데, 어떻게 저런 몸짓이 나오지. 그때부터 연기한다는 건 어떤 일일까, 어떤 감각일까를 자꾸 상상해 보게 되었다. 만약 연기라는 게 나이면서 내가 아닌 감각이라면 그건 어떤 걸까. 알고 싶다, 나도 경험해 보고 싶다. 호기심은 점점 진심이 되었고 언젠가 여유 되면 한번 연기 수업을 들어보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나 했다.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그런데 막상 연기를 배울 기회를 목전에 두니 부담스러워졌다. 연기는 너무 새로운 분야라서 괜한 짓인가 싶고 사람들 앞에서 뭘 하게 될지 모르니 걱정 되기 시작했다. 내 고민을 들은 친구는 쉽게 답을 내놓았다.
“안 할 이유가 없지 않아? 나이 먹을수록 새로운 사람 만나기 힘든데 한번 가 보지? 그 재미로 하는 거지.”
역시나 진취적인 친구의 대답에 한 번 놀라고, 동시에 또 놀라지 않으면서-왠지 그렇게 말할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갈수록 만나는 사람하고만 만나고 얘기하는 사람하고만 얘기한다. 수업에서 뭘 배울지도 궁금했고, 다른 수강생들은 어떤 분들일지도 궁금해져서 새로운 도전을 무르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첫 수업에 나갔다.
첫 수업에선 사람들 앞에 서 있기를 했다.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아무 일도 않고 가만히 서 있기란 꽤 고역이었다. 머릿속으로 노래 한 곡을 틀어서 거기에 집중했다. 사람들과 눈을 마주쳐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애매하게 허공 어딘가를 보았다. 나중에 들으니 나는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고 한다. 시간이 좀 지난 다음, 선생님이 그 상태 그대로 강의실 뒤편의 의자 개수를 세어 보라고 했다. 의자가 하나, 둘, 셋… 스물, 스물 몇 개……. 다 세고 나면 손을 들라고 했다. 그다음 자리로 돌아갔다. 모든 수강생이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나서야 이걸 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선생님의 질문은 가만히 서 있을 때와 의자를 셀 때 차이가 있었냐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할 일이 없을 때와 비로소 할 일이 생겼을 때 무엇이 더 자연스러운 상태가 되었냐는 뜻이다. 답은 당연히 후자였다. 의자를 세는 동안 나는 잠시나마 앞에 앉은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내가 뭔가에 몰입하게 되면 관객의 시선은 저 너머로 사라진다. 실제로 사라진 건 아니지만, 그들을 의식하지 않는 나는 거기서 벗어나 한결 자연스러워진다. 연기란 결국 관객이 보내는 시선의 힘 앞에서 몰두할 ‘일’을 찾아내 하는 것이란 설명을 들었다. 이건 연기 수업이 아니면 딴 데서 배워볼 수 없겠구나. 나는 수강 여부를 고민하던 마음을 깨끗이 접었다.
우리는 수업 시간 내내 한 명 혹은 두 명씩 짝지어 ‘무대’(강의실 앞 공간)로 나가서 주어진 상황 안에서 즉흥 연기를 한다. 같이 연기할 사람-즉석에서 정한다-과 상의할 수 있는 건 연기할 ‘우리’가 어느 정도의 사이인지, 그래서 결말은 대략 어떻게 낼 건지 정도다. 수강생이 여러 명인데 신기하게도 상황을 풀어가는 방식이 겹치지 않는다. 그리고 강의가 진행될수록 상황은 조금씩 더 복잡해진다. 상황이 점층적으로 더해지니 횟수를 가르기 다소 모호하지만, 지금까지 다섯 번은 넘게 즉흥 연기를 했다.
기억에 남는 상황극이 두 개 있는데, 그 중 첫 번째는 서로 다른 곳으로 여행을 가고 싶은 두 사람이 자기 의견을 내세워야 하는 설정이었다. 내가 제주도로 여행 가고 싶어 하면 상대방은 강릉에 가고 싶다는 식이다. 수업 초기에 한 것이라 짧은 상황극이었는데, 나는 이 상황극에서 조금 충격을 받았다. 연기 수업에서 처음으로 진지하게 받은 충격이었으리라.
이걸 얘기하려면 그때 상황을 부연할 필요가 있다. 상황극이 시작된 후, 그날 상대역이셨던 분이 여행의 성격을 즉흥적으로 신혼여행으로 정하면서, 우리는 신혼여행지를 두고 갈등하는 커플 역할을 하게 되었다. 각자 가고 싶은 여행지를 두고 장점을 설파하거나 상대방이 든 이유를 반박하거나 했다.
내가 들은 설득 중에서 솔깃한 것도 있지만 상황극 속의 두 사람 관계가 삐걱거릴 만한 말도 있었다. 가령 거기로 여행가면 좋을 이유로 전여친이 예전에 거기 살아서 그 동네를 잘 안다던가. 상대방의 대사를 듣고 딱 드는 생각은 ‘아, 이 결혼은 안 될 것 같은데.’ 그러나 불편한 심기가 올라오려는 찰나 나는 ‘내가 여기서 세게 말해도 되나? 그럼 싸우게 되나?’ 따위의 고민을 하며 순간 드는 감정을 꾹꾹 눌렀다. 그건 일상에서 여러 번 맞닥뜨리는 감각이자 감정 상태였고, 나는 익숙한 선택을 했다. 생각나는 걸 굳이 말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연기에 대해 코멘트하기 전에 ‘근데 이 커플 결혼할 수 있을까요?’를 물으셨다. 못 할 거 같은데요.
대부분 그런 의견이었지만 다른 의견도 있었다.
“결혼할 거 같은데요? 계속 끌려다니잖아.”
듣는 순간 찔렸다. 자기 생각을 바로 말하지 못하고 의견이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지쳐서 그 관계를 바래게 하는 평소의 내가 찔렸다. 그리고 무대 위에서 내가 머뭇거릴 경우 내 실제 심사가 얼마나 다르게 전달될 수 있는지 직접 들으니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평소에 다른 사람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때 내 생각을 말하기보다는 침묵으로써 의사를 표현하는 편이다. 그런 방식이 연기에서, 무대라는 장소 위에서 얼마나 무의미한지. 심지어 오해를 낳을 수도 있다. 만약 이게 더 진지한 상황이었다면 더 심각한 오역을 만들어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내 표현방식과 그 순간의 선택에 대한 회의가 왔다.
하고픈 말을 삼켜서 의도를 전달하는 연기도 있겠지만 그때 내가 하고 싶은 건 그게 아니었다. 신혼여행지를 정하는데 전여친 얘기라니. 사실 나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라고 반응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내 고민은 연기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의 흐름’ 위에 있지 않았다. 나쁜 사람은 되기 싫다는 일상의 욕망과 습관이 관여했고, 몰입은 그로 인해 깨졌다.
몰입에 대한 설명 이후로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연기하지 마세요’였다. 이 수업이 지향하는 연기관은 이렇다. 작위적인 연기가 아니라, 일상의 나를 연기하되 일상의 나라는 고정관념에 갇히지 말 것. 연기하라고 주어진 상황에서 평소 나는 이렇지, 하며 그것대로만 연기해선 안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아무리 짧은 즉흥연기여도 그 안에 기승전결이 있고 변화가 있어야 한다. 배우는 모두 역할이 있어서 무대 위로 올라간다.
이 가르침을 절감하게 해 준 상황극이 있다. 등장인물 설정은 지갑을 잃어버려서 분실 장소로 추정되는 곳으로 급하게 돌아온 사람, 그리고 마침 그 장소에서 쉬고 있던 사람이었다. 지갑을 잃어버린 사람은 그곳에 있던 사람을 의심하게 된다. 나는 후자의 역할을 맡았는데, 우리가 설정한 결말은 지갑을 분실한 사람이 결국 자기 가방 안에서 지갑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상대 수강생이 지갑을 발견하고 머쓱하게 나를 쳐다보고, 나도 눈에 힘이 들어가려는데 선생님이 ‘자, 끝!’을 외쳤다. 그리고 내가 받은 질문.
“한서밀 씨는 의심받으면 열 안 받아요?”
“음…, 그냥 안 엮이고 빨리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건 오늘 A 씨의 연기가 격했기 때문이죠. 다른 사람과 했으면 한서밀 씨는 다른 식으로 연기했을 거예요. B 씨 팀처럼 서로 언쟁을 했을 수도 있고요. 그 점에 대해 생각해보세요.”
사실 선생님이 코멘트할 당시에도 잘 못 들었기 때문에 아주 정확한 멘트는 기억나지 않는다. 듣고 나서도 무엇을 생각하라는 건지 짐작을 못 했는데, 다른 분들 연기의 코멘터리를 듣다 보니 아, 이건가 싶었던 지점이 있었다.
그날 내가 한 연기는 철저히 일상 속의 내 선택에 기반했다. 연기하지 말라는 말이 강하게 박혀서 일상 속의 나였다면 이랬을 거라는 판단 속에서 움직였다. 앞선 경험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잘못 흘러가고 있던 셈이다. 그와중에 또 상대방이 보내는 힘을 계속 ‘받기만’ 했다. 받아치기도 해야 했다. 연기에선 갈등조차 합이니까. 어쩌면 그날 상대의 태도가 점점 격해진 데에는 내 영향도 있는지 모른다. 내 반응이 작으니 맞은편 액션이 점점 더 커진 걸지도.
연기할 때 ‘그냥 그런’ 사람이 되는 건 싫다. 드라마에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배역은 점점 분량이 줄어들고 희미해지다 못해 사라지겠지. 연기가 글이나 그림과 다른 점은 나 자신이 바로 표현의 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연기는 현장성 위에 있다. 글처럼 베를 짜듯 표현을 직조해나갈 시간적 여유도 없고, 그림처럼 지우고 다시 그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 자신이 바로 표현의 요소가 되니까, 내가 욕심을 내야 한다. 내 의도와 표현에 대한 것이든, 나 자신의 존재감에 대한 것이든.
어떤 날은 수업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생각이 많아진다. 그날 연기에서 아쉬웠던 점에서 시작해 평소 내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까지 되짚어보게 된다. 그때그때 표현 안 한 게 나한테 상처가 되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것 때문에 오늘 연기도 그렇게 나왔구나 싶어 가슴 한켠이 조금 따끔거린다. 내 의견을 말했을 때 누군가 날 싫어하거나 미워하게 될까 봐 겁이 났고, 그렇게 되면 그게 더 상처일 거 같아서 나는 보통 ‘이 정도는 감당할 수 있어’라는 생각을 많이 하며 내 말 꺼내기를 꺼렸다.
말을 꺼냈다가 잘 풀린 경험보다는 잘 안 풀린 경험이 기억에 더 깊게 남아 자꾸 그런 선택을 하게 된다. 그러나 나를 들여다본 날에야 풀리지 않은 감정들이 퇴적되어 있던 걸 알게 된다. 해묵은 감정들은 다른 목소리를 내고 싶은 나를 침묵하게 만든다. 그런데 무대 위에서 본래 정적을 위한 게 아닌 정적은 흐름이 끊기는 사고가 되고, 받아칠 줄 모르는 상대는 희미하고 매력 없는 인물이 된다. 그건 싫다.
연기를 배우고 나서 내가 결심한 바는 한 가지. 내가 좀 바뀌어야겠다. 더 나은 표현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그러고 싶고, 변할 수 있을 것 같다. 신기한 일이다. 일상에서 이런 자각이 들었더라면 나는 또 쉽게 자괴감의 늪에 빠졌을 텐데, 무언가를 표현할 때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니 변하고자 하는 마음이 버겁게 느껴지지 않는다. 예술적 체험 안에서 자각한 바는 자연스럽게 나를 채우고 다듬자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나는 더 분명하고 좋은 걸 만들어내고 싶다. 연기도 마찬가지다.
연기 수업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연기가 나와 만나는 통로가 되어주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연기에는 연기만의 자유가 있다. 짧은 즉흥연기에서 나는 변화를 경험하지만, 당장 뭔가를 완성해야 할 의무가 없다. 그보다는 상황에 몰입해 상대와 관객의 시선이라는 외부의 힘을 받아 나를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길 바란다면 완결을 내야 하는 글과는 또 다르다. 그런 색다른 자유를 누리며 다음은 또 나의 어떤 면을 감각할 수 있는지 기대해 본다. 그게 매번 이 낯선 수업에 가는 이유다.
수업을 꾸준히 듣고 나서 느낀 바를 글로 두어 편 더 풀고 싶은 마음이 있다. 수업 중반에 다다랐을 때 한 편, 수업을 다 들은 후 또 한 편, 이런 식으로. 그때쯤이면 다음의 말을 더 잘 이해하며 새로운 글을 지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연기 선생님의 말씀 중에서 굉장히 인상 깊었던 문장 하나를 두고 글을 끝맺을까 한다.
“무대에선 이기적인 사람이 가장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