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솔직하기,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기
사랑의 꿈 - 손보미
아마 ‘불장난’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손보미라는 작가에 대해 주목하게 되고, 그의 글을 관심있게 읽기 시작한 계기가.
그저 사춘기 소녀의 ‘순정만화’같은 감성적인 내용으로 지레 짐작하고 가볍게 집어 들었지만 ‘불장난’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게 되고, 12살 소녀의 감상만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과 내면의 갈등과 그로 인한 자아의 성장까지 단순히 성장 소설로만 평가하기에는 아깝다는 생각과 함께 작품집이 나오면 한번 읽어보겠다고 마음먹었었다.
작가 스스로가 밝히듯 어린 시절 사춘기를 지나온 (초등부터 중3에 이르기까지) 그 시절 (겹쳐지는) 인물의 성장기를 다룬 연작 소설이다. 앞의 내용과 뒤의 작품이 이어지고 모든 작품들이 연관지어지게 생각될 수 밖에 없는 어느 한 부분도 소홀히 하지 못하고 읽어 내려가게 만드는 힘을 느꼈다.
약간은 스릴러적인 느낌도 들게 하면서, 또한 묘하게 외삼촌 부부의 학대가 있었나 싶게도 오해하게 만들었던 ‘밤이 지나면’.
여타의 사정으로 엄마와 떨어져 외삼촌 집에 얹혀 사는 열살 소녀의 시각으로 바라본 어른들의 세상. 그 속에서 철저하게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며 자신들을 위장한 채 살아가는 어른들의 적나라한 모습들이 드러난다.
하지만, 그 모습들을 가식과 위선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는 것은 바로 그 삶 자체가 우리 부모님이, 그리고 내가 살아가는 방식일 수밖에 없어서 일 것이다. 조작된 자작 납치극 이후 외삼촌과 외숙모가 보여준 소녀에 대한 관심과 애정, 더 나아가 현실의 팍팍함에 사랑한다는 표현도 드러내지 못한 채 살아가지만, 마음 속에는 누구보다 애틋한 사랑을 주고 있었다는 면을 발견하며 묘한 뿌듯함과 따뜻함을 함께 느꼈다.
손보미라는 작가에게 빠지게 만들고, 다시 읽어도 또 빠지고야 만 바로 그 ‘불장난’.
아버지의 재혼으로 인한 새 어머니와의 적응과 사춘기를 겪는 반 친구들과의 사이에서의 방황과 갈등을 다루며 열두 살 소녀의 감성과 사고를 정말로 한 순간도 놓치지 못하게 숨가쁘게 보여주고 있다.
집에서도 완전히 마음을 정착하지 못한 채 적응의 과정을 겪고 있고, 학교에서도 새로 사귄 친구들과의 사이에서 이쪽도 저쪽도 아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어설프게 성장 중인 ‘나’가 ‘양우정’으로 대표되는 소위 노는(?) 아이들의 흠을 잡기 위해 시작한 탐험의 끝의 당황스러움이 나에게까지 미치는 듯 하다. 그리고 그저 웃고 넘어가는 어설픈 광경뿐만 아니라 그만의 수줍음과 당혹스러움을 ‘불장난’이라는 하나의 해소 대상으로 전환하는 것이 숨을 쉬지 못하게끔 했다.
요즘 들어 화두처럼 ‘평정심’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있는데, 양우정의 당당함과 ‘평정심’. 작가의 말처럼 타고나야 하는 사람들, 선택받은 존재들에게만 가능한 단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며, ‘평정심’의 또 다른 말이 ‘능청스러움’은 아닐지도 한번 생각해 본다.
“분명히, 불길은 허공에서 살아 있었다. 햇볕이 내리쬐는 여름날 오후에 내가 열기에 열기를 더한 거라고, 그건 아주 대단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허공에서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 그 장면은 눈앞에서 선명하고 집요하게 계속해서 떠올랐다.”
그 열기를 더해 보고 싶은 요즘이다.
‘딸을 버린다’는 마음의 설정이 충격으로 다가 왔지만, 삶의 힘겨움에 누구든 한번쯤은 마음으로는 그런 생각을 해봤을 것이라는 확신을 들게 만들었던 ‘사랑의 꿈’.
홀로 아이를 키우며 정해진 날 하루는 마음 맞는 지인들과 웃고 떠들며, 먹고 마시며 나름의 조그만 일탈을 즐기던 평범한 직장 여성이 아이를 떠나 ‘도망칠 기회’를 스스로 만들고자 계획했던 그 심리를 보여주고 있다.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서 늘 모임을 주도하고 또한 자신의 방식대로 조정하는 (일정의 가스라이팅처럼) 상대방의 눈을 피해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몰래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고자 했던 주인공은 스스로 나온 그 밤의 충동적 행위에서 계획과는 다른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다.
하지만, 그 상황 자체가 가져오는 절박함 속에 드디어 생각의 구속에서 벗어나게 되고 온전히 자신만의 생각에 집중하며, 특히 자신을 조정해 왔던 그녀까지도 명령하며 자신의 말대로 움직이게 하는 순간은 뭔지 모를 카타르시스를 전달해 준다. 물론 ‘아이를 버리는’ 계획 자체야 백번 욕을 해도 마땅하지만, 그녀가 그녀 스스로의 주체가 되는 순간에는 어떤 대리 만족과 쾌감까지 느껴본다.
엄격하다 못해 자신만의 질서를 고수하는데 철저한 할머니 댁에서 방학 동안 지내며, 할머니의 세계의 파괴자(?)인 삼촌의 등장으로 겪는 혼란과 갈등, 그리고 형식적 봉합까지를 보여는 ‘해변의 피크닉’.
이 작품 역시 ‘불장난’과 함께 이전에 읽었던 작품이지만 지금 읽어보는 내용은 또 새롭다. 실제 철없게만 보였던 삼촌의 의식과 그저 철부지였던 삼촌의 그녀까지도 외형적 봉합을 위한 숨은 노력의 흔적들이 느껴지는 듯 하다.
할머니 세계를 파괴하는 빌런 역할의 삼촌이지만 점점 그에게 호기심이 가고, 감정적으로 공감이 되고, 특히나 어떤 그 시절 겪어야 하는 첫사랑의 기억처럼 마음을 두는, 그런 모든 것들이 이 세계의 절대자인 할머니에게 배신하는 (그렇게 생각하는) 행위이지만, 기꺼이 그런 배신을 감행하고야 마는 열두살 소녀의 마음이 그저 어린 치기나 한때 누구나 느꼈을 그러한 무모함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나는 나중에서야,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 내 외부에서 벌어지는 그 어떤 일도 내게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듯이 행동하는 것의 핵심에는 허영심이 자리잡고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중학교 3학년 소녀가 잘생긴 수학 과외 선생님에게 품은 사랑의 감정을 보여주는 ‘첫사랑’.
그저 잘생기고 명문대생인 대학생 과외 선생님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자신에 대해서는 조금의 감정도 없다는 것을 알지만 설령 입대를 앞두고 술에 절어 후줄근하게 나타남에도 자신만의 ‘환상’을 지키려는 소녀의 마음이 가슴 한켠에 느껴진다.
뭔가 더 나은 신분의 상승을 위해 과외를 시키는 엄마의 마음과 달리, 소녀는 그 스스로 자신이 설정한 ‘환상’과 그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그런 엄마의 마음과 공존하고 있는데, 그 능청스러움과 교묘함이 또한 놀랍기도 하다.
그러면서 동급생 친구가 보내오는 사랑의 감정을 눈치채면서도 애써 부인하며 (현실은 부인하고, 환상을 유지하려고 하는) 자신이 설정한 인식의 틀을 유지하려는 모습이 귀엽다.
홀로 자신을 키우는 엄마의 수고를 덜기 위해 중학생 언니에게 돌봄을 당하는 나의 모습을 그린 ‘이사’.
일종의 외로움의 감정을 이용해 ‘나’를 마음껏 가스라이팅하고, 자신의 생각으로 어른들의 생각과 사고를 무너뜨리려 하는 발칙한 중학생 언니임을 알고 있음에도 나에게는 그러한 영악함이라도 필요한 상황의 아슬아슬함을 보여주고 있다.
분명 이성적인 판단에서는 당장 내쫓아야 마땅하고, 나에게 뭐 하나 제대로 돌봐준 적도 없지만 그와 상관없이 ‘나’의 감정을 중학생 언니에게 깊이 쏠리고 있는 모습이 안타까우면서도 그 시절 그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진정한 ‘관심’과 ‘사랑’임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받아도 받아도 채워지지 않을 그 시절 아이들의 사랑.
현실에서 우리 아이들에게 주어도 주어도 모자를만큼 사랑과 관심을 주고 있는 것인지 돌이켜 보게 된다.
“하지만 그들 중 중학생 언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두 팔로 안기고, 편지를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받은 경험을 한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없었다. 아무도 없었다. 적어도 그 당시의 내가 그려본 세상에서 그런 경험을 한 건 나밖에 없었다.”
나는 나에게 이처럼 솔직해 질 수 있는가?
남의 시선, 나에 대한 평가, 나를 두고 하는 말들을 너무 신경 쓴 나머지 나 또한 ‘허언’의 세계에 발 담그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이 만들어 놓은 거짓말을 그대로 사실로 믿는 정신적 증후군’이 허언증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나 또한 ‘허언증’에 놓여져 있다. 누구를 위하여 나는 나에게 솔직하지 못하는지, 무엇을 위하여 허언증의 세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인지. 깊이 생각해 보게 되는 소설이다.
‘나에게 무한히 솔직하기’,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