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로>

by 연두님

<등대로>

버지니아 울프. 이미애 옮김. 민음사. 2020.

연두 서평.


1.


나에게도 불리는 단어들이 여러 개 있다. 엄마, 누나, 언니, 고모, 이모, 선생님 등등. 그것이 역할에 주어지는 호칭이라서 일까? 마흔이 넘은 어느 때부터는 “연두야! “하고 불려지면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으며 살짝 설레곤 했다. 아! 맞아! 나는 연두였지! 나에게는 나만의 ‘나’와 남에게 보이는 ‘나’, 이렇게 이중의 내가 있다.


버지니아 울프(1882-1941)가 살았던 시대보다 100여 년이 지났다. 이제는 여자도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고 사회에서 지위를 갖는 일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여자의 삶은 아직도 ‘여자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라는 묵은 관습으로부터 사회적으로도 또 스스로도 영향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좋은 여성은 감정 조절을 잘해야 하고 순종적이고 조용한 태도를 지녀야 한다. 어머니, 아내 역할을 잘 수행해서 모든 식구를 보호하고, 얘기를 잘 들어주고 공감해줘야 하며, 가정에 헌신적이어야 한다.


이것은 100년 전 버지니아 울프 시대의 여성관이다. 그런데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이런 연유로 <등대로>는 가부장적 사회에 살고 있는 여성이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내면의 이야기로도 읽힌다. 그러나 그보다 더, 모든 이들이 일상에서 상실과 소멸을 극복하려 자기의 중심을 찾아가는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2.


이 책은 다양한 면에서 이야기 될 수 있지만, 나는 버지니아 울프의 ’의식의 흐름‘ 기법과 이 책의 등장인물의 ‘상실과 소멸에 대한 의식의 구도‘를 중심으로 글을 써보려 한다.


우선, <등대로>에 두 개의 질문을 던져 본다.


하나는 버지니아 울프가 11년간 중요한 사람 4명의 죽음을 겪으면서 그녀를 지배했을 법한 ‘인간은 유한한데 어떻게 영원성을 가질 수 있을까?’이다.


두 번째는 그녀의 소설은 사건의 서사는 거의 없이 개인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의식의 흐름’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였다.


그런데 이 두 가지의 질문의 답을 찾아가다 보니 그것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로 이어지고 있었다.


3.


13살 어린 나이에 경험한 어머니의 상실 때문일까? 이 책 <등대로>에는 지독하게 램지 부인을 그리워하는 마음들이 담겨있다. 그것이 버지니아 울프 개인의 것인 듯하여 때때로 먹먹해지기까지 하는데, 그럼에도 이 책의 의미는 애도에 있지 않다.


모든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의식의 흐름’을 가지고 있다. ‘의식의 흐름’은 주도성을 갖고 생각을 하며 어떤 지향성을 갖는 가는 점에서 잡념과는 구별된다. 울프는 그중에서도 자신의 어머니를 투영시킨 램지 부인과 자신을 반영한 릴리의 의식을 특별히 들여다본다.


램지 부인은 아름답고 헌신적이며 모두를 살피고 돌보지만, 내면은 고독을 즐기며 독립을 갈망한다.

그런 그녀의 마음의 소리들을 따라가다 보면 나의 소란스러운 마음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버지니아 울프가 <등대로>에서 보여주는 ‘의식의 흐름’ 은 실은 모든 사람의 내면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등대로>는 특이하게도 사건에 대한 서사가 거의 없다. 오히려 인물들의 사유에서 서사가 읽혀지는데,


현실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건 후 인간의 의식 속에서 비로소 의미가 생기기 때문이다. 책에는 모든 등장인물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램지 부인의 죽음조차 한 문장으로 간단히 쓰여있다.


일상은 뒤죽박죽이고 인간의 의식은 비논리적 이지만, 의식을 들여다보면 그 흐름에는 개인마다 지향하는 바가 있다. 버지니아 울프는 이것에 집중했는데, ‘의식의 흐름’이란 인간이 본질과 진실을 인식하려는 시도이고 그 과정이므로 지향성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그 지향하는 것이 바로 그 사람이 가치를 두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식의 흐름’은 삶의 의미를 구하는 과정과 일치한다.


<등대로>에서 보자면,

램지 부인의 의식은 현재의 순간에서 아름다움을 포착하려는 시도로 가득하며, 그 지향점은 삶의 무상함을 초월해서 영원성을 얻는 것이다.


릴리의 의식은 예술가로서의 정체성과 예술적 진실을 향하고 있으며, 그녀 또한 궁극적으로는 소멸을 넘어 영원성을 얻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


‘의식의 흐름’은 이처럼 현재를 극복하려는 시도이고 무언가를 지향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정체성도 만들어진다. 정체성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의식과 감정의 파장 속에서 중첩되어 형성된다는 것을 울프는 소설에서 보여주고 있다.


<등대로>에서 ‘의식의 흐름’ 기법은 단지 인물의 생각을 따라가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인간 모두의 내면은 그러하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타인의 의식의 복잡성을 이해하게 하는 깊은 윤리적 시도이다.


4.


그렇다면 인간은 의식으로 어떻게 영속성을 가질 수 있을까? 죽고 소멸하는 인간에게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삶의 의미가 무엇일까? 그 물음이 전부였다. 이 단순한 물음이 세월이 흘러가면서 밀려들곤 했었다. 위대한 계시가 밝혀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마도 위대한 계시가 찾아오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대신에 사소한 일상의 기적이나 등불, 어둠 속에서 뜻밖에 켜진 성냥불이 있을 뿐이었다. 이것이 그 한 가지였다. 이것, 저것, 그리고 다른 것. 그녀와 찰스 탠슬리 그리고 부서지는 파도. 그들을 화해시킨 램지 부인. “삶은 여기에 정지해 있다.”라고 말한 램지 부인. 그 순간을 영원한 것으로 만든 램지 부인. 이것이 계시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혼돈의 와중에 형상이 있었다. 외적인 변천과 흐름이 영속성 안에 고정되었다. 삶은 여기에 정지해 있다고 램지 부인이 말했다. -p232



영속성, 그것은 현재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지금 깨어 있는 것이다. 현재의 모든 것과 연결되어 살아있는 강력한 느낌이다.


1부의 저녁 식사 장면에서도 램지 부인은 모든 것이 연결되었다는 일체감을 느끼는데 그 순간에 영속성의 환희를 체험한다. 사유와 직관을 통해서이다.


그리고 릴리는 죽은 램지 부인을 다시 그림으로 그리면서 영속성을 지향한다. 그림의 그리며 자신과 부인을 통합하게 된다.



어쩌면 실제의 이 그림이 아니라 이 그림이 시도했던 것에 대해서, 그것이 “영원히 남았다.”라고 말할 수 있을 거야. -p255



램지 부인은 죽었지만 예술은 그 존재를 영원히 지속시킬 수 있다. ’ 의식의 흐름’을 감각으로 표현하는 것이 그림이 되는 과정이다. 예술은 ‘의식의 흐름’으로 예술가와 세상을 합일하여 영속성을 만들어낸다.



그녀는 캔버스를 보았다. 흐릿했다. 갑자기 강렬하게, 마치 찰나의 순간 그것이 선명히 보인 듯이, 그녀는 그 한가운데 선을 하나 그었다. 완성했어. 끝났어. 그래, 그녀는 극도의 피로감이 밀려오는 가운데 붓을 내려놓으며 생각했다. 이제 그것을 보았어. (I have had my vision) -p296



그녀는 확신한다.

애도는 종결되었고 영원함은 존재한다. 예술은 덧없는 삶 속에서 영원한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모두는 ‘의식의 흐름‘을 갖고 산다. 그것이 설사 영속성의 경험으로 이어지지 않을지라도 이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이로써 그 시절에 여자도 충분히 중심적인 자아를 가진 독립적 존재일 수 있다. 타인의 침묵에 자의적인 서사를 부여하지 말라.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윤리적 시도이다.


삶의 의미는 인간이 자기 자신의 상실과 자기 자신의 소멸을 극복하기위해 자기 자신의 사유의 흐름을 갖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유가 어려워지는 요즘, 다시 사람의 중심이 사유임을 생각한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지니아 울프는 사실 삶의 무상함을 극복하지 못한 건 아니었을까? 눈을 감으면 코트 주머니에 돌을 가득 채우고 물로 들어가는 이 생에서 그녀의 마지막이 보인다.


영원함으로도 구원할 수는 없는 것이 우리의 삶에는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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