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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붉은여우 Oct 20. 2023

어느 배우가 만들어준 변화

 유달리 힘들었던 해였다. 직접 관리해야 하는 팀들이 너무 많이 늘었었다. 새롭게 시작한 사업들이 하나씩 내 담당으로 되어 갔다. 새 사업이 미처 안정되기 전에 또 다른 신사업이 맡겨졌다. 아무도 경험하지 않았던 사업이었던 만큼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다. 찾아서 공부하고 부딪혀 가며 경험해야 했다. 그러나 공부를 많이 한다고 사업이 단번에 익숙해지고 잘 운영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만큼 답답함도 커갔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로 산만함도 커갔다. 마음이 만들어 낸 병을 풀어보겠다고 여러 취미활동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나마 찾은 방법은 극장 같은 어둠 속에서 몇 시간 갇혀 있는 것이었다. 일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고 마음이 제일 편했다. 일종의 도피였다. 그해의 6월은 여름이 조금 일찍 와 있었고, 마음의 병은 깊어 있었다. 파란색 포스터가 시원하게 눈에 띄여 뮤지컬 ‘뜨거운 여름’이란 작품을 선택한 것은 우연이었다.


 ‘내게 전해줘 그대의 사랑을 마음속 깊이 느낄 수 있도록……’. 가수 최연제의 ‘너의 마음을 내게 준다면’이란 노래를 부르며 채경(여자주인공 이름)은 등장했다. 연극이 시작된 지 30분이 지나서였다. 단발머리에 교복을 입고 등장한 채경에게서 싱그러움이 느껴졌다. 노래를 부르는 채경을 바라보던 재희(남자주인공 이름)는 단번에 마음을 빼앗긴다. 나 역시 채경을 보는 순간 마음을 빼앗겼다. 오래오래 기억되고 있는 잊을 수 없는 배우 K와의 첫 만남이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설렘과 두근거림이었다. 여러 배우와 가수들을 좋아한다고 말하곤 했지만, 가슴이 뛴 적은 없었다.

 

공연이 끝난 뒤 배우 K의 이름을 찾아봤다. 인터넷을 검색해도 사진이나 정보가 많지 않았다.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는 볼 수 없는 배우였다. 작품이 마음에 들기도 했지만, 작품을 핑계 삼아 그녀를 보러 극장에 갔다. 그녀가 주는 설렘과 두근거림을 한 번이라도 더 느끼려면 극장으로 가야 했었다. 작품이 폐막할 때까지 3주간 주말마다 같은 작품을 봤다. 반복해서 동일한 작품을 본 것도 처음이었다. 열병(熱病)을 앓았던 뜨거운 여름이었다.


 그녀에 대한 관심은 공연이 끝난 뒤 쉽게 사그라들 줄 알았다. 하지만 열병은 식을 줄 몰랐고 그녀가 출연하는 작품을 찾아서 관람하게 되었다. 그녀 때문에 같은 작품을 여러 번 보는 일도 많아졌다. 그녀가 출연하는 작품들을 우선으로 선택해 관람하다 보니 작은 변화들이 생겼다. 우선, 관람할 작품을 선택할 때 해야 했던 고민이 많이 줄었다. 많은 작품 중에 어떤 것을 보아야 할지 선택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정보는 한정되어 있었다. 유명 작품이나, 재공연 되는 작품들은 관람평이 있어서 선택하기 쉬웠다. 고전이나 베스트셀러를 기반으로 한 작품들은 내용이라도 알고 있어서 도움이 됐다. 그러나 그 외의 작품들은 간단한 시놉시스만을 보고 선택해야 했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창작극에 대한 정보는 늘 부족했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많이 했다. 연극과 뮤지컬 모두에 출연하는 배우였다. 런던이나 파리 같은 도시를 배경으로 한 작품, 여러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 출연했다. 때로는 전장 속으로, 때로는 혁명 속으로 데려다주기도 했다. 미소년으로 출연하거나, 성별을 바꾸어 보는 실험적인 작품에도 출연했다. 창작극 출연이 많다 보니 관심 있게 보지 않았으면, 지나쳤을 흥미로운 작품들을 소개해 주었다. 내가 고민하지 않아도, 좋은 작품을 배우가 대신 선택해 주었다.


 같은 작품을 여러 번 보면서 생긴 변화도 있었다. 상대 배우가 바뀌어 연기하는 것을 보는 재미도 느꼈다. 같은 내용이지만 상대 배우에 따라 대사와 연기가 조금씩 달랐다. 작품 속 배역들을 연기하는 모든 배우를 볼 수도 있었다. 같은 배역이라도 각자 해석한 모습으로 연기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주로 그녀 위주로 여러 번 보지만, 그녀의 배역을 다른 배우가 연기하는 것을 보기 위해 한번 더 관람하는 것도 새롭게 생긴 변화였다. 공연을 진행하면서 초기의 무대장치나 소품 그리고 연기가 조금씩 변하거나 바뀐 것들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었다. 조금 어색하다고 느꼈던 것들이 공연 후반으로 가면서 더욱 완성되는 것을 느끼는 즐거움도 있었다.

 몇 년이 지난 뒤 그녀가 텔레비전 드라마에 출연했다. 갯마을을 배경으로 한 꽤 유명한 작품이었다. 주연은 아니었지만 제법 비중 있는 역할이었다. 텔레비전 화면 속에 처음 등장한 그녀를 보며 미소가 일었다. 내가 발견한 배우라는 생각, 나의 응원이 그녀의 성장에 작은 힘이 된 것 같고, 나도 함께 성장했다는 생각에 즐거워했다. 그 이후로도 차츰차츰 드라마나 영화에서 볼 수 있었다. 당장은 주연이 아니어도 계속 성장한다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은 가지지 못한 오래된 좋은 음반을 몇 장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녀의 초기 무대 작품과 모습을 나만이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더욱 즐겁게 해주었다.


 지금은 일에 대한 부담도 사라졌고, 극장이 마음의 피신처가 될 필요도 없어졌다. 이제는 즐거움을 찾아 공연을 본다. 다양한 작품들을 찾아 관람하지만, 그녀가 출연한 작품을 먼저 찾아 선택한다. 첫 만남 때의 싱그러움과 두근거림은 조금 줄어들었지만, 작품 속에서 새로운 배역의 그녀를 만나는 것이 기다려진다.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선택해 주어서 고맙다. 지금도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 자주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을 보고, 호흡을 들으며 무대에서 직접 만나는 것이 나는 좋다. 출연하는 새로운 작품이 없을지, 검색창에 그녀의 이름을 입력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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