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by 연두님

<이방인>

알베르 카뮈. 김화영 옮김. 민음사. 2017.

연두 서평.


연관이 있을까? 어린 시절 나의 집은 어두웠다. 고개를 숙이고 현관문을 들어가면 바로 부엌과 욕실을 겸하는 수도가 있는 작은 공간이 나온다. 그 옆에 단이 있고 신을 벗고 올라가면 한 칸짜리 방이 나온다. 그곳은 다섯 식구의 침실이자 거실 그리고 식당과 공부방 모두였다. 창이 있지만 잡동사니들로 가려진 어두운 그 집에서 우리 식구는 많이 웃지 않았다. 나는 낙천적이지 않았다. 자아를 성찰하기 시작한 이후 언제나 나는 존재의 의미와 생존의 이유를 찾고 있었다.


21살,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었다. 우선은 무언가 분명해졌다. 인간 사고의 한계와 죽음, 존재의 한정성에 동의했다. 나는 그것을 평등으로 이해했고 조금 위로받았다. 하지만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인간과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은 분리되어 있었고, 그 평행선에서 나는 절망했다. 모두 다 죽지만 의미는 없다, 인생이 허무하다고, 내 삶이 쓸데없다고 생각했다. 삶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인식했지만 그것이 삶에 대한 긍정으로 가 닿지는 못했다.


2006년, 책세상 출판사의 야심 찬 알베르 카뮈 전집 소식을 듣고 여러 권을 구입해서 다시 카뮈를 읽었다. 부조리한 세상에서 다시 부조리한 감정에 몰입되었다. 허무를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부조리한 감정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삶이 고통일 때, 어차피 죽는데 그래도 견디며 사는 게 맞는 걸까라는 의심을 내내 품는 것이었다. 나는 절망과 허무의 병이 탄로 날까 봐 더 밝은 척하곤 했다. 아, 어차피 죽을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지난주, 다시 <이방인>을 읽었다. 뫼르소가 낯설지가 않았다. 엄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도 있지.., 담배를 피울 수도 있지…, 다음날 정사를 가질 수도 있지…, 코미디영화를 보러 갈 수도 있지…, 옆집 사람이 편지를 써 달래서 도와줄 수도 있지…., 그 사람이 친구네 별장에 바람 쐬러 가자고 해서 갈 수도 있지…, 거기서 싸움이 날 수도 있지…, 옆집 사람이 흥분해서 실수할까 봐 총을 달라고 해서 자신의 주머니에 넣어 놓을 수도 있지…, 우연하고 갑작스러운 소란스러운 일에 피곤해져서 혼자 산책을 할 수도 있지…, 모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뫼르소에게는 삶의 태도가 되어버린 원칙이 있다. ’ 거짓말을 거부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거짓말뿐 아니라, “실제로 있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 “자신이 느끼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 “자신이 아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말수가 적다. 그 원칙을 지키려면 현재를 또렷이 의식해야 한다. 그는 감각으로 의식한다. 의식하므로 감정적이지 않다. 인과관계는 없다. 서사를 만들지 않는다. 그래서 과거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 타인에게는 무심하게 보이는 이유이다.


무심함은 다르게 보면 평온함이 된다. 그는 허무해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으며, 자아가 과잉되어 있지 않다. 엄마의 죽음이나 마리와의 사랑과 결혼에 대한 그의 행동들을 보면 그는 현재만을 의식한다. 과거를 생각해서 판단하지 않고 미래를 생각해서 기대하지도 않는다. 현재가 있고, 현재가 있고, 현재가 있을 뿐. 하루하루는 그 현재가 연속된 것이다.


그런 뫼르소가 사람을 죽였다. 누구를 죽이고 싶을 만큼 감정을 축적하지 않는 사람이 살인을 했다. “현실은 우연이라는 무질서의 연속”이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그 살인사건은 이런 연속성에서 발생했다. 완전히 설명할 수 없고 이해 불가능한 인간 삶의 부조리이다.


뜨거운 햇볕에 빰이 타는 듯했고 땀방울들이 눈썹 위에 고이는 것을 나는 느꼈다.(…) 머리가 아팠고, 이마의 모든 핏대가 한꺼번에 다 피부 밑에서 지끈거렸다, 그 햇볕의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여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나는 그것이 어리석은 짓이며, 한 걸음 몸을 옮겨 본댔자 태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 이 눈물과 소금의 장막에 가려서 나의 눈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이마 위에 울리는 태양의 심벌즈 소리와, 단도로부터 여전히 내 앞으로 뻗어 나오는 눈부신 빛의 칼날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 타는 듯한 칼날은 속눈썹을 쑤시고 아픈 두 눈을 파헤치는 것이었다. (…) 온 하늘이 활짝 열리며 비 오듯 불을 쏟아붓는 것만 같았다. 나는 온몸이 긴장해 손으로 권총을 힘 있게 그러쥐었다. 방아쇠가 당겨졌고, 권총자루의 매끈한 배가 만져졌다. -p69~70



뫼르소는 알제의 뜨거운 햇볕 때문에 총을 쏘았고, 그 총에 아랍인이 맞았고, 그 아랍인이 죽었다. 우연의 연속이다. 그리고 그것은 뫼르소에게 이런 것이었다.



나는 땀과 태양을 떨쳐 버렸다. -p70



이래서 죄를 짓게 되는 순간이 오게 되었다.


<이방인>의 1부는 이렇게 인간 삶의 부조리한 면을 부각한다.


2부는 이해가 불가능한 부조리한 인간에 대한 재판이다. 재판의 일반적 주장은 이렇다.


피고 뫼르소는 총 다섯 발을 쏘았다. 그 총에 맞은 사람은 죽었다. 그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엄마 장례식에서 슬퍼하지 않았다. 후회하는 빛도 없다. 뉘우침도 없다. 어머니를 정신적으로 죽였다. 따라서 피고 뫼르소는 악인이다. 사형을 구형한다.


인간은 이해할 수 없어도 재판할 수 있다. 보이는 것들을 연결시키고 비어있는 곳은 상상으로 채우면 된다. 상대가 침묵하면 일은 더 쉬워진다.


우리는 타인을 진정 알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알 수 없는 타인을 재판할 수 있는가? 없다.

그렇다면,

알 수 없는 타인을 혐오하는 것은 어떠한가? 모순적이다.


여기서 내가 눈여겨본 것은 사형 구형 이후의 뫼르소이다. 그는 두려움은 갖지만 절망하지 않는다. 처음엔 죽음을 피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궁리하지만, 언제든, 어떻게든, 누구든, 죽게 되어 있으므로 먼저 죽으나 나중에 죽으나 별 다를 게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분명하고 철저하게 죽음을 의식한다. 죽은 후에 사람들이 자신을 잊어버릴 거라는 사실도 편안히 이해한다. 신에게 의지하지 않고 구원도 거부한다. 삶도 자신이 책임져야 했듯 죽음도 자신의 몫이기 때문이다. 또렷하고 당당하게 죽음과 삶을 의식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진실이므로, 확신한다.



보기에는 맨 주먹 같을지 모르나,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나 자신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한 확신. 그보다 더한 확신이 있어. 나의 인생과, 닥쳐올 이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

-p133



그리고 그는 ‘이방인‘이 되었다. 이전에는 거짓말과 관습을 거부하는 이방인이었지만, 이제는 인간의 삶과 죽음을 낯설게 볼 줄 아는, 그래서 진실을 볼 수 있는 이방인이 되었다.


살아 있는 생물은 위험이 닥치면 본능적으로 저항한다. 저항은 인간이 삶을 또렷이 의식하려 할때 나오는 행위이다. 현재를 명철하게 의식하는 그 연속적인 저항 행위는 그가 뜨겁게 살아있다는 증거이다. 그 확신은 그를 거대한 이해로 이끈다.



내가 살아온 이 부조리한 전 생애 동안, 내 미래의 저 밑바닥으로부터 항시 한 줄기 어두운 바람이, 아직도 오지 않은 세월을 거슬러 내게로 불어 올라오고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더 실감 난달 것도 없는 세월 속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모두 다, 그 바람이 불고 지나가면서 서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었다. -p134



그러니 이런 삶과 저런 삶은 사실 차이가 없다. “모든 것은 허락되어 있다.” 그는 인간의 삶에서 해방되었다.



그토록 죽음이 가까운 시간 엄마는 거기서 해방감을 느꼈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마음이 내켰을 것임이 틀림없다. (…) 그리고 나도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 주고 희망을 가시게 해 주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그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렇게도 나와 닮아서 마침내는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p136



뫼르소처럼 나는 열정적으로 저항하는 인간이었지만 쉽게 절망했고 허무주의에 빠졌다. 죽음을 응시했지만 모든 것이 다 허용된다고 믿으며 살기엔 용기가 부족했다. 시간의 불연속성을 이해하고 현재를 의식하고자 노력했지만 타인을 공감하기 위해 서사를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많은 소설들이 만들어준 낭만을 몹시 사랑하고 그리워했다. 집요하지 못해 내 삶에선 충분히 자유로워질 수 없었지만, 뫼르소가 이상하지 않을 만큼은 자유로워졌다. 그리고 나의 삶과 죽음이 내 몫이며 내 책임하에 있다고 믿고 있다.


불편한 책 <이방인>을 친근하게 읽었다. 나는 점점 이방인이 되고 있다. 책장 한 칸을 가득 채운 알베르 카뮈, 사르트르, 니체의 책들을 오랜만에 매만지며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준 것에 감사했다. 그들 덕분에 나의 세상을 똑똑히 의식하려 노력했다. 그들 덕분에 외로움이 고독이 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내 존재의 의미를 찾으며 쓸모가 없으면 절망하는 지독한 고질병은 고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지금도 무언가를 찾고 있다.

만약,

내일 죽는다면 지금 감각으로 만나는 모든 것들을 의식하며 충분히 느끼려 할 것이다. 의식하지 못하고 놓치는 게 있을까 봐 매 순간 저항할 것이다. 결국 미래의 어느 날에는 죽음이 내일 오게 되어있으니 오늘의 내일이 죽음의 날이라 상상하면? ....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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