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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비오 Oct 19. 2023

슬플 때 슬퍼할줄 알고 사랑할 때 사랑할줄 안다는 것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 최은영

 한 없이 여리고 약해 보이지만 누구보다 단단한 마음을 가지고, 애써 외면하며 지나갈 수도 있지만 어려움에 맞서 그 안에서 성장을 이뤄나가는 사람.

 나에게는 최은영 작가의 이미지가 이러하다.

 늘 조곤조곤하게 얘기하고 쉽게 흥분하며 감정을 쏟아내지는 않지만, 누구보다 치열하게 현실에 맞닿아서 현실을 깊숙하게 들여다보며 함께 아파하고, 함께 고민하고, 새로운 희망을 함께 열어가고 싶어 하는 그 애틋함이 와 닿는 것 같아 더욱 그러하다. ‘쇼코의 미소’, ‘내가 무해한 사람’, 밝은 밤’ 등을 쭉 거쳐오며 최은영 작가의 새로운 작품에 더 목말라 있었고, 더욱 성숙해지는 작가의 시선과 문제의식이 늘 궁금했었다. 아마도 이 책도 그렇게 자연스럽게 읽게 됐던 것 같다.

 나 보다는 조금 후배세대지만, 그럼에도 같은 시대, 같은 공간, 같은 사고를 공유했을 것 같은 최은영 작가가 이번에는 사람들에게, 사회에게 어떤 시선을 두고 있는지, 어떤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지, 어떤 희망을 함께 새겨보고 싶은지 한 호흡에 그 속으로 빨려들어간 듯 했다.

 표제작이기도 하고 가장 한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안정적인 직업인 은행원으로 근무하다 뒤늦게 대학 영문과에 편입한 ‘희원’이 젊은 강사의 영문 에세이 과목을 통해 수업 자체가 가져다주는 매력에 더 나아가 강사의 개인적인 매력에 빠지며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관계를 형성해 가며 서로가 가졌던 아픔과 상처, 그리고 자기 자신의 아픔과 애써 외면했던 ‘나의 모습’과 ‘주저함’을 들여다 보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시간이 좀 더 지나 당사자가 그 시절 강사의 위치에 서게 되면서, 그때의 상대방을 (비록 모든 생각에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이해할 준비가 되고, 이해하고 또 ‘따라가고 싶은’ 공감을, 서로 간에 이어져 있는 ‘희미하지만, 분명한 빛’을 보게 된다.

 “나와 닮은 누군가가 등불을 들고 내 앞에서 걸어주고, 내가 발을 디딜 곳이 허공이 아니라는 사실만이라도 알려주기를 바랐는지 모른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나아갈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빛, 그런 빛을 좇고 싶었는지 모른다”

 두 사람의 공감과 유대감의 중요한 매개였던 ‘용산 참사’를 통해 우리가 그저 이제 잊어도 된다고, 많은 시간이 지났다고 쉽게 말하는 것들을, 그 당사자는 그리고 당사자는 아니더라도 그 공간 속에서 아픔을 느끼며, 자신의 무력감에 빠져 있었을 많은 사람들에게 그럼에도 우리가 할 일이 남았음을 일깨워 주는 것 같다.

 “기억하는 일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자신이 영혼을 증명하는 행동이라는 말을"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이, 그저 나의 편안함과 면피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입장에서 그사람의 마음을 헤아려야 함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새삼스럽지만 ‘易地思之’라는 단어도 떠오르게 하는 작품이다. 끝으로 최근 읽은 허찬욱 신부님의 ‘원래 그런 슬픔은 없다’의 한 구절로 이 작품의 여운을 느껴본다.

 “너의 슬픔을 이해한다’는 말이 상대방에게는 공감의 말로 들리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타인에게 위로와 공감을 주려면, 타인의 슬픔이 어떤 것인지 ‘조심스레’ 물어야 합니다. 타인이 슬픔을 대하는 방식은 어떤지 ‘섬세하게’ 봐야 합니다. 이해되지 않는 슬픔이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대학 교지 편집부 기자로 활동하던 ‘해진’이 동기 ‘희영’과 선배 ‘정윤’과의 관계에서, 그들이 관심가지는 교지에 실려야 하는(취재하고 싶은) 대상을 고민하고, 또한 취재를 통해 그 안에서 사회의 실상에 대해 좀 더 면밀하게 들여다보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겪는 자아의 성장과 타인과의 관계의 형성, 변화 등을 그린 ‘몫’.

 마치 치열했던 그 시절로 돌아간 듯, 마치 학생회실 문을 바로 열고 그 토론의 자리에 내가 있는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 시절 모든 약자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유지하려고 했었고, 거대 권력과 사회 곳곳의 권력 구조에 대한 모순을 깨닫고, 알리고, 바꾸기 위해 했던 일련의 노력들도 생각났지만, 그러한 ‘거대 담론’의 큰 이야기 속에 묻혀 있던 그 사람들의 이야기, 그들이 겪었을 지금도 겪고 있는 아픔에 대해서는 공감하려 했는지 나를 돌아보게 한다.

 작품 속의 그들이 그 시절을 돌아보듯 나 또한 ‘그랬었지’가 아니라, 각자의 위치에서 내가 해야할 것이 무엇이고, 나의 따뜻한 시각과 마음은 (치열함까지는 아니여도) 잃지 않고 늘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야 할 필요성도 다시 한번 느껴본다.

 “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싫었다. 읽고 쓰는 것만으로 나는 어느 정도 내 몫을 했다, 하고 부채감 털어버리고 사는 사람들 있잖아. 부정의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정의롭다는 느낌을 얻고 영영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

 같은 나이와 비슷한 스펙이지만, 순간의 선택(?)에 의해 지금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위치로 정규직인 ‘나와’ 인턴으로 입사한 ‘다희’가 서로간의 내면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며 이해와 상처와 공감에 대한 화두를 던지고 있는 ‘일년’

 자신 또한 사회에서 이 자리에 있기까지, 이러한 안정감을 누리기까지 남들의 시선이나 은근한 따돌림에도 오직 하나의 목표만을 위해 자신의 목소리도 안으로 가둔 채 지내왔지만, 몸과 마음의 병으로 입원한 후 다시 만나게 된 다희를 통해 그 시절의 나에 대해, 그 시절의 나의 진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과정이 크게 다가왔다. 그렇다고 이제 다시 훌훌 털고 연락처를 교환하며 다시 만나며 관계를 발전시키는 또 다른 새로운 관계로 지내지는 않겠지만, 그 시절의 나의 마음을 들여다본다는 것, 그 시절 내가 못했던 말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앞으로의 내가 세상을 대하는 자세나 태도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이라 믿는다.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들여다보고, 진정한 성찰을 통해 나의 희망도, 나의 꿈도 온전히 앞으로 나아가리라 생각해 본다.

 “애정이 상처로 돌아올 때 사람은 상대에게 따져 묻곤 하니까. 그러나 어떤 기대도, 미련도 없는 사람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마음을 걸어 잠근다.”

 비록 3살 터울이지만 때로는 엄마처럼, 때로는 언니처럼 늘 나에게 헌신과 보호해 주던 언니와의 관계에서 언니의 불합리함을 해결해 주기 위해 나섰지만 결국에는 사랑하는 언니와 조카를 영영 볼 수 없게 된 서간 형식의 ‘답신’.

 그토록 사랑하는 언니와 조카를 왜 다시는 볼 수 없는 것인지, 왜 언니에게가 아닌 조카에게 편지를 보내는(보내지지 않고, 썼다 찢어버리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형식인지 그 내용을 알게 됐을 때 다가왔던 먹먹함이 아직도 잊히지가 않는다.

 불합리한 폭력과 멸시와 무시에도 안정적인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지키기 위해 그저 감내하고 살고 있는, 자신의 가정 폭행 피해가 반드시 치러야 하는 과정처럼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언니의 모습에 누구라도 가해자에게 분노를 일으켜야 마땅할 것이다. 가족이라면, 사랑하는 가족이라면, 그 가족이 때로는 엄마이고, 언니이고, 친구였던 그 사람이 오랜 기간 폭력에 길들여져있고 소위 ‘가스라이팅’ 당하면서 살고 있다면 당연히 악을 응징하고 질서를 바로잡아야 함이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나의 힘으로 그러한 불합리함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의도치 않는 결과로 이어지고, 결국에는 언니가 나를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까지 확인하게 될 때의 그 참담함과 절망감은 마치 내가 그 세상에 있는 듯 마음 한켠이 무너지는 느낌이다.

 “있는 일을 없는 일로 두는 것. 모른 척하는 것. 그게 우리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을 대하는 우리의 오래된 습관이었던 거야. 그건 서로가 서로에게 결정적으로 힘이 되어줄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방식이기도 했지. 그렇게 자기 자신을 속이는 거야. 다 괜찮다고, 별일 아니라고, 들쑤셔봤자 문제만 더 커질 뿐이라고.”

 결국 내가 사랑하는 방식으로 이제는 내가 언니를 지켜주고 보호해 주려고 했지만, 법정에서 조차 동생인 자기보다 폭력을 행하는 남편에게 유리한 진술을 하는 언니를 통해 그 자신 또한 자신을 놓아버리는 순간까지 이르게 된다. 정말 내가 사랑하는 방식이 맞는 것인지, 나가 언니를 사랑하는 것이 맞는지, 그리고 언니와 나는 정말 사랑했었는지 등 삶의 존립 자체가 흔들리는 충격이었을테고, 나의 삶 또한 의미 없어지는 순간에 다다를 것 같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아야 함을, 나 자신을 포기하지 않아야 함을, 내가 나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함을 절절히 느낀다.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벌주려는 짓은 더는 하지 말라고 하더라. 스스로한테 미안한 줄 알고 살라고 했어. 나는 그 말을 하며 글썽이던, 아마도 엄마 또래였을 변호인의 얼굴을 잊지 못해.”

 일찍 돌아가신 엄마를 대신해 자신을 보호해 준 열다섯 살 터울의 오빠의 죽음 이후 그가 준 사랑과 자신의 딸까지 셋이 만들어간 그 시간의 마음까지 돌아보고 보듬게 되는 ‘파종’

 자신을 온전히 이해해주고, 그저 지켜봐주고 묵묵하게 응원해 주는 마음의 힘을 느낄 수 있었는데, 작품 속 주인공도 딸의 느닷없는 자퇴의 고백으로 뒤늦게 딸이 썼다는 글과 그러면서 오빠와의 생전에서 관계를 돌아보며 오빠의 한없는 무한한 기다림과 사랑을 느끼고 추억하게 된다. 그리고 애써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는 아픔인 것들도 직시하면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또 하루를 살아가야 함을 추억의 공간인 ‘텃밭’을 새롭게 정돈하며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에 뭔지 모를 애틋함이 느껴졌다.

 아울러, 그저 어리다고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너무 큰 슬픔이 상처가 될 거라고 지레 짐작으로 나의 시각으로 재단하기 보다는 슬플 때 슬퍼하고, 사랑할 때 사랑하고, 떠난 것을 추억하고, 새로운 삶의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 중요함을 다시 한번 느껴본다.

 “사실 그녀는 그런 상항을 하는 그가 부러웠었고, 지금도 부러웠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져도, 그 몸이 잿가루가 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그 사람이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리라고 믿는 그 낙관이 부러웠다.”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친밀하게, 나의 실질적인 보호자로 보낸 할머니와도 같은 이모를 떠올리며 그 속에서 나의 성장과 이모와의 관계, 세상과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는 ‘이모에게’.

 엄격하고 인색하게 자신을 단련시켰던 이모의 영향으로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었고, 실질적인 양육과 보호를 해줬던 만큼 그 누구보다 감정적인 교감이 컸던 이모를 어른들만의 어떤 연유로 인해 헤어져 살게 되고 한동안 보지 못하면서 자신을 돌아보는 ‘나’.

 때로는 인색함에 매정하기도 했지만, 지금의 자신을 형성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쳤고, 나 또한 그러한 이모의 모습과 흔적이 많이 나오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며 이모에 대한 그리움은 더 커졌으리라. 아울러, 이모가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 살았을까 하며, 그리고 이모의 속내(자신을 무척 자랑스러워했고, 지금도 자랑스러워함을)를 느끼면서 이모를 내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이모를 받아들이고, 나 또한 나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임을 깨닫는 과정들이 던져주는 울림이 상당히 컸다.

 “그런 순간에 나는 문득 옛날 사람들이 믿음을 떠올린다. 환한 낮이 아니라 어두운 밤에만 지상에 닿는 저 너머의 눈빛이 있다는 믿음을 말이다.”

 모녀 관계가 가장 긴밀하면서도, 가장 어렵고 긴장되는 관계일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누가 봐도 사회적으로도 성공하고, 집안의 자랑이고 미국에서도 생활하고 지금은 홍콩에서 지내고 있는 작은 딸 ‘우경’을 만나러 가는 우리의 어머니의 모습을 지닌 ‘기남’. 홍콩 도착 시점부터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이 반복되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우경’으로 인해 홍콩에서의 불편하고도 애틋한 동거가 시작된다.

 그 속에서 자신의 어린시절 성장했던 모습(궁핍한 사정으로 식모로 팔려간)을 돌이켜보, 이후 결혼하며 큰 딸과 작은 딸의 관계를 되짚어보고, 성장한 후 ‘루저’처럼 비춰지며 동생의 멸시를 받는 큰 딸 ‘진경’에 대한 애틋함까지 ‘기남’은 짧은 홍콩 생활 중에 자신과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계기를 갖게 된다.

 “나이가 들고 성숙해진다는 건 그저 자신의 환경에 점점 더 익숙해진다는 뜻인지도 몰랐다. 낯선 그곳에 앉은 제 자신이 여전히 미숙하고, 여전히 두려움이 많은 아이라는 걸 깨달았다.”

 익숙하지 않고 소통되지 않음으로 또한 나이듬으로 인해 작은 실수를 하게 되고 자신으로 인해 불편해진 관계에 대해 큰 부끄러움과 자책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 순간 자신을 한없이 좋아하고 존중하는 손자의 입을 통해 큰 위안과 치유를 받게 된다. 부끄러워 해도 된다는 것, 부끄러울까봐 애써 외면했던 것들, 자신까지도 외면했던 순간들이 ‘부끄러워 해도 된다’는 한 마디로 따뜻함으로 변화됐다.

 많은 부분이 그런 것 같다. 실수할까봐, 남에게 어떻게 보일까 전전긍긍하고 부끄러워하면 안된다는 허위로 그저 ‘쿨’한 척 했던 순간들이 나에게도 많았음을. 부끄러움도 당당하게 인정할 수 있는 그런 용기가 큰 치유가 될 수 있음을 느껴본다.

 “그 순간,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그애가 오히려 자신보다 자신을 더 많이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 건 무슨 이유였을까. 부끄러워도 돼요. 한 번도 기대하지 않았던 말. 그 말을 잊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최은영 작가의 작품은 ‘따뜻함’이 느껴진다. 누군가의 아픔을 들여다보고, 같이 아파하고, 사랑할 때 같이 사랑하고 기뻐할 줄 아는. 이는 작가 스스로가 사회와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따뜻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생각해본다. 나를 소중하게 돌아보고, 나를 진심으로 안아주고 또 하루하루에 충실하며 언제라도 따뜻함을 잃지 않는 그런 삶을 꿈꿔본다.

 “그저 하루를 살아가는 것, 슬프면 슬프다는 것을 알고 화가 나면 화가 난다는 것을 알고 사랑하면 사랑한다는 것을 알면서 나를 계속 지켜보는 일. 나는 지금 그런 일을 하는 것 같다.”
<작가의 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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