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과 열정사이

약속해 줄래? 피렌체의 두오모에 너와 오르고 싶어

by 붉은여우

‘어휴! 책을 왜 이리 많이 샀을까?’

방바닥에 쌓여있는 책들과 벽면 책장에 가득 채워진 책들을 바라보며 한숨이 절로 나온다. 벌써 일주일이 넘도록 책장 정리로 책과 씨름 중이다. 이사를 고려하던 터라 살림을 줄여야겠다는 생각에 오래된 물건들과 책들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책들을 도서관 여러 곳에 기증하려고 했지만, 사진으로 찍어 보낸 도서 목록을 보고는 받을 수 있는 책이 없다는 연락을 받았다. 계획이 틀어지면서 생각지도 않았던 책 분류라는 숙제를 떠안고 말았다. 중고 서점에 팔 수 있는 책, 버릴 책 그리고 남겨둘 책으로 구분하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오래된 교과서, 회사에서 읽었던 자기계발서, 경제 경영 관련 그리고 마케팅과 관련된 책을 우선 처리하기로 했다. 책 속에 활자로 찍혀있는 정보들은 이미 낡은 지식이 되었고, 현시점과 맞지 않는 것들이 많았기에 쉽게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래도 책장에 해부학 교과서는 하나쯤 남겨두고 싶었고, 병리학 교과서는 혹시 또 쓸 일이 있지 않을까 했고, 마케팅 관련 책은 다시 읽어 보고 싶어지고…. 이런저런 이유와 핑계들은 버리거나 팔지 못하는 책이 팔 수 있는 책보다 더 많이 남았다. 처음부터 다시 고민하고 재분류하는데 제법 시간이 흘렀다. 아쉬움과 미련을 버리는 일을 되풀이하다 보니 몸과 마음이 지쳤던 한주였다.

마지막으로 문학과 관련된 책들을 정리할 때는 분류가 조금 수월했다. 대하소설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대하소설 이외에는 서울시청 도서관에 소장하고 있거나, 전자책 서비스로 볼 수 있는 것들만 처분하기로 했다. 검색 기능을 통해 도서관에 있는 책인지를 알아보는 작업을 하다가 유독 눈길이 가는 책이 있었다. 오래전 사두었던 소설 두 권.

-냉정과 열정사이_Rosso

-냉정과 열정사이_Blu

냉열.jpg


이 책을 어떤 이유에 샀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애쿠니 가오리의 작품이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지만, 하나의 소설을 두 명의 작가가 함께 썼다는 것을(Rosso 는 애쿠니 가오리가, Blu 는 츠지 히토나리가 썼다) 신기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각자가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갈지 그리고 어떻게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갈지 궁금한 마음이 소설을 읽어보자고 부추겼을 것이다. 책을 구입하고 Rosso를 읽고 Blu를 읽을지, Blu를 읽고 Rosso를 읽을지 고민했던 일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하지만, 어떤 것을 먼저 선택했는지 기억은 없다. 그리고 이 소설 읽기를 멈추었던 이유도 생각나지 않는다. 아마도 먹고 사는 문제로 바빴겠지.


서울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어서 언제든 찾아 읽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중고 판매할 다른 책들의 무리에 두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신경이 쓰이고 눈길이 갔다. 헤어지기 아쉬운 연인들처럼,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어 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무언가 해주어야만 할 것 같았다. 망설인 끝에 판매 전에 읽어보기로 했다. 그러나 다시금 시작된 고민. 어느 것을 먼저 읽을까? Rosso…? Blu…? 책을 샀을 때 했던 고민이었지만, 시간이 한참 흘렀는데도 결정을 쉽게 하지 못했다. 막상 읽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어느 한 권을 읽고 난 뒤, 나머지 한 권을 읽을 거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여러 가지 궁리를 하다가 두 책을 동시에 읽는 방법을 선택했다. 짜장면이냐 짬뽕이냐를 고민하다가 짬짜면을 선택한 기분이랄까?


‘아가타 쥰세이는 나의 모든 것이었다. 그 눈동자도 그 목소리도, 불현듯 고독의 그림자가 어리는 그 웃음진 얼굴도, 만약 어딘가에서 쥰세이가 죽는다면, 나는 아마 알 수 있으리라, 아무리 먼 곳이라도, 두 번 다시 만나는 일이 없어도’


아오이의 독백에 이끌려 Rosso 1장을 먼저 읽고, 준세이의 이야기 Blu 1~2장을 읽는다. 다시 아오이의 Rosso 2~3장을 읽고, 준세이의 Blu 3~4장, 그리고 Rosso 4~5장 …이런 식으로 차근차근 두 사람의 이야기를 번갈아 가면서 읽는 방법이었다. 아오이의 감정을 읽으며, 동시에 다른 장소에 있는 준세이의 감정도 읽는다. 아오이가 추억을 회상할 때, 동시에 다른 장소의 준세이도 같은 추억을 회상하는 것처럼 읽혔다. 두 명의 작가가 썼지만 각 장의 사건들의 시간과 순서가 참 잘 맞아떨어졌다고 느꼈다. 짬짜면 식 책 읽기는 드라마의 컷이 바뀌는 것 처럼, 아오이와 준세이의 생각과 감정을 오가며 끊기지 않고 따라갈 수 있어서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이런 생각과는 별개로 몇 년 전 소설 읽기를 멈췄던 이유도 어렴풋이 기억나는 듯했다. 아오이를 읽으며 미치코(나의 아오이)를 떠올린 건 아니었을까? 영원히 만날 수 없다는 것과, 만나도 아무 소용없다는 이유로. 그러면서 이 소설 읽기를 멈추었던 건 아니었을까?


피렌체 두오모에 오르면 우연이라도 나의 아오이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럴 수만 있다면 피렌체 두오모에 갈 이유가 생겼다.

(2022년 05월)



2024년 9월 피렌체에 도착했다. 이탈리아에 처음 온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 출장으로 왔었다. 낮에는 회의 등 업무를 하고, 저녁에 교류를 위한 식사를 하다보니, 며칠을 머물러도 그 도시를 여행해 본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해당 도시를 방문해 봤다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20일 동안 여행만으로 돌아다니는 것이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와이너리를 들려, 와인을 배워보는 목적의 여행이었다. 와이너리를 방문하는 것도 처음이지만, 현지에서 직접 와인을 맛보고 본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흥분되고 기대되었다. 게다가 피렌체를 방문하는 일정도 포함되어 있었다.

피렌체.jpg

이탈리아 여행 7일차. 시에나에서 아침일찍 체크아웃을 하고, 피렌체까지는 한 시간 반을 자동차로 달려야 했다.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피렌체 대성당으로 향했다. 걸어서 20분이면 충분했다. 피렌체, 두오모 그리고 아오이. 피렌체의 아름다움에 홀리기도 전에 아오이를 떠올렸다. 언듯 언듯 두오모가 보이는 길을 걸으며 준세이의 말을 되뇌어 본다.


`아직도 아오이가 잊히지 않는다. 잊을 수 없는 여자가 있다고 해서 지금이 불행하다는 것은 아니다.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것도 아니다. …(중략)....물론 아오이와의 사랑을 회복하고 싶지도 않다. 아오이와는 영원히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예감도 들고, 실제로 만난다 해도 아무 소용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관광객이 많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았다. 성당의 입장도 줄을 오래 서서 기다려야 했고, 두오모를 오를 수 있는 입장권을 사는 줄도 너무 길었다. 예약이 없이 오르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두오모에는 오를 수 없었다. 어쩌면 이번에 오르지 않은 것이 더 좋은 것이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아오이는, 미치코는 없었을 테니까.

피렌체에 다시 가야 할 이유가 생겼다. 두오모에 가도 아오이는 만나지 못할 것이다. 아니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오이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핑계)만으로 이 도시를 계속 올 수 있다면 말이다.


약속해줄래?

피렌체의 두오모에, 너랑 오르고 싶어.

(2024년 11월 13일)

keyword
작가의 이전글A사 파란색 볼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