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이야기
아끼던 무언가를 잃은 순간을 떠올리는 것으로 과거의 어느 날 전체가 생생해진 적이 있나요? 저는 최근에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계기는 몇 줄의 글귀였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상실은 인생 안에서 자연히 보상되더라는 내용의 짧은 인용문이었죠. 망가져서 더는 착용할 수 없게 된 몇 개의 장신구와 그것들이 효용을 잃어 못내 아쉬웠던 순간들이 차례로 연상되었습니다. 저는 상실에 대범한 편은 아닙니다. 모처럼 손에 맞던 반지의 장식이 떨어져 나간 날에 그 빈자리를 오래 쳐다보고 있으려니 친구가 그만 보라며 답답해할 정도였거든요. 그 반지는 크게 제 취향도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제 취향에 꼭 맞아서 대학 생활을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물건은 따로 있었습니다. 혼자서 비단잉어 팔찌라고 부르던, 묘한 색 배합을 한 구슬 팔찌였습니다. 정말로 잉어 모양 장식물이 꿰어져 있던 것은 아니고, 구슬의 배경색과 무늬 때문에 별명을 그리 붙였습니다. 검은색 구슬에 흰색이나 분홍색의 불규칙한 무늬가 있는 것이 꼭 연못의 검은 수면 위로 어슴푸레하게 그 화려한 존재감을 내보이는 비단잉어 같았다고나 할까요. 저는 이 팔찌를 참 좋아해서 기분이 좋으면 좋은 대로, 기분 나쁜 날이면 기분이 좋아지길 바라며 이 팔찌를 끼고 외출했습니다. 팔찌가 끊어진 날도 아마 좋은 날이 되기를 바랐을 거예요. 그걸 골라 끼고 외출한 걸 보면요.
여느 때처럼 제 손목에 잘 있던 비단잉어 팔찌는 줄이 끊어져 어느 고깃집 현관 앞 회색 시멘트 바닥에 그 독특한 무늬의 구슬들을 와르르 쏟아냈습니다. 식당에서 무얼 먹었는지는 가물가물한데 구슬이 쏟아지던 순간과 거칠한 바닥 위를 굴러다니는 그것들을 잡아 주머니에 넣던 기억은 선명합니다. 팔찌를 이대로 보내줄 생각이 없던 저는 고무줄만 다시 구하면 될 일이라며 이다음에 꿰어둘 구슬을 열심히 주워 담았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그때 소중하게 집어넣었던 구슬들이 어디에 가 버렸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에요. 미련조차 시간 앞에는 무력해집니다. 어쩌면 ‘다음’이란 건 원래부터 희귀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상실의 순간을 자세히 떠올릴 수 있는 이유는 팔찌가 갑자기 터지듯이 끊어진 일이 제법 극적인 데가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더 주요한 사유가 있습니다. 그날은 익숙한 학교나 집이 아니라 할머니, 할아버지를 뵈러 시골에 내려간 날이었습니다. 낯선 곳은 아니지만 내 생활에 흠뻑 젖어 들 정도로 많은 시간을 보내지는 않은 곳. 들를 때마다 추억이 방울방울 떠오르지만 혼자 길을 찾아다닐 정도로 낯익지는 않은 곳. 이곳은 나에게는 ‘외할머니댁’ 그 자체인 동네입니다.
이때 분명히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뵈러 간 것인데 식당 안에서 같이 식사를 한 가족은 할아버지와 아빠, 그리고 저와 동생뿐이었습니다. 그럼 엄마는 어디 가셨지? 기억을 되새김질해 보니 엄마는 할머니와 함께 요양원에 돌아갔습니다. 할머니는 요양원에서 준비한 식사를 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할머니와 함께 계시기 위해 요양원에 거의 매일 출퇴근하듯 방문하셨던 할아버지와 거동이 불편하셨던 할머니를 잠시 요양원 밖으로 모시고 나왔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반으로 갈라져 있던 하루가 N극과 S극처럼 서로를 끌어당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날이 그럼 할머니를 모시고 드라이브를 했던 날인가? 차창 너머로 달리는 듯한 나무들의 녹음과 시멘트 바닥의 정적인 납작함이 두 가지 기억의 배경을 자처하듯 눈앞에 아른댔습니다. 맞네, 그 두 가지 일이 같은 날에 있던 게 맞아. 판가름이 난 그때부터 회색 바닥에서 구슬을 골라내던 나의 모습과 자동차 창문 안쪽 침묵의 순간까지 기억이 조금씩 조금씩 떠올랐습니다.
그 당시 새로 바꾼 차는 우리 가족이 전에 탔던 것보다 더 많은 인원이 탈 수 있는 차종이었습니다. 더 큰 차를 선택한 데에는 엄마의 소망이 들어 있었어요. 요양원에 계신 할머니께 바깥바람을 쐬어 드리고 싶다는 소망이. 할머니를 차에 태워드릴 때는 아빠가 할머니를 업어드리고 다른 가족들이 할머니가 좌석에 안전히 앉으실 수 있도록 도와드려야 했습니다. 요양원에서 똑같은 방, 늘 같은 풍경만 볼 할머니가 걱정됐던 엄마는 할머니가 가고 싶어 하시는 곳, 경치를 보고 싶어 하시는 곳으로 모실 수 있다는 게 너무 다행스러워 보였고 동시에 너무 마음 아파 보였습니다.
푸릇함이 무성한 길을 달렸던 여름날. 늘 같은 곳에 계시다가 예전에는 직접 걸어 다니셨을 풍경을 모처럼 막내딸의 가족들과 함께, 차 안에서 지켜보시던 할머니의 기분은 어떠셨을까요? 이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지체 높은 양반가 따님이셨던 할머니는 소리 내어 웃으시는 법도 거의 없으셨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날의 가장 큰 후회는 할머니와 저, 동생만 잠시 차 안에 있었을 때 할머니와 더 대화하려 애쓰지 않은 것입니다. 할머니는 경상도 방언을 쓰셨기 때문에 간혹 저는 할머니 말씀 속 모르는 단어를 엄마에게 물어봐야 했습니다. 모르는 건 사투리 색이 매우 짙은 단어 정도였지 할머니 말씀을 통으로 못 알아들은 적은 없었는데, 그날따라 할머니 말씀을 알아듣기가 심히 어려웠습니다. 할머니가 아프셨던 것과 관련 있었을 거 같아요. 저는 할머니가 무슨 말씀을 하신 건지 몇 차례 여쭙고 파악해 보려다 이내 포기해 버렸습니다. 열린 차창 너머로 바깥의 열기가 살살 들어오던 차 안엔 매미 소리, 바람 소리만 흘렀습니다.
앞뒤가 바뀌어 있거나 서로 멀리 떨어져 있던 사건들에 알맞은 순서를 부여하고 나니 그날 하루가 거의 온전하게 정렬되었습니다. 그날의 침묵을 떠올리며 죄책감과 슬픔을 느낀 적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날 전체의 윤곽을 더듬어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무거운 마음이 두고두고 달라붙던 날이라 무의식적으로 기억을 단편적으로 나눠놓았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끼던 팔찌를 마지막으로 낀 날은 할머니와의 유의미한 기억이 있는 마지막 하루이기도 했습니다.
할머니를 모시고 드라이브했던 그 여름날과 달리 검정 반코트를 입을 만큼 추울 대로 추워진 날에, 이모의 전화가 왔습니다. 곧 가실 것 같다는 말. 전화를 끊고 갈아입을 옷을 찾다 ‘엄마-’ 하며 절규하던 엄마를 아빠가 데리고 서둘러 길을 나섰고, 집에 단둘이 남겨진 우리 자매는 처음 겪어보는 공포 속에 서로를 껴안고 흐느꼈습니다.
장례식 날, 내 인생에 항상 계시던 어른을 더는 볼 수 없다는 건 이런 슬픔이구나, 하는 걸 절절히 느꼈고 한참 나중에야 그 슬픔을 정리된 기분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던 하늘, 차갑고 맑은 공기. 그 묵묵한 슬픔. 할머니는 자녀를 모두 아홉 명 낳으셨습니다. 그 형제들이 가정을 꾸리고 이미 손주를 본 집도 있으니 외가 모임을 하면 늘 사람이 많았어요. 할머니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곁에 많이 있다는 게 위안이 되었습니다. 할머니로부터 비롯된 어른들의 등을 따라 걸었습니다. 장지로 가던 길 어딘가에는 가을에 떨어졌을 감이 아직 썩지 않은 채로 몇 개 모여 있었고 이상하게 그 감들이 푸른 하늘과 함께 기억에 남습니다.
떠오르는 일련의 기억을 줄에 꿰어두니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못난 손녀의 죄스러움이 진하게 남습니다. 할머니와의 마지막 기억을 한낱 팔찌로 재구성한 것 같아 그 점도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러나 이 경험을 일상 속 애도의 한 갈래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일상생활 속에서의 애도는 이렇게 플래시백으로도 떠오를 수 있다고 생각하며, 할머니를 떠올릴 수 있는 방법이 할머니 사진과 유품을 어루만지는 것 외에도 존재한다는 의미로 수용하기로 했습니다. 저의 비단잉어 팔찌는 끊어지는 순간 그날의 기억과 단단히 엮였습니다. 이제는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구슬들은 그날에 알알이 박혀 있습니다.
팔찌가 다시 엮어다 안겨 준 하루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글을 씁니다. 기억이 아득한 시간 앞에서 결국에는 파도의 포말처럼 사라지더라도, 계속해서 밀물처럼 와주기를 바랍니다. 상실의 기억에 딸려 오는 헛헛함, 죄책감 때문에 그것을 저 멀리 밀어두기엔 소중한 구석이 너무 많습니다. 빈자리가 눈에 유독 선할 때면 애도하는 자의 목소리로 채워봅니다. 우리 곁을 떠났지만 여전히 소중한 사람에 대해 풀어놓는 목소리가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에 많이 남아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