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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서밀 Jun 02. 2024

토끼풀꽃 노스탤지어

To. 아빠



1. 토끼풀 꽃 노스탤지어


빛은 참 많은 일을 한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들의 색을 드러내는가 하면 들판 위 수많은 생명들을 길러내기도 한다. 빛 아래 오래 있으면 주근깨나 기미를 얻듯이 예상치 못한 색의 터치를 피부 표면에 받기도 하지만, 활기가 약해진 것들은 햇빛 아래 오래 있다 되려 색을 빼앗기기도 한다. 나는 ‘빛바랜’이라는 말에는 사실 대상의 색이 퇴색되기까지 그것을 응시한 빛의 시간이 얼마나 길었는지가 깔려 있다고 생각한다. 


기억에 빛바랬다는 표현을 붙이면 기억은 마치 물성이 있는 사진처럼 여겨진다. 빛바랜 기억. 어쩌면 누군가는, 마음 속 앨범에서 그 기억을 꺼내 빛 아래 오래 두었나. 너무 자주 꺼내 보아서, 아니면 꺼내두고 다시 넣어두기를 오랫동안 잊어버려서. 후자일지라도 그 기억 돌이키기가 기꺼워 꺼내두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그래도 어떤 기억은 예쁜 천으로 고이 감싸서 아주 잠깐씩만 꺼내보고 싶어진다. 먼지 묻게 두지도 않고 계속 매만지느라 귀퉁이가 닳지도 않고 빛에 색이 변하지 않도록. 그렇게 소중하게 간직하다가, 그 기억 속에 같이 있었던 사람을 적당한 때에 불러 앉혀 놓고 그 앞에서 꺼내 다시 생생하게 보여주고 싶어진다. 


빛은 참 바쁘기도 하지. 자기가 키운 식물로 기억을 다시 건져 올려 주기도 하니. 5월, 개망초와 토끼풀이 지천에서 하얀 꽃을 피운다. 푸른 캔버스를 바탕으로 점점이 그려진 흰색 꽃들이 저마다의 높이로 올망졸망하다. 개망초는 자기들 곁을 지나는 사람의 종아리 반쯤에서 오고, 하얀 토끼풀꽃은 그 사람의 발목쯤 올까. 엇비슷한 시기 피어나기 시작한 개망초는 날이 더워지면 산책자의 허리께까지도 자라나 그 큰 키를 늘씬하게 자랑하지만 토끼풀꽃은 여름이 다가올수록 슬슬 생기를 잃고 사라져 간다. 따스한 봄에서 더위의 초입까지, 나는 토끼풀꽃이 풀밭 곳곳에 무리 지어 피어 있는 이 기간을 혼자서 ‘토끼풀꽃 계절’이라고 부르곤 한다. 시간을 나타내주는 자연물은 많을진대 굳이 토끼풀꽃으로 한 시기를 이름 짓는 이유는 아무래도 추억에 있음이다.   


토끼풀꽃 추억은 아빠가 만들어주었다. 봄빛으로 투명한 추억에는 토끼풀꽃으로 만든 반지와 팔찌들이 들어있다. 그때의 아빠는 아직 한참 젊고 나는 겨우 유치원생이나 초등학교 저학년쯤 되었다. 토끼풀꽃 무리는 어릴 적 다녔던 교회로부터 약간 떨어진 공터에 있었다. 엄마는 오르간을 연주할 줄 알았다. 어린 마음에 엄마가 이름도 생소한 데다 크고 중요해 보이는 악기를 연주할 줄 안다는 점이 멋지게 느껴졌다. 엄마가 지금의 재능기부 개념으로 교회 1, 2부 예배 시간 동안 찬송가 반주를 할 때, 이미 예배를 마치고 나온 아빠와 나는 그 작은 풀밭에서 토끼풀꽃으로 반지와 팔찌를 만들어 놀았다. 내가 토끼풀꽃의 줄기 일부분에 틈을 내어 다른 줄기를 넣고 모양을 잘 갈무리해 만들 수 있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을 터이므로 한동안은 아빠가 만들어주고 나는 그걸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을 게다. 


어떤 나뭇잎이나 풀은 잇새에 잘 물면 풀피리가 되고, 목련 꽃잎 하나는 끝을 살짝 물어뜯은 후 숨을 불어넣으면 손바닥 위 도톰한 풍선이 되고, 토끼풀은 다른 토끼풀 줄기에 잘 감아 넣으면 예쁜 장신구가 된다는 사실을 가족이나 친구로부터 하나씩 알아갈 때였다. 생활 속에서 정해져 너무 당연한 용도 말고, 이렇게 조금씩 놀이로 비껴간 쓰임새는 처음 그것을 알려주거나 같이 해 본 사람들과 함께 엮여 기억이 난다. 게다가 그런 기억들이 꽃다발처럼 모여 묶이면 하나의 시절이 되더라. 


하얀 레이스 장식을 겹겹이 두른 듯 섬세하게 생긴 토끼풀꽃이 내 마음에 꼭 들었던 것 외에도, 꽃팔찌를 만들어주던 아빠의 표정 때문에 토끼풀꽃 추억이 더 깊게 오래오래 남았다. 아빠가 그저 시간을 때우기 위해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토끼풀꽃반지와 팔찌를 만들어 줬다면 기억은 추억이 되진 않았을 테다. 이걸 만들어주면 우리 딸이 정말 좋아하겠지-하고 아빠 나름의 신난 표정을 짓고 내게 뭔가를 만들어주던 게 보여서 그 순간이 참 포근하고 좋았다. 햇살처럼 쏟아지는 애정은 나를 키웠다. 토끼풀꽃줄기에 엮여 그 하얀 꽃송이와 하나가 되었다. 토끼풀꽃은 내가 유년기에 아빠로부터 받은 사랑과 돌봄의 한 가지 상징이다.    




2. 가능성이 지천에 피어있던 나를 


행운 하면 대개 네 잎 클로버를 떠올리게 되지만 사실 세 잎 클로버 역시 행운을 상징한다. 클로버의 탄생담은 그리스 신화에서 발견할 수 있다. 수많은 독초 사이에서 좋은 꿀이 있는 꽃을 찾기 힘들었던 꿀벌들이 제우스에게 좋은 꿀을 쉽게 찾을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을 올렸다. 제우스는 큰 붓에 흰 물감을 묻힌 뒤 어떤 꽃을 표시해 주었는데 그 꽃이 바로 클로버였다고. 상당히 귀여운 창조신화인데 꿀벌 입장에서 보면 제법 간곡하기도 하다. 그 클로버를 우리나라에서는 토끼들이 잘 먹는 풀이라 하여 토끼풀이라 부른 것이었고, 5월 햇살 머금고 피어나는 작고 흰 토끼풀꽃들은 지금도 종종 어린아이들의 손가락이나 손목, 머리 위를 장식한다. 


커보니 알겠다. 아빠의 그 신나 하는 표정은 ‘내 새끼에게 기쁨을, 편안함을 마련해 줄 때의 기쁨’ 때문이었다는 걸. 그래서 꽃반지와 팔찌를 만들어주며 그렇게 신나는 표정을 지었던 거라고. 


얼마 전 가족을 주제로 한 글을 한 편 쓸 일이 있었다. 아무래도, 가정의 달이니까. 5월에는 나를 포함해 가족 구성원 두 명의 생일이 있으므로 나는 좀 더 개인적인 의미에서의 가정의 달 5월에 대해 썼다. 덕분에 한 장면이 떠올랐다. 20대 중반 처음으로 자취방을 정했을 때, 자취방 근처에 뭐 할 게 많다며 좋아하던 아빠의 모습. 그때 그 표정을 떠올리며 새삼 깨달았다. 아빠는 여전하구나. 나는 많이 변한 것 같은데. 아빠의 희망을 먹고 자란 나는 그 희망을 어느 정도라도 채워줄 수 있는 인간이 되었을까? 준 만큼 돌려받기 위해, 못 다 이룬 것을 대신 이뤄달라 하기 위해 나를 키운 게 아님을 알지만 사람이 부모가 되면 치러야 하는 희생이 없을 수 없으므로 자식 입장에서의 미안함이나 면구스러움도 없지 않다.   



요즈음 친구와 만나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머리 부여잡고 고민한다. 지금은 자기 앞가림부터가 급해서, 내가 여유가 생긴 후에도 부모님이 오래오래 건강하게 곁에 계셔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도 어떤 애정은 지금 돌려드리고 싶다. 내가 받은 사랑인데 내게만 두지 않고 상대방에게 돌려주고 싶은 사랑들이 있다. 가령 토끼풀꽃팔찌 만들 때 아빠의 기분 좋은 미소 같은 것. 5월의 봄 빛 아래 토끼풀꽃 피어나면 매번 떠오르는 토끼풀꽃 추억 같은 것. 돌아오는 봄마다 꺼내보느라 빛바래기 전에, 지금이 딱 맞춤한 때인 듯하여 이 향수를 한 편의 글로 남겨본다. (과연 이 글의 링크를 가족 단톡방에 보낼 수 있는지의 문제가 남아 있지만) 색이 변하는 감각이 성립될 만큼의 물성을 비유적으로 갖고 있지만, 추억이 정말로 사물은 아니다. 덕분에 기억과 감정은 나눠도 반쪽이 되지 않으니 다행이다.


추억을 나누기 위해 내 안을 되살펴볼 때 파생되는 또 하나의 좋은 점은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서도 그때의 기억과 감정을 나누며 교류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저기서 피어나는 토끼풀꽃 마냥 가능성의 지천에 있던 어린 나를 본다. 지나간 시간만큼 이미 지워져 버린 가능성도 많지만, 변하지 않는 소중한 것들에서 다시 두 발로 서 있을 힘을 얻는다. 아닌 척해도 내가 여전히 사랑하는 것을 재발견하고 내가 받은 사랑을 떠올리며 자괴의 말로부터 떠나본다.  


내 안에는 사랑이 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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