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송은경 옮김. 민음사. 2018.
연두 서평.
여행이란 ‘돈을 내고 시간을 사는 것’이라는 어느 여행작가의 글을 읽고 맞아! 하며 미소를 지은 적이 있다. 평소에는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그날이 그날인 듯 살지만 여행에서는 그렇지 않다. 시간이 살아서 팽창되는 그 특별함은 여행하는 현재와 내가 붙잡고 있는 과거를 교차시킨다. 살아 있는 것들을 담으며 헛된 것들은 버려지고 추려진다. 그래서 여행의 끝에 희망을 그리게 되는지도 모른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은 영국 저택의 집사로 38년을 살아온 스티븐스 씨가 6일간 여행을 하며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는 소설이다. 함께 일했던 켄턴 양을 만나러 가는 여정은 켄턴 양을 기억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평생 충성해 온 달링턴씨를 회상하게 한다. 1차, 2차 세계 대전을 거치고 그 후 변화된 사회를 살고 있는 그에게 그것은, 자신의 생의 의미는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자기 성찰로 이어진다.
그의 세계관은 이러했다.
그 당시 우리에게 세상은 이 저명한 저택들을 중심축으로 돌아가는 하나의 바퀴였으며, 거기에서 내려진 막강한 결정들이 부자이든 가난뱅이든 바깥 주위를 돌고 있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로 퍼져 나간다고 생각했다. 우리 중 직업적 야망을 품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각자 힘닿는 대로 이 중심축에 다가가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좀 전에도 말했듯, 단순히 자신의 능력을 얼마나 잘 발휘하느냐의 문제뿐 아니라 ‘어떤 목적을 위해’ 그렇게 하느냐의 문제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상주의적 세대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작게나마 기여하고 싶다는 소망을 가슴에 품고 있었으며, 직업인으로서 그 소망을 실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문명을 떠맡고 있는 우리 시대의 위대한 신사를 섬기는 것이라고 보았다. -p148
이렇게 살아온 주인공 스티븐스 씨는 사적인 실존을 위해 자신이 몸 담은 “전문가적 실존”을 포기하지 않는 ”품위“를 갖춘 ”위대한 집사“이다. 그는 철저히 공적인 인간이다.
이런 삶에는 자신의 소신이란 없다. 충성심만 있을 뿐이다. 그는 모시는 주인의 동기나 견해를 분석하고 검토하는 것은 ”품위“있는 ”위대한 “ 집사의 행동은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모셨던 달링턴 경은 히틀러에 동조했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주인의 “도덕적 진가”가 집사의 직업적 권위를 결정하는데, 이 경우에 그의 생은 무엇이 되는 것인가?
달링턴 경의 노력이 잘못되었을 뿐 아니라 어리석기까지 했음을 세월이 입증해 주었다고 해서, 어떤 면으로든 어떻게 내가 비난받아야 한단 말인가? 내가 그분을 모셔 온 세월을 통틀어, 증거를 저울질하고 나아갈 길을 판단한 것은 그분 자신이었으며, 나는 다만 나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지극히 온당하게 움직였을 뿐이다. 그리고 가히 ‘일 등급‘이라 인정받을 만한 수준에서 내 능력 닿는 데까지 직무를 수행한 것밖에는 없다. 오늘날 나리의 삶과 업적이 안쓰러운 헛수고쯤으로 여겨진다 해도 내 탓이라고는 할 수 없다, 나에게도 응분의 가책이나 수치를 느끼라고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p252
정말 그럴까? 바퀴가 되어 바퀴의 중심이 최대한의 발휘를 할 수 있게 최선을 다해 기여했다면, 그런데 그 바퀴가 굴러 많은 이들을 치고 상해를 입혔다면, 그건 우연히 운이 나쁜 것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설사 악한 동기가 없었더라도 타인의 삶과 생명에 영향을 주었다면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닌가?
주인공 스티븐스 씨는 충성스러운 삶에 긍지와 만족을 느낀다고 말하지만, “위대한 신사들의 손에 운명을 맡긴”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 여행 내내 생각하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갈등하고 변화한다. 여행은 과거에 믿고 살았던 가치들을 2차 세계대전 후의 달라진 세상과 충돌시키고 변모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우리도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고자 한다. 그 길이 무엇을 향하는 것인지 매번 생각하고 질문하기에는 하루하루가 피곤하다. 내가 좋은 것에 일조하고 있다는 착각과 위선이 우리를 버티게 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누군가를 해치지 않고 살고 싶다는 도덕적 소망, 이것은 우물 안 개구리의 소망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생각하지 않는다면, 질문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살게 될 것이다.
스티븐스 씨의 6일간의 여행은 일과 사랑과 가족뿐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지를 돌아보는 회고의 시간이며 깊은 이해로 나아가는 사유의 시간이었다. 그는 여행을 마무리하며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고 기다린다는 저녁의 시간에 자신의 ‘남아 있는 나날’들을 기대한다.
나는 지금 한데 어우러져 즐겁게 웃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 사람들이 모여 이렇게 금방 이토록 따뜻한 분위기를 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어떻게 보면 이 사람들은 그저 다가올 저녁에 대한 기대로 엮여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내가 볼 때는 저렇게 스스럼없이 농담을 주고받을 수 있는 기술이 더 크게 작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 -p301
모시던 달링턴 경에게 모든 것을 내어 주었던 스티븐스는 약자일 수밖에 없다. 그는 켄턴 양을 사랑했고 그녀 또한 자신을 사랑했다는 것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공적인 생활에 충실하기 위해 사적인 감정을 억눌렀던 그의 삶은 켄턴 양과의 재회 장면에서 더욱 안타깝게 다가온다. 그 장면은 우리 모두의 저무는 삶을 떠오르게 해서 슬프다.
현재는 과거의 그림자다. 그것은 활활 타올랐던 장작의 재와 같다. 이 글은 그 재의 생의 이야기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녁을 기다리는 것은 낮의 고달픔을 끝내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 저녁에 우리는 서로에게 스며들고 스며 나온다. 그러면서 기울고 저무는 것들과 조응하고 편안해진다.
그의 ‘남아있는 나날’에는 생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사람들과 함께 저녁을 기다리고 농담하면서 진정한 실존을 마주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