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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서밀 Mar 16. 2024

자연스레 스며 공간을 채우던, 공허함의 탐구

아정한 노래, 정가

아트인사이트 문화초대로 참신하고도 퀄리티 높은 공연 작품을 여럿 보았지만 그중에 특히 나의 취향과 관심사를 강타하는 공연들이 있었다. 그런 공연을 만나고 나면 그날 열연을 펼친 배우들이 속한 극단의 이름, 극본을 쓰고 연출한 사람의 이름, 그리고 공연을 준비한 문화재단의 이름 등을 눈여겨보곤 했다. 혹여 그들이 만든 신작 소식이 올라온다면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국악인들의 작품 세계를 대중에게 전하는 데 열과 성을 기울이는 수림문화재단의 ‘수림뉴웨이브’ 공연 또한 나의 꾸준한 관심 목록 속에 있었다. 


작년 9월, 판소리 고수 이향하의 소품집 공연을 시작으로 수림문화재단의 축제인 ‘수림뉴웨이브’ 공연을 알게 되었다. 수림뉴웨이브 공연이 우리 음악의 축제를 표방하는 만큼 축제의 콘셉트와 그에 따른 공연자 선정 기준은 매 해 달라지는 모양이지만, 현재 활동 중인 국악인 여러 명의 작업을 소개하는 것이 계속 유지되는 축제의 취지인 듯 보인다. 작년에는 이향하를 비롯한 5인의 국악인 예술가가 5일에 걸쳐 각자의 작업 현황을 공연의 형태로 보여주었다. 올해의 축제인 ‘수림뉴웨이브 2024’는 총 20명의 국악인 아티스트를 주인공으로 진행된다. 정확히는 2월부터 10월까지 상반기 10명, 하반기 10명의 예술가가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관객에게 선보인다.  



2024년 수림뉴웨이브 축제의 주제어는 '독파(獨波)'이다.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구축하며, 홀로(獨) 자신만의 물결(波)로 '독파'해 나가는 스무 명의 예술가를 추천위원단과 수림문화재단이 고심하여 '수림뉴웨이브가 주목한 아티스트'로 선정했다. 전통음악계에서 튼튼한 '허리'가 되어 주고 있는 중견연주자 20인의 음악과 이야기를 소개하겠다는 취지이다. 신진 예술가 발굴을 위한 사업에 집중되고 있는 전통음악계의 경향과 다른 행보이다.

상반기 10명의 라인업은 다음과 같다. 이들은 전통음악의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예술가로 ▲김동근(퉁소, 대금, 소금), 김준영(거문고), 안정아(정가), 유홍(대금), 황민왕(타악), 공미연(민요), 박순아(가야금), 김슬지(아쟁), 오초롱(피리), 김주리(해금)이다. 2차 라인업은 하반기에 공개될 예정이다.


여기서 나는 3월 7일 저녁, 안정아 아티스트의 정가 공연 <빈집>을 감상했다. 안정아 아티스트는 애니메이션 주제곡을 부르고, 광고 음악에도 참여하는 싱어송라이터로, 국악계에서는 정가를 부르는 가객으로 활동 중이다. <빈집> 공연에서도 직접 곡을 쓰고 가사를 붙인 정가를 불렀다. '아정한 노래' 정가에는 ‘시조, 가곡, 가사’가 포함된다고 하는데, 이번 공연의 세트리스트에 실린 곡 제목을 보면 시조, 가곡, 가사가 한 곡 이상씩 고루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올해의 수림뉴웨이브 공연은 작년처럼 김희수아트센터에서 열리는데, 아트센터 내의 다양한 공간을 공연장소로 활용한다. 전형적인 공연 공간인 ‘SPACE1’과 전시 공간인 ‘아트갤러리’, 야외공간인 ‘옥상정원’ 등이 그것이다. 안정아 가객의 정가 공연은 ‘아트갤러리’에서 열렸다.   


                                        공연 후 관객과의 QnA 중인 안정아 가객 


수림뉴웨이브 공연의 간략한 아카이빙 전시를 지나면 그날의 공연 공간이 나왔다. 옹기종기 마련된 의자와 방석에 자유롭게 착석하고 아티스트가 등장하길 기다렸다. 퓨전 판소리 공연은 몇 번 관람한 적이 있지만 정가를 직접 들어보기는 처음이라 설렜다. 곧이어 치맛단이 밝은 연두색으로 마감된, 연분홍색 퓨전 한복 원피스를 입은 안정아 아티스트가 나타났다. 전시실의 나무 마룻바닥에 치마를 곱게 정리하고 앉은 그는 손박자와 목소리만을 활용하여 첫 번째 곡을 불렀다. 가사가 잘 들리지 않는 점이 낯설었는데, 공연 후 관객과의 간단한 QnA 시간에 안정아 가객의 설명을 듣자니 고전적인 정가는 가사와 가사를 붙여부르는 것이 특징이라 한다. 그래서 요즘의 음악 발성에 익숙해진 귀에 가사가 한번에 잘 들어오지 않던 것이었다. 


첫 두 곡은 가객의 목소리와 손박자로만 채워졌는데, 이 담백함과 섬세함은 ‘2024 수림뉴웨이브’의 주된 설정과 맞물려 더욱 관객의 집중력을 유도했다. 이번 축제인 ‘독파’의 공연들은 국악기의 자연적 소리를 살리기 위해 마이크와 스피커를 사용하지 않고 자연음향으로 진행된다. 소리의 강조와 약화는 오로지 공연을 이끌어가는 목소리와 손박자, 국악기 소리로만 이뤄졌다. 사람의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퍼질 수 있는 만큼만 공간에 스며들었다. 이는 상당히 예스럽고 편안한 경험이었는데, 객석과 무대의 단차도 없는 전시실 마룻바닥에서 이런 자연음향 진행을 듣고 있자니 자꾸만 옛사람들은 음악을 이렇게 들었겠지, 하는 상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몇 해 전 이날치 밴드의 공연을 스탠딩으로 나름 앞에서 관람했을 때, 밴드 멤버인 소리꾼 다섯 명이 마이크를 들고 소리를 했었다. 발군의 실력과 목청을 가진 소리꾼 다섯 명의 쩌렁쩌렁한 소리가 마이크와 스피커를 타고 증폭되는데, 농담이 아니고 정말 내 고막이 쿵쿵 진동하는 게 느껴졌다. 반면 가객 한 명의 성음에 간혹 양금과 가야금 연주가 더해지던 이번 공연에는 스피커를 통한 증폭이 없었다. 두 공연 다 색다른 멋과 재미가 있었다. 나는 간간이 눈을 감고 내가 밤의 정자에 앉아 정가와 가야금 연주를 듣고 있다고 생각해 보았다. 과거의 예술애호가들이 느끼던 현장감이란 이런 것이었을까? 아주 옛날에는 여기에 주변의 물 흐르는 소리, 풀벌레 우는 소리에 바람의 감촉까지 더해졌겠지? 일상 속에서는 쉽게 해 볼 수 없는 기분 좋은 상상이었고 나는 그 점이 왠지 모르게 흐뭇했다.         


공연의 초반에는 정가를 듣는 옛사람의 기분을 상상해 보는 재미가 톡톡했으나, 안정아 아티스트가 새로운 곡을 창작하고 부르는 현대의 가객이란 점 또한 간과할 수는 없다. 세트리스트의 뒤로 갈수록 안정아 가객이 준비한 정가는 점점 더 현대적인 색채를 띠었다. 발음법도, 가사의 문틀도 그러했다. <빈집>이라는 제목 답게 이번 공연의 정가들은 공허함을 탐구하고 노래한다. 


공허함. 인생무상과는 또 다르게, 공허함에 대한 탐구는 다분히 ‘현대인스러운’ 것이 아닌가 한다. 유례 없는 속도감으로 돌아가는 우리 사회에서 수많은 현대인들은 비어 있는 시간, 일과 일 사이의 ‘뜨는’ 시간, 시끌벅적한 만남 이후 혼자가 되는 시간 속에서 공허함을 느낀다. 여유나 고요가 될 수도 있었던 시간은 이미 소진된 마음으로 말미암아 완연한 공허가 되었다. 가슴 속부터 비어있는 그 느낌은 외려 사람의 몸을 무겁게 만든다. 비어있는데 무겁게 한다니! 어쩌면 속으로부터 허물어져갈까 사람을 두렵게 하는 그 헛헛한 가슴 위에 얹힌 어깨와 머리라서 무겁게 느껴지고마는 것일까? 


허한 마음에 대해서라면 나도 궁금한 게 많았다. 그것에 대해 글을 쓴 적도 있으니까. 공허함을 들여다본다는 공연 취지를 읽고나서, 나는 이 공연에서 얻어갈 모종의 답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키운 것이 사실이다. 안정아 가객은 공허함을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가. 그러나 처음 경청해 보는 정가, 과거와 현대의 미가 섞인 정가를 통해 그것을 파악해보기는 쉽지 않았다. 다만 이 공연 한 부분에서 공허에 대한 약간의 새로운 생각을 얻어갈 수 있었다. 


공연 중후반부에 나온 정가, ‘밤의 노래’에는 가야금 연주와 함께 수화 아티스트 지후트리의 협연이 있었다. 가사가 없는 연주 부분에서 지후트리의 손과 몸짓은 멈추는 게 아니라 더욱 바빠졌다. 비어있음에도 사실은 무언가 차 있음일 수도 있다는 듯이.


‘비어있음’이라는 감각의 연원은 어디인가. 불투명한 베일 한 장 걷으면 공허 뒤로는 잔뜩 시끄럽고 오래된 것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공허함을 공허감으로 생각한다면 결국 감정은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이니. 결국 모든 감정은 마음이 우리에게 할 말이 있어 생긴다는 한결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마지막으로, 공연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이는 다소 장난스럽게 들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공연 중에 분명히 든 느낌이므로 글에 남겨두고 싶다. 정가 공연은 처음이었고, 안정아 가객이 세상살이와 예술활동을 독파하며 만들어나간 그만의 물결은 더더욱 처음 접하는 것이었으나 정가의 음률에는 어딘지 익숙한 구석이 있었다. 한국인들이 물건을 찾을 때 무의식적으로 부르는 노래 겸 혼잣말이 있다. 나는 왠지 이번에 들은 정가들의 일부분에서 물건 찾는 이의 그 짧은 노래-혼잣말이 떠올랐다. 늘림과 꺾임. 뭔가를 찾는 것인데 이상하게 여유로운. ‘흥의 모양새’도 정말 유전자에 새겨져 있는 것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더랬다.  

 

공연 후, 관객들에게 인사하는 안정아 가객과 협연자들


이번 축제는 관객들이 한 명의 음악가를 고스란히 이해할 수 있도록 음악과 수다가 함께 하는 토크콘서트로 진행된다. 공연이 끝난 후 사회자의 안내에 따라 수림뉴웨이브 오픈카톡방에 들어가 아티스트에게 하고 싶은 질문을 익명으로 남길 수 있다. 이때의 QnA가 공연 이해에 새로운 힌트를 주기도 하니 질문을 망설이지 않고 남겨주셨으면 하는 마음이다. 


'수림뉴웨이브 2024 - 獨波(독파)'는 네이버예약에서 무료로 예약이 가능하다. 올해 십여 차례 남아 있는 목요일 저녁의 퀄리티 있는 공연을 즐겁게 감상해보시기를 권하는 바이다. 한 분야의 ‘허리’가 되는 중견예술가들의 공연을 일목요연하게 만날 수 있는 기회도 흔치 않은 것이라 생각한다. 시작과 발견됨 못지 않게 어려운 것, 혹은 더 고단한 것이 어떤 분야를 떠나지 않고 자기 스타일, 자기만의 흐름을 만들어나가는 일이 아닐까. 시간이 더 지나서 다시 이 글을 보게 된다면, 나도 ‘독파’의 예술가들처럼 내가 사랑하는 분야의 중견 예술가가 되어 있기를 소망해 본다. 내가 채워가고 경험해가는 지금이 영감과 양분이 되어주기를.  


여담으로, 나는 기회가 된다면 가야금 단독 공연을 들어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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