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6펜스>

by 연두님

<달과 6펜스>


서머싯 몸. 송무 옮김. 민음사. 2019.

연두 서평.



나는 연극을 했다. 연극을 사랑했고 예술을 숭배했다.

나의 첫째 딸은 무용을 했다. 춤을 추면 손 끝까지 음악이 느껴졌고 음악을 들을 때면 그녀 머릿속에 안무가 순간 확 펼쳐진다고 한다.

둘째 딸은 세상의 찬란한 색깔들을 사랑해서 그것을 변주한 그림들도 사랑했다. 시각적인 것들이 주는 행복을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줄 수 있을까 매일 고민을 한다.


‘달을 보느라 발 밑의 6펜스를 보지 못한다.’는 옛 말에 비추어보면 나는 바로 그런 사람이다. 항상 높이 뜬 달을 보며 걸었다. 다른 사람들은 6펜스를 주우려 고개 숙여 조심히 걷는데 나는 고개를 쳐들고 먼 달을 보며 살았다.


나의 삶과 내 자식의 삶이 그렇다 보니 나는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내내 품고 살아야만 했다. 그래서 내게 <달과 6펜스>의 독서는 서머싯 몸의 예술관을 엿보는데 집중되었다.



그는 자기가 느낀 어떤 것을 전달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었고, 오직 그것을 전달해야겠다는 생각만을 가지고 그림들을 그려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찾는 미지의 그것에 좀 더 가까이 가기 위해 망설임 없이 대상을 단순화하고 뒤틀었다. 사실이란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자기와는 관계없는 무수한 사실들 사이에서 그는 자신에게 의미 있는 것만을 찾았다. 우주의 혼을 발견하고 그것을 표현해 내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 그림들에 혼란과 당혹감을 느꼈지만 한편으로 너무나 뚜렷이 드러나 있는 정서에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p212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한다.

사실 예술가의 작업은 개별적이고 은밀하지만 삶 전체가 요구된다. 삶의 진실을 찾는 게 예술이기 때문에 삶의 헌신이 필요하다. 그것은 규정된 것들을 위반하는 길이기도 하다.


예술은 세상의 비밀을 비밀스럽게 드러내는 일이다. 세상에는 비밀이 존재하고 본질적인 것은 그 비밀에 감춰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모든 과정은 고독하다. 그리고 충만하다.


예술가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자 한다. 창조는 원래 신의 영역이다. 최초의 인간이 선악과를 먹고 신의 영역인 선과 악을 알게 되면서 죽음이라는 벌을 받듯이,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는 자는 창조의 고통이라는 벌을 받게 된다. 그렇다. 위대한 예술에서 인간을 감동시키는 깊고 깊은 정서는 고통이 뿌리이다. 예술가의 삶은 잔혹하지만 그런 삶을 통과한 예술은 위대하다.


예술은 쉬지 않고 익숙한 자기를 극복하는 고통의 과정이다. 그렇게 해야지만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자유에 이른다.


100년 전에 씌어진 소설인 만큼, 이 책에서의 ‘예술은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하는 심미주의적 예술관이 부분적으로 비치는 것이나 위대한 예술을 위해 운명 지워진 것 같은 천재적 예술가 상에 대한 환상, 그리고 여러 부분에서 읽히는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은 지금의 시대와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달과 6펜스>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읽히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진실한 열정을 추앙하고 세상의 비밀을 알고자 하기 때문일 것이다. 광적으로 자신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것과 자기만의 방식으로 본질적인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 위대한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6펜스’의 세계에 살지만 ‘달’을 동경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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