뽕밭에서 놀던 고라니가 내 인기척에 놀라 뛰기 시작했다. 뽕밭과 율무밭 그리고 언덕에 설치된 철조망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어 산으로 사라진다. 율무가 쓰러져 지나간 흔적은 남긴다. 오늘도 고라니가 먹지 않는 작물에도 피해를 준 것이다. 교미 시기에 수컷 고라니의 "꺼~억" 거리며 우는 울음소리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듣기 거북하다
고라니는 한국·중국 등 동북아시아에 분포되어 있는 사슴과로 소목 사슴과에 속하는 포유동물이다. 크기는 1m 안팎으로 황갈색을 띠고 있다.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에서는 분포수가 적어 멸종위기 등급 '취약 (Vulnerable)' 으로 지정되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개체수가 폭증하여 농작물 피해가 급증했고 결국 유해조수로 지정되었다.
농촌의 실정은 고라니와의 전쟁이다. 나도 고라니로 인한 물적 피해가 상당하다. 고라니는 뽕잎을 아주 좋아한다. 뽕나무밭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고라니망이 필수다. 동네 분들이 추천한 것은 전기울타리다. 전선과 말뚝을 구입하고, 인부를 동원하여 뽕나무밭에 전기 울타리를 설치하였다. 전기울타리는 한여름에 잘 관리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 된다. 칡넝쿨과 한삼 넝쿨이 울타리를 덮어씌우면 이를 제거하는데 어려움이 따르고, 풀은 전선과 접촉하여 전기 누전현상이 생긴다. 귀농 초기에는 직장을 다니고 있어 이를 관리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전기울타리를 유지할 수 없어 철망 울타리로 교체했다. 철망은 농장 입구로 이어지기 때문에 길 입구에 대문을 세워야 했다. 당초 대문 설치 전 이웃 농가와 상의를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불편한지 사이가 나빠졌다. 고라니를 못 들어오게 만든 철조망이 통행에 많은 불편을 주었기 때문이다. 어렵게 철조망을 쳤음에도 고라니는 어디서 어떻게 들어 왔는지, 뽕나무밭은 고라니 보금자리와 놀이터가 되어 버렸다.
도라지는 고라니가 먹지 않는다고 하여 도라지를 재배하였다. 이른 봄 도라지 싹은 고라니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고라니 피해가 적은 백하수오· 참당귀도 재배하였다. 내가 사는 지역이 약초재배단지가 아니다. 약초를 수확하면 충청북도 제천이나 강원도 진부로 싣고 나가야 판매할 수 있다. 수지가 맞지 않아 약초 농사는 접어야 했다.
고라니 지능도 대단해 보인다. 경작지에 고라니 망을 쳐 놓아도, 망을 뛰어넘는 것, 망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 망을 들추어내어 먹는 것, 개를 묶어 놓은 것을 인지하는 등 고라니의 농작물 탐닉은 신출귀몰하다.
유해조수가 농작물에 피해를 줄 경우, 유해조수포획단에 연락하여 멧돼지나 고라니를 포획하게 할 수 있다. 매번 연락하면 출동한다. 노루와 함께 있어 총을 쏠 수 없다거나, 뽕나무 속에 숨어 잡을 수 없다는 답변만 듣는다. 이들은 몇 방의 총을 쏘곤 돌아갔다. 제도는 있어도 도움 받은 적은 없는 것 같다.
귀농 10년 차가 지나면서 고라니와의 전쟁에서 공존하기로 마음먹었다. 고라니가 싫어하는 들깨나 율무를 재배하여 피해를 최소화하고 있다. 이제 막 피어오르는 뽕잎을 먹어 치울 때 가슴이 에이는 듯 아프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돌린다. 네놈들이 아무리 먹어도 올라오는 뽕잎을 당해 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안다. 뽕잎은 고라니와 누에가 함께 먹고 산다.
나는 젊은 시절 고향에서 어린 고라니를 생포 후 풀어준 적이 있다. 이 소식을 접한 시골에 계시는 형님이 크게 노하셨다. “그것들이 얼마나 큰 피해를 주는데 살려 줘!” 무안했던지 고라니를 살려주고 싶은 생각은 너와 내가 똑같은데, 입장이 다를 뿐이라고 다독거려 주었다.
농장을 오가며 보이는 고라니 로드킬 사고는 참혹하다. 고라니 피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번번이 자동차 사고로 이어진다. 나도 운전 중 고라니와 마주치면 깜짝깜짝 놀란 경우가 많았다.
우리나라에선 고라니가 야생 보호종이면서 유해조수로 이중적 잣대를 지니고 있다. 산림이 우거져있는 산속엔 고라니가 먹을 양식이 없다. 살기 위해서 가까운 농지를 찾을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고라니의 보호와 농작물의 피해는 양면의 동전이다. 고라니를 멸종위기에서 벗어나 이를 존속시키려는 마음은 동물 애호가나, 고라니 피해로 농작물을 폐농한 농부의 마음도 같으리라 본다.
이제는 일부 고라니 보호지역을 지정하여 보호할 때가 왔다고 본다. 보호지역 내 고라니는 철저히 보호하고, 보호지역 이외의 고라니는 유해조수로 박멸해 준다면 농부와 상생하리라 본다.
고라니로 인한 피해를 보지 않은 사람은 이 절규를 이해하지 못한다. 오늘도 바닷가에서 물고기 잡는 어망이 농촌 들녘에 쳐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