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별하지 않는다>
문학동네. 2021.
연두 서평.
가끔 한 개의 단어가 혼돈의 사유세계를 마법처럼 정리해 줄 때가 있다. ‘불편함’이 그랬었고, 요즘은 ‘모호함‘이 그렇다. 세상은 모호하다, 삶은 모호하다는 진실. 모호한 세상을 말로 표현하면 항상 부족할 수밖에 없다는 진실. 그래서 모호함을 또 다른 모호함으로 표현하면 더 이해가 쉽다는 사실. 나는 그림, 음악, 무용, 연극처럼 직관적으로 세상을 느끼게 하는 예술의 방식으로 모호한 세상과 인간을 이해하는 걸 좋아한다는 사실.
세상에는 언어로 분명하게 말할 수 있거나 말해야만 하는 것이 있고, 반면에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모호한 것들이 있다. 그렇다면 ‘5.18 민주 항쟁‘ 이나 ‘제주 4.3 항쟁’과 그때 영혼이 부서져버린 사람들의 무언의 이야기, 그것은 문학에서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까?
말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래와 같은 것이다.
그 겨울 삼만 명의 사람들이 이 섬에서 살해되고, 이듬해 여름 육지에서 이십만 명이 살해된 건 우연의 연속이 아니야. 이 섬에 사는 삼십만 명을 다 죽여서라도 공산화를 막으라는 미군정의 명령이 있었고, 그걸 실현할 의지와 원한이 장전된 이북 출신 극우 청년단원들이 이 주간의 훈련을 마친 뒤 경찰복과 군복을 입고 섬으로 들어왔고, 해안이 봉쇄되었고, 언론이 통제되었고, 갓난아기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광기가 허락되었고 오히려 포상되었고, 그렇게 죽은 열 살 미만 아이들이 천오백 명이었고, 그 전례에 피가 마르기 전에 전쟁이 터졌고, 이 섬에서 했던 그대로 모든 도시와 마을에서 추려낸 이십만 명이 트럭으로 운반되었고, 수용되고 총살 돼 암매장되었고, 누구도 유해를 수습하는 게 허락되지 않았어. -p317
그리고 타인에게는 모호하고 불투명한 무언의 이야기는 저 시대를 몸으로 겪어 낸 인선의 엄마 정심과 인선의 아버지의 영혼이다. 부서지고 으깨져버린 영혼의 이야기를 문학으로 만든다는 것은 모호함을 언어화 해야만 하는 일이다. 말로 꺼내면 자칫 아무것도 아닌 남의 고통이 되어 흩어지고 날아갈 수 있는 인간 심연의 것들을 섬세히 다뤄야 하는 일이다.
그렇게 비로소, 기록된 역사와 모호하고 특수한 인간의 고통을 엮어 미학적으로 완성시킨 작품이 <작별하지 않는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고통은 아주 사적인 것이다. 그리고 고통은 우리 스스로를 다른 것으로 변형시킬 만큼 강력하다. 그래서 한강 작가는 거의 모든 소설에 폭력과 무해한 인간들의 고통을 등장시키는 것이 아닐까? 폭력의 보편성을 보여주기 위해 개인의 특수한 고통을 따갑게 느끼게 해주는 것, 그것이 작가로서 이 시대에 대한 책무라고 여기는 것 아닐까? 잔혹한 폭력이 부정할 수 없는 세상의 진실인 것처럼,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도 세상의 진실이기에 작가는 내내 질문해 왔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
이 책은 현재를 사는 경하와 동갑내기 친구 인선이 망자가 된 인선의 엄마 정심과 인선의 아버지의 고통을 쫓아 깊이 낙하하며 그들 혼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울며 혼을 달래는 진혼(鎭魂) 이야기이다.
매일 유서를 쓰며 작별을 준비하던 경하와 엄마 정심을 간호하며 죽고 싶었던 인선은 죽은 자들을 만나며 그들의 고통에 고통을 느끼면서 결국 살아난다. 죽은 그들을 살리고 싶기 때문에 살게 되고, 그들의 고통이 나에게 이어졌기 때문에 살게 된다. 염원은 살아있는 자의 역할이므로 살아야 한다. 작가가 노벨문학상 소감에서 밝힌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하는 것”과 “과거가 현재를 구하는 것”은 이렇게 죽은자와 과거의 고통이 살아있는 육체를 통과해서 영혼으로 연결될 때 가능해진다.
목작업을 하다 검지와 중지가 절단되어 치료하는 인선의 이야기를 보면 작가가 고통에 대하여 어떤 의미와 의도를 갖고 있는지 더 확실해진다. 삼 분에 한 번씩 바늘을 찔러 새로운 피를 흘려야지만, “저렇게 끔찍한 고통을 계속 일으켜야만 신경의 실이 이어“진다. 신경을 잇지 않고 모양만 멀쩡하게 상처만 봉합하는 것, 그것은 영원히 회복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며 평생 환지통에 시달리게 할 수도 있다. 어찌 보면 당장은 끔찍한 고통을 지속하는 것 같지만 그것이 결국은 삶을 온전히 감각하며 살게 만드는 것이다.
고통 없이는 신경의 실은 이어지지 않는다. 깨어있으려면 고통을 직시해야 한다. 인간과 인간이 연결되기 위해서, 그리고 그 실이 끊어지지 않기 위해서, 반드시 고통이 필요하다. 망자의 혼과 등장인물의 혼과 독자의 혼을 고통의 실로 잇는 것, 이것이 모호한 세상을 독자에게 이해시키는 한강 작가의 첫 번째 방법이다.
고통을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 고통, ”그 아래 깊은 겹은 사랑“ 이니까.
2021년 이 책을 읽었을 때, 나는 한강 작가가 <작별하지 않는다>를 쓰면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탈고 후에 앓아누웠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것은 작가가 진혼굿을 주관하는 무당의 역할을 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꿈인지 모호하지만, 그 모호함이 오히려 망자의 영혼들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읽다 보면 그것이 실재이건 망상이건 중요하지 않게 된다. 폭력으로 영혼이 부서졌다는 것만 남겨지니까.
망자의 혼들을 등장시켜 이성너머 영혼의 만남을 추구하는 것, 이것이 모호한 세상을 독자에게 이해시키기 위한 작가의 두 번째 방법이었다고 생각한다. 하늘에서 천천히 내리는 눈과 “파르스름한 심장 같은 촛불”은 혼의 이야기를 잘 듣기 위한 무대 장치이다. 고요와 집중, 가벼움과 흔들림, 그리고 씨앗과 같은 심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눈과 촛불은 망자의 혼들을 비호한다.
그 아이들.
절멸을 위해 죽인 아이들.
그 아이들을 생각하다 집을 나선 밤이었어. 태풍이 올 리 없는 10월이었는데 돌풍이 숲을 지나가고 있었어. 달을 삼켰다 뱉으며 구름들이 달리고, 별들이 쏟아질 듯 무더기로 빛나고, 모든 나무들이 뽑힐 듯 몸부림쳤어. 가지들이 불같이 일어서 날리고, 점퍼 속으로 풍선처럼 부푸는 바람이 거의 내 몸을 들어 올리려고 했어. 한 발씩 힘껏 땅을 디디고 그 바람을 가르며 걷던 한순간 생각했어. 그들이 왔구나.
무섭지 않았어. 아니,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행복했어. 고통인지 황홀인지 모를 이상한 격정 속에서 그 차가운 바람을, 바람의 몸을 입은 사람들을 가르며 걸었어. 수천 개 투명한 바늘이 온몸에 꽂힌 것처럼, 그걸 타고 수혈처럼 생명이 흘러들어오는 걸 느끼면서. -p318
이제는 그게 이상한 이야기라고 생각되지 않아. 인선이 말했다.
아버지가 십오 년 동안 형무소에도 있고 저 건너에도 있었던 것이.
책상 밑에서 내가 무릎을 구부리는 동시에 활주로 아래 구덩이 속에도 있었던 게.
네가 꾼 꿈을 생각하고 생각하면 캄캄한 어항 속 지느러미처럼 어른거리던 그림자가. -p322
고통을 느끼는 것은 보고 있다는 것이고, 본다는 것은 피사체를 비로소 존재하게 만드는 것이다. 작가는 그래서 고통을 쓰고 우리는 고통을 본다. 잊어서는 안 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통을 체험한다. 그 존재들을 사랑한다.
파문처럼 환하게 몸 전체로 번지는 온기 속에서 꿈꾸듯 다시 생각한다. 물뿐 아니라 바람과 해류도 순환하지 않나. 이 섬뿐 아니라 오래전 먼 곳에서 내렸던 눈송이들도 저 구름 속에서 다시 응결할 수 있지 않나. 다섯 살을, 내가 K시에서 첫눈을 향해 손을 내밀고 서른 살의 내가 서울의 천변을 자전거로 달리며 소낙비에 젖었을 때, 칠십 년 전 이 섬의 학교 운동장에서 수백 명의 아이들과 여자들과 노인들의, 얼굴이 눈이 덮여 알아볼 수 없게 되었을 때, 암탉과 병아리들이 날개를 퍼덕이는 닭장에 흙탕물이 무섭게 차오르고 반들거리는 황동 펌프에 빗줄기가 튕겨져 나왔을 때, 그 물방울들과 부스러지는 결정들과 피 어린 살얼음들이 같은 것이 아니었다는 법이, 지금 내 몸에 떨어지는 눈이 그것들이 아니란 법이 없다. -p135
작가의 공책에 쓰여 있던 “전 세계를 잇는 물과 바람의 순환“으로 인간들의 눈물과 땀과 피는 연결될 수 있다. 이곳의 물과 바람이 저곳의 물과 바람이 아닐 수 없고, 과거의 물과 바람이 미래의 물과 바람이 아닐 수 없다. 소멸과 탄생은 없고 순환과 변형과 변신만이 있을 뿐이다. 형태를 잃는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만 없다면 이토록 평범한 소멸과 탄생일뿐이다.
역사안에서 살았던 모든 인간은 모양만 바뀌었을 뿐 항상 함께 존재하고 있다.
엄마가 쪼그려 앉길래 나도 옆에 따라 앉았어. 내 기척에 엄마가 돌아보고는 가만히 웃으며 내 뺨을 손바닥으로 쓸었어. 뒷머리도, 어깨도, 등도 이어서 쓰다듬었어.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p311
이것은 인선이 엄마 정심을 기억하는 고통, 그리고 사랑이다.
처음에 엄마는 빨간 헝겊 더미가 떨어져 있는 줄 알았대. 피에 젖은 윗옷 속을 이모가 더듬어 배에 난 총알구멍을 찾아냈대. 빳빳하게 피로 뭉쳐진 머리카락이 얼굴에 달라붙은 걸 엄마가 떼어내 보니 턱 아래쪽에도 구멍이 있었대. (…) 팥죽에 담근 것같이 피에 젖은 한 덩어리가 되어서 세 자매가 집에 들어서니까 놀란 어른들이 입을 열지 못했대. (…) 동생이 앓는 소리 없이 숨만 쉬고 있는데, 바로 곁에 누워서 엄마는 자기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냈대. 피를 많이 흘렸으니까 그걸 마셔야 동생이 살 거란 생각에. 얼마 전 앞니가 빠지고 새 이가 조금 돋은 자리에 꼭 맞게 집게손가락이 들어갔대. 그 속으로 피가 흘러들어 가는 게 좋았대. 한순간 동생이 아기처럼 손가락을 빨았는데, 숨을 못 쉴 만큼 행복했대. -p250~251
그리고 이것은 정심이 막냇동생을 기억하는 고통, 그리고 사랑이다.
한강 작가는 인선의 엄마 정심에 대하여 ”애도를 종결하지 않은 사람. 고통을 품고 망각에 맞서는 사람. 작별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작가는 묻는다. “얼마나 사랑해야 우리는 끝내 인간으로 남는 것인가?”라고.
고통을 품고 망각에 맞서는 것은 신경을 잇기 위해 지속적으로 신경에 바늘을 찔러 넣는 것과 똑같은 고통이다. 애도를 종결하지 않고, 작별하지 않는 것은 ”지극한 사랑“이다. 그리고 이 또한 고통이다.
”얼마나 사랑해야 우리는 끝내 인간으로 남는 것인가? “는 ‘얼마나 고통을 품고 망각에 맞서야 우리는 인간일 수 있는가?‘로 바꿔 질문할 수 있다. 작가는 그래서 모든 소설에서 폭력과 고통을 깊이 느낄 수 있게 만들고, 모호한 인간사를 보여주기 위해 혼들이 말하게 하며, 그 혼들을 위해 촛불을 밝히고, “흰 천 같은 눈이 그들을 덮어 “ 주길 기도한다.
고통만큼 사랑할 수 있기에.
품은 고통만큼 인간일 수 있기에.
책 <작별하지 않는다>는 아름답고 고통스러운 애도이며 진혼이다. 불투명한 인간 존재를 투명히 드러나게 하려는 노력이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그 말은, 작별하지 않겠다는 사랑고백이며, 그리고 함께 살아있겠다는 나직한 맹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