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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 서연 Jun 23. 2024

음악이 환상적인 발레 작품

모리스 라벨의 무용 교향곡 <다프니스와 클로에>

프랑수아 제라르, 다프니스와 클로에, 1825

확실히 고대 그리스 문화는 서양 문화의 뿌리인가보다. 서양 미술, 문학 심지어 발레, 음악에서까지 그리스 문화는 서양 예술가들에게 마르지 않는 샘이었다. 서양인들의 창의성은 거의 그리스 문화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스 신화는 예술 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를 망라하고 은유적인 표현을 쓸 때에도 자주 인용되어 사용되었다. 그리스 신화를 통해 인생을 사는 데 있어서 통찰력과 지혜를 구할 수도 있다. 신화 속의 인물들은 다양한 분야의 예술에서 다채롭게 창조되었고 이렇게 창조된 예술작품들은 오늘날에도 심미적인 아름다움을 전해주고 있다. 역사학자 E.H.카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란 과거와 현재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었는데, 그리스 문화야말로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고 상호작용을 하면서 서양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연결고리이자 중요한 열쇠이다.


그리스 문화를 통해 시공간을 넘나들면서 매혹의 순간에 빠지는 경험을 할 수도 있다. 작품에 고대 그리스 문학 속의 신화적인 분위기를 다채로운 음향으로 풍부하게 녹여낸 프랑스 작곡가 모리스 라벨의 <다프니스와 클로에>를 통해서이다. 발레 뤼스의 디아길레프의 의뢰로 작곡을 했던 발레 음악으로 오늘날에까지도 발레 애호가, 클래식 애호가들 모두를 통틀어서 환상의 세계로 안내하고 있는 발레 음악이다.


모리스 라벨의 무용 교향곡 <다프니스와 클로에, Daphnis et Chloe>

장르 : 발레를 위한 관현악곡, 작곡가 자신은 이 곡을 가리켜 '무용 교향곡'이라고 칭했다.

원작 : 3세기경의 고대 그리스의 작가 롱구스의 낭만적인 소설

각색 및 안무 : 미하일 포킨

의상 및 무대 배경 : 레옹 박스트

구성 : 1막 3장

초연 : 파리 샤틀레 극장, 1912년 6월 8일

다프니스 역(바슬라프 니진스키), 클로에 역(타마라 카르사비나)

특징 : 당대 최고의 아티스트들이 참여해 만든 발레 작품으로 오늘날에는 발레 작품보다 음악이 더 사랑받는 작품


작곡 배경 :

발레 뤼스의 수석 안무가였던 미하일 포킨은 그리스를 배경으로 한 발레 작품을 만들겠다는 소망을 오래도록 품어왔다. 포킨이 아이디어를 내자 발레 뤼스를 이끌었던 디아길레프는 이미 프랑스에서 거두고 있는 성공을 확고히 다지고자 했다. 디아길레프는 순수한 프랑스 음악으로 된 발레 음악을 기획했고, 프랑스 작곡가 모리스 라벨에게 고대 그리스 문학가 롱구스의 작품을 주제로 한 발레 음악 작곡을 의뢰했다.

당시 작곡을 의뢰받았던 모리스 라벨은 훗날 1928년에 이렇게 회고했다.

"이 작품에서 내가 의도했던 것은 규모가 큰 음악적 프레스코를 작곡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회고 취향이라기보다는 나의 꿈인 그리스에 대한 충정을 한층 더 의식한 것으로서, 18세기 말의 프랑스 화가들이 상상하고 그린 프레스코와 의식적으로 유사하게 그려내는 것이었다. 이 작품은 대단히 엄밀한 조성계획에 그 바탕을 두고 있으며 교향곡으로서의 동질성을 확보하는 소수의 동기로 구성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모리스 라벨은 이 작품에서 고대 그리스 문학과 18세기의 프랑스 예술 스타일을 융화해서 작곡가 자신의 주특기인 정교한 화성과 치밀한 기교로서 작품 속 고대 그리스의 목가적인 분위기를 환상적이면서도 오케스트라 음향은 정밀하게 표현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작곡하는 과정이 그리 순탄치가 않았다. 프랑스어를 몰랐던 미하일 포킨이 러시아어로 대본을 썼기에 의사소통을 하는 데에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라벨은 포킨의 에로틱한 뉘앙스의 대본을 거북해했다. 지지부진한 협상에 지쳐갔던 라벨은 이런저런 이유로 작곡을 미루다가 1910년에 가서야 피아노 악보를 완성했다. 그러다가 라벨은 스트라빈스키의 <불새>에서 큰 충격을 받아 그 동안 미뤄왔던 <다프니스와 클로에>의 오케스트레이션 작업에 착수를 했다. 작품 손질을 거듭한 결과 마침내 1912년에 발레 작품으로 초연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원작 줄거리 : 고대 그리스 작가 롱구스의 연애 모험 소설 4권

1권 - 고대 그리스의 3세기경 에게해의 레스보스섬의 농장에서 염소를 키우던 목동이 버려진 사내아이를 주워다가 '다프니스'라는 이름을 지은 후 키운다. 2년 후 또 버려진 여자아이를 발견하고 '클로에'라고 이름을 지어준 후 데려다가 키운다. 남매처럼 자란 두 아이는 다 자라서 어느덧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2권 - 그러던 중 평화로웠던 목장에 파란이 일어난다. 레스보스 섬의 북쪽 해안에 접해 있는 메팀나라에서 온 부유한 청년들이 배를 대고 들이닥치면서 다프니스를 죽도록 두들겨 팼기 때문이다. 클로에는 다프니스를 정성껏 간호한다. 그러나 이 청년들이 또 들이닥친다. 두번째로 침범했을 때에는 클로에를 납치한다. 그러자 성스러운 동굴 요정들이 불쌍한 다프니스를 목신 판에게 데려간다. 목신 판의 도움으로 클로에는 자유의 몸이 되고, 두 사람은 영원한 사랑을 맹세한다.

3권 - 여자와 사랑을 나눈 경험이 없는 다프니스에게 농부의 아내인 리카이니온이 일종의 성교육을 시킨다. 그 사이 수많은 구혼자들이 클로에에게 청혼한다. 다프니스는 요정들의 선물 덕분에 구혼자 자격을 얻게 된다.

4권 - 그러던 다프니스는 지방 영주아들이었음이 징표가 되는 물건으로 확인된다. 클로에 역시 훌륭한 가문의 딸이었음이 밝혀지면서 사람은 행복하게 결합을 한다. 이제 두 사람은 부유하게 살 수 있지만 화려한 삶 대신에 지금처럼 님프와 목신 판, 사랑의 신을 섬기며 목가적인 생활을 이어나가기로 한다.


발레 시놉시스: 1막 3장

1장 - 목가적인 분위기의 숲가에 양치기 라몬과 드라아스가 다프니스와 클로에를 발견한다. 곧이어 도르콘과 다프니스가 클로에를 두고 춤대결을 벌인다. 도르콘은 '그로테스크한 춤(Danse Groesque)'으로 거칠게 추는데 반해 다프니스는 '경쾌하고 우아한 춤(Danse Legere et Gracieuse)'를 추면서 춤대결에서 이긴다. 그러나 해적들이 들이닥치면서 클로에를 납치하고 목가적인 분위기는 파괴된다. 이에 님프들은 '느리고 신비로운 춤(Danse lente et Mysterieuse)'으로 목신 판에게 도움을 청한다.

2장 - 해적들이 '전쟁의 춤(Danse Guerriere)'을 추자 곧이어 클로에가 '탄원의 춤(Danse Suppliante)'을 춘다. 목신이 등장하자 해적들이 달아나고 클로에는 구출된다.

3장 - 다시 평화로운 목가적인 분위기로 돌아온다. 양치기들이 님프의 동굴에서 자고 있는 다프니스를 깨우고, 늙은 라몬은 님프인 시링크스와 목신과의 사랑의 추억이 클로에를 구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다프니스와 클로에는 감사함을 표현하면서 오케스트라 투티처럼 전원이 '모두의 춤(Danse Generale)'을 추면서 작품의 끝을 맺는다.

https://youtu.be/tWqeahU72-U?si=g8sNy6nc6BKE0nQw

3장 해돋이, 일출(Lever du Jour) - 환상적인 선율을 배경으로 새벽이 밝아온다. 다프니스와 클로에는 감격의 재회를 한다.


https://youtu.be/ujLvKr9koaA?si=ejr8OnRUG3DVsLIe

3장 모두의 춤(Danse generale, Bacchanale) 두 사람은 목신 판과 시링크스에게 감사함을 표현하면서 신들이 다시 결합하기를 기원하는 팬터마임을 펼쳐 보인다.


https://youtu.be/4p4ZasfcS-M?si=eHw7-po4mpWg2EZn

3장 모두의 춤(Danse generale, Bacchanale) 발레의 마지막 장면은 목신 판과 님프를 찬양하는 춤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모음곡으로 편곡된 다프니스와 클로에

라벨은 원곡에서 몇개의 음악을 발췌하여 두 개의 모음곡으로 편곡했다. 제 1모음곡은 원곡의 1, 2부에서 발췌한 3개의 음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2관 편성, 다양한 타악기, 혼성 4부), 제 2모음곡은 원곡의 3부에서 발췌한 3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라벨이 편곡한 모음곡은 원곡인 발레 음악보다 더 인기가 많으며 특히 제 2모음곡은 라벨의 또다른 발레 음악 <볼레로>와 함께 주옥같은 관현악곡으로 큰 사랑을 받으면서 세계 주요 오케스트라단이 자주 연주하는 곡이 되었다.


제 2 모음곡 - 발레 음악 3부에서 발췌해서 편곡한 3곡의 음악

3부의 내용이 다프니스가 목신 판의 도움으로 해적들에게서 클로에를 구해내고 여러 장애물을 극복한 두 사람이 결혼한다는 스토리인데, 라벨은 이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음악을 골라 발췌 편곡했다. 제 2모음곡은 자주 연주되는 관현악곡으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1곡 - 해돋이(Lever du jour)

일출의 순간을 묘사한 음악이 매우 아름답다. 섬세하고 우아한 동시에 나른하면서 관능적인 감각이 매우 돋보인다.

2곡 - 팬터마임(Pantomime)

목신 판이 님프 시링크스에게 구애했던 것을 회상하는 장면에서 연주되는 음악으로 목신 판은 오보에가, 요정 시링크스는 플루트가 묘사하고 있다. 음악이 고조됨에 따라 다프니스와 클로에의 사랑의 열정을 느낄 수 있고, 흥겨운 선율과 함께 펼쳐지는 무용수들의 춤들이 매우 아름답다.

3곡 - 모두의 춤(Danse generale)

발레의 마지막 장면으로 다프니스와 클로에의 결혼식 장면을 묘사한다. 클라리넷이 주제 선율을 시작하면 5/4박자의 독특한 리듬의 춤곡이 펼쳐진다. 점차 분위기가 고조되면 현악 파트가 기쁨이 흘러넘치는 환희의 주제를 연주한다. 음악은 더욱더 절정을 향해 몰아치고, 다프니스와 클로에의 사랑의 주제가 다시 한 번 반복된다. 두 사람의 열정적인 사랑의 기쁨이 원시적인 신비로운 분위기 속에서 모두에게 축복을 받는다.

라벨의 제 2모음곡이 수록된 음반
<다프니스와 클로에> 전곡이 수록된 음반


https://youtu.be/14OM6Ysnk6M?si=_ldbsvkLU7jonHMc

다프니스와 클로에의 제 2 모음곡


https://youtu.be/R8RjYT5CLe8?si=eazEa7T7MP4FaYKS

다프니스와 클로에 전곡, 영상 속 조명까지도 작품 전반에 환상적인 분위기를 더해준다.



아래 사진은 벤자민 마일필드 안무, 파리 오페라 발레단 공연의 <다프니스와 클로에>



작품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

1912년 디아길레프가 라벨의 음악을 최종적으로 완성된 곡을 들었을 때 그는 음악에 대해 의혹을 나타냈고 라벨 또한 포킨의 안무를 미심쩍어 했다. 공연은 곧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하필이면 그 무렵 니진스키가 발레 뤼스의 상임 안무가로서 첫 작품인 <목신의 오후>를 공연하기로 예정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프니스와 클로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여겨졌다. 당시 발레 뤼스 관리인이었던 세르게이 그레고리예프의 증언에 의하면 라벨의 음악이 덜 진보적이었다면 디아길레프는 이 작품을 기꺼이 포기했을 거라고 했다. 또한 그레고리예프는 음악과 장치, 의상, 안무가 모두 매혹적이었음에도 이 발레에는 어떤 심술 궃은 운명이 걸려있던 것처럼 보인다고 술회하였다.

결국 <다프니와 클로에>는 시즌 끝에 가서 공연되었지만 이미 라벨은 기분이 상했고 포킨이 특별한 애착을 가졌음에도 발레단의 레퍼토리에서 삭제되었다. 니진스키가 다프니스 역으로 이 작품의 초연을 공연했으나 자신의 안무작인 <목신의 오후>에 너무 몰입해 있는 바람에 이 작품에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고 한다.


발레 작품 감상 후기

발레 <다프니스와 클로에>는 이후 프레데릭 애슈턴이 재안무해서 자신의 뮤즈인 마고 폰테인을 클로에 역으로 런던 코벤트 가든에서 공연을 한 바 있다. 이후 여러 안무가들이 이 작품을 재안무한 버전이 있긴 하다. 개인적으로 벤자인 마일필드가 안무하고 파리 오페라 발레단이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에서 공연한 <다프니스와 클로에>만 전막 감상을 했다. 이 작품에서 다프니스 역에는 에르베 모로, 클로에 역에는 오렐리 뒤퐁이 출연했다.

발레 뤼스 관리인이었던 세르게이 그레고리예프가 술회한 것처럼 이 작품은 지금도 무슨 심술궂은 운명에 걸린 것처럼 음악은 너무나 매혹적이고 환상적으로 아름다운데, 발레 작품은 여러 버전이 있음에도 뭐하나 유명한 게 없다. 음악이 워낙에 아름다워서 안무도 아름다운 춤선만 만들어지는데도 발레 작품 자체가 그리 재미있지가 않다. 발레 작품보다 음악이 훨씬 아름답고 돋보이는 작품이다. 발레 작품이 유명하지 않고 재미가 없다고 해서 음악을 안 듣기에는 음악이 너무 아깝다. 이 작품은 발레 영상은 유튜브에서 짧게 올라온 것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대신에 너무나 아름다운 발레 음악만큼은 절대로 놓칠 수가 없다. 작곡가가 음악에 마법을 부린 것처럼 오케스트라의 음향과 색채감이 너무나 신비롭고 환상적이다. 작품 전반에 작곡가가 펼쳐놓은 음향의 질감과 은유적인 묘사는 감상자로 하여금 원시적이고도 신비스러운 황홀감에 빠지게 한다.



참고 및 인용한 문헌

<라벨 다프니스와 클로에>, 네이버 지식백과, 음악세계 & 음악사연구회(사)

<발레에의 초대>, 이덕희, 현대미학사


사진 출처 : 핀터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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