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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비오 Oct 30. 2023

쓸쓸하지만 쓸쓸하지만은 않은

소설 보다 '가을 2023' - 김지연 이주혜 전하영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그 속에서 성장과 변화를 겪으며 이전과는 또 다른 한단계 성숙한 나를 만들어 가는 과정일 것이다.  

 홀로 지낼 수 없음에 누군가에 의지하고 도움을 받고, 또 때로는 돕기도 하면서 어제와는 또 다른 오늘을, 그리고 한발짝 더 앞서갈 수 있는 내일을 희망하는 것이 바로 내가 살아가는 ‘삶’이라 생각해 본다.


 계절의 변화를 함께 호흡하며,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의 삶과 고민을 간접적으로 겪으며 때로는 깊이 공감하고, 때로는 같이 아파하며, 또 때로는 함께 웃으며 오랜 계절을 함께 해온 ‘소설 보다’ 시리즈의 올 가을 작품집도 그렇게 자연스레 집어 들게 된다.

 반복되는 계절이지만, 늘 같은 계절이 아니듯 어제와 비슷한 오늘도, 다가올 내일도 늘 같지 않기를, 조금은 나아지기를 바라며 시간을 흐름을 함께 겪어 온 ‘소설 보다-가을’과 함께 쓸쓸함이 짙어지는 가을을 깊이 느껴본다.


 점차 가족이 분화되고, 소규모화되고 더 이상의 이어짐이 없는 ‘1인 가구’가 낯설지만은 않은 시절이 되어 버린 요즘.  ‘1인 가구’나 ‘가족의 분화’가 비단 요즘 ‘젊은 것들’의 개인적인 태도, 이기적인 성향 때문으로 결론지어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청년 세대가 겪는 현실에서의 어려움과 고민들, 그리고 그것들이 어떻게 사람 사이의 관계까지 왜곡하고 편협하게 만드는 지를 이름도 귀여운 ‘반려빚’이라는 개념으로 보여주고 있는 김지연 작가의 ‘반려빚’.


 ‘반려견’이나 ‘반려묘’, 심지어 ‘반려 식물’ 등에 이르기까지 이제는 익숙한 개념이 된 ‘반려’라는 단어를 ‘빚(채무)’에 쓸 줄은 몰랐다. 제목 때문인지 그저 유쾌하고 우당탕탕 거리는 재미있는 에피소드이리라 생각했지만, 역시 ‘빚’은 현실에서나 소설 속에서나 심적으로 무겁게 한다.

 정현은 前 애인과의 행복한 생활을 위해 마련했던 둘만의 보금자리가 ‘전세 사기’로 상황이 꼬이게 되고, 결국 사랑하던 사람도 떠나고 남은 것은 홀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큰 ‘빚’ 뿐인 상황에 놓인다. 모든 생활의 제약을 가져다 주는 ‘반려 빚’ 덕분으로 정현은 아이스아메리카노도, 자기에게 쓰는 소비도, 심지어 연어 또한 모든 것을 억제하며 사는 그 덕분으로 생활을 이어가는 ‘웃픈’ 현실을 살고 있다.


 “정현은 반려빚과 함께 산책을 나갔다. 목이 말라 시원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싶어져 반려빚에게 말을 건넸다. 반려빚은 단호해야만 한다는 듯이 말했다. 집에 커피믹스 있잖아.” <작품 中>


 나 또한 결혼하며 주택담보대출을 얻어 신혼집을 장만하고, 애 둘이 커가는 지금까지 어찌보면 ‘반려 빚’ 덕분에 큰 소비도, 해외여행도, 나름의 사치도 최대한 억제하며 이 자리와 공간을 마련했다. 20년에 가까운 시간을 그렇게 보냈기에 크게 공감이 가면서도 어쩌면 나는 저런 부동산 사기를 당하지 않고 순탄하게 빚을 갚으며 살아왔기에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반려 빚’을 가져오게 된 부동산 환경, 전세 사기, 희망과 욕구가 사라져 버린 요즘의 청년 세대를 그저 바라보고만 있지 않고 있다. ‘반려 빚’에서 더 나아가 그 순간을 견디며 버텨오는 지금에도 ‘믿음’이라는 질문을 던져주고 있다.

 마음으로는 너무도 믿고 싶고, 의지하고 싶고, 원하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는 마음’. 누군가의 마음도 한 번 더 어떤 의도가 있지는 의심하게 되고, 당장 내가 겪어야 할 현실의 어려움으로 누군가에 선뜻 배려와 아량을 베풀기도 힘들어져 버린 상황. 마침내 ‘반려 빚’이 사라져 버리는 ‘0’이 된 현실에서도 그저 ‘0’으로 머물고 싶어하는 마음.


 시대의 흐름 속에서 우리의 사람과의 관계는 어떻게 변화될 수 있고, 그럼에도 믿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이고, 그러한 믿음은 어디에서부터 가능한 것인지 묵직하고도 많은 고민을 던져주는 작품이었고, 무엇보다 심각한 상황을 심각하지 않고 덤덤하게 써 내려간 문장이 너무도 마음을 아리게 한다.


 “무언가를 욕망한다는 것은 그것을 내가 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믿어보는 일인 것도 같고, 그래서 그게 좌절되면 괴롭겠지만 욕망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애쓰는 동안에는 살아갈 맛이 나는 것 같아요. ‘정현’은 자신이 무엇을 욕망하는지도 잘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믿을 때 행복해지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작품 인터뷰 中>


 어린 새가 자라 둥지에서 떠나 독립하는 의미를 지닌 ‘이소(離巢)’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된 이주혜 작가의 ‘이소 중입니다.’


 번역가와 소설가와 시인이 때로는 가나다순으로, 나이순으로, 데뷔 연도순으로 등 세 인물이지만 한 인물 같은 긴밀한 관계의 세 사람이 땅끝 마을에 사는 철학자를 만나러 가는 과정에서 떠오르는 생각들과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보여주고 있다.


 누구라고 명명되는 이름이 아닌 사회적으로 활동하는(드러나는) 직업으로 호칭되는 세 사람은 반려견이나 외동딸, (특이하게도) 전 남편의 아버지 등을 부양하고 있으면서, ‘돌봄’에 대해 버거워 하거나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덤덤하게 각자의 삶을 의미있게 살아내고 있는 중이다. 철학자를 만나러 땅끝으로 가는 세 사람의 여정은 현실에서의 다양한 고민과 힘겨움 속에서도 우회하거나 후퇴하지 않고, 특히 세 사람의 공감과 ‘연대’를 통해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그들의 삶의 자세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번역가의 차 트렁크에 실린 (결국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 ‘물컹할 것 같기도 하고, 단단한 것 같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하면서 싸늘한 기운을 풍기는’ 짐은 결국 그들이 맞닥뜨리는 삶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어린 새가 둥지를 떠나 날아가는 ‘이소’ 과정에서 새는 정상으로 도약할 수도, 하지만 날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지만, 땅에 떨어진 새를 함부로 (도움이라는) 손길을 주면 평생 독립할 수 없는 새의 운명처럼 우리의 삶과 인생도 우리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삶을 헤쳐나가야 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그리고 그 모든 것과 상관없이 시간은 내일을 향해 무심히 걸어갈 것”이라는 말이, 그리고 그 길에 누군가와의 동지적 ‘연대’가 중요하다는 것이 크게 다가온다.


 “연대란 어느 분야에서든 사실 효율성이 떨어집니다. 경제의 언어가 아니니까요. 비경제적이고 비효율적인 것을 알면서도 추구하는 것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연대의 한 면모인데요. 경제와 효율의 ‘문턱 너머 저편’에 있다는 면에서 연대는 소설과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작품 인터뷰 中>


 어릴 때는 영희와 철수만큼이나 여성의 이름으로 흔하게 쓰였던 ‘숙희’. 50을 앞둔 마흔 아홉의 숙희가 친한 동생을 만나러 괌에 가는 여정 속에 어중간한 계층일 수 있는 중년 여성의 삶과 고민을 보여주고 있는 전하영 작가의 ‘숙희의 실험영화’.


 지금의 딱 내 나이가 49에 걸려 있어서인지, 나도 아직 50대의 나를 상상해보지 못했고(사실 40대도 상상도 못했었는데 이미 거의 다 지나버린), 어떻게 이후의 인생을 대비해야 하는 아무런 고민도 없는 상황이 막막해서인지 숙희의 고민의 지점은 다르지만 그 시작과 방향은 비슷한 것 같아 더 절절했던 것 같다.


 여전히 글을 쓰고 있고, 실험영화를 만들고 싶어하는 숙희는 중년 여성이라는 자신의 위치에 대해서도 아직 적응을 하지 못하는(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에서, 친한 동생이 손주를 낳았다는 소식을 접하며 이제 ‘할머니’라는 단어에도 혼돈을 느끼며 괌으로 향하게 된다. 자신이 비행 공포증이 있음에도 15년만에 비행기를 ‘스스로’ 타면서 괌으로 건너가는 숙희의 모습이 바로 그녀가 49년을 살아왔던 방식이리라 생각해 본다.


 숙희는 아줌마라는 단어에 적응하지 못한다고 해서, 단순히 그녀가 ‘아가씨’로서 젊음의 가치만을 추구하고 그렇게 평가되고 싶어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 보다는 ‘아가씨’나 ‘아줌마’로 쉽게 규정지어지고, 또 사회적으로 고착화된 시선에서 벗어나 ‘인간 숙희’의 본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중이다.

 일반적인 사회적 시각으로 보면 수근거림의 대상일 수 있는 한참이나 어린 애인(정작 그 애인은 먼저 연락하는 일이 없는)을 두고 있는 숙희는 어찌보면 자신에게 빌붙어 있는 애인을 ‘보호’하고 있고, 혼란스러운 마음의 상태에서 다시 소환해 관계를 갖지만 그 또한 ‘거추장’스러워져 관계를 정리해야 함을 느끼게 된다.


 “아줌마가 돼버렸다는 압박보다는 드디어 젊은 여자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과 편안함이 컸다. 생각해보니 젊었을 때도 ‘아가씨’니 ‘언니’니 불리는 게 정말 싫었다. 젊은 게 특권이라는 생각도 없었다.” <작품 中>


 숙희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일관되게 끌고 가고 있는 힘이 바로 이러한 ‘주체성’일 것이라 생각해 본다.

 비행 공포증에도 불구하고 친동생도 아닌 친한 아는 동생의 손주를 보러 괌으로 떠나는 숙희의 여정은 어쩌면 그 자신이 새롭게 다가오는 50대를 향한 자신의 의지를 나타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직 다가오지 않는 시절이고, 아무런 준비도 없고, 두려움도 가득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내 스스로가 그 길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간다는 표현이 바로 비행기를 타고 괌까지 가는 숙희의 비행이리라 짐작해 본다. 그리고 괌에서 만난 새 생명(친한 동생의 손주)의 손길을 느끼며 자신의 삶이, 다가올 인생이, 늘 그렇듯 희망을 일궈나가는 희망을 품게 하는 그 여정(실험영화)이 이미 시작됐음을 숙희 스스로가 느끼고 있다고 느껴본다.


 “숙희는 정말 무언가를 잃어버렸을까요? 어쩌면 숙희는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면 또 다른 대상을 만나면 숙희 안에 있던 사랑의 감정이 다시 자라날 테니까요.” <작품 인터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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