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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 서연 Aug 24. 2024

늦여름에 펼쳐진 한여름 밤의 꿈

서울시 발레단 <한여름 밤의 꿈>

<호두까기 인형>, <백조의 호수> 만큼은 아니어도 프레데릭 애슈턴, 조지 발란신 등 은근히 안무가들에 의해 재창조되고 요정발레의 표본으로 군림하고 있었던 발레 <한여름 밤의 꿈>. 셰익스피어의 원작 자체가 연인들의 사랑 이야기이면서도 요정들의 마법과 같은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연인들의 사랑이 어긋났다가 바로 잡히는 사랑의 희비곡선을 그리기 때문에 낭만주의의 감성을 가진 발레 작품이었다. 이렇게 초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발레 작품이 다시 소환되었다. 바로 한국의 안무가 주재만에 의해서 기존의 깃털같은 느낌은 해체되고 파격과 혁신으로 재창조되어서 말이다.


기존의 작품을 끊임없이 해체했기 때문에 발레 음악 역시 멘델스존의 <한여름 밤의 꿈> 대신에 슈만의 피아노곡들과 가곡들, 현대 음악가 필립 다니엘의 음악들로 구성했고, 원작에서 사랑의 묘약의 시초인 마법의 꽃즙을 잘못 발라 사랑의 작대기를 잘못 그었던 장난꾸러기 요정 '퍽'은 주재만 안무가에 의해서 '사랑'이라는 감정과 형태를 관찰하고 사유하는 초월적인 존재로 업그레이드 되었다. 즉 서울시 발레단의 <한여름 밤의 꿈>은 슈만의 음악과 필립 다니엘의 피아노곡으로 '사랑'이라는 주제를 은유적, 철학적으로 표현한 또다른 낭만주의 감성을 품고 있는 컨템포러리 발레 작품이다.


1막의 프롤로그에서 요정 퍽은 꿈 속의 세계로 안내하면서 여정을 통해 다양한 사랑의 감정과 형태를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이때 슈만의 곡들은 '사랑'이라는 감정의 여러가지 이미지와 색깔이 되어 영상 예술, 설치 미술, 무대 조명 등과 함께 어우러지면서 '발레'라는 이름의 모든 장르로 표현된 사랑의 프리즘이 되었다. 음악의 운율은 사랑에 관한 양가감정, 상처, 부풀어 오르는 마음 등 사랑의 감정에 따라 컨템포러리 댄스가 되기도, 모던 발레로 표현되기도, 낭만주의 감성을 품은 네오클래식 발레가 되기도 하면서 발레의 장르와 경계를 넘나드는 무용수들의 춤선으로 출렁였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이 낭만적이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사랑으로 인해 상처받은 마음은 파격적인 현대음악과 함께 격렬한 춤사위가 되었다. <봄의 제전>을 연상케했던 격렬한 춤사위는 반복되는 춤의 패턴이 있었음에도 무의식 안에 쌓여있던 분노의 표출로 보였다. 어째서 사랑의 감정이 분노로 바뀌기도 하는 걸까? 안무가는 요정 '퍽'을 통해 슈만의 교향적 연습곡 중 5번 변주곡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2막은 이런 사랑도 있고, 저런 사랑도 있는 사랑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보여주었다. 슈만의 음악이 품고 있는 감정의 스펙트럼에 압도되지 않으면서도 안무가 자신이 해석한 음악성에 일구어낸 춤의 언어들은 눈을 뗄 수 없을만큼 환상이었고 작품의 몰입도를 높였다. 특히 라라랜드를 연상케 하는 무대 연출을 배경으로 슈만의 환상소곡집 중 'In der Nacht'의 애절한 음악으로 빚어낸 사랑의 춤(별이 빛나는 밤)은 로맨틱했다. 2막의 엔딩장면은 필립 다니엘의 감미로운 라이브 연주에 무용수들의 퍼포먼스로 이루어졌었는데, 여기에서 주재만 안무가의 뛰어난 음악성을 다시 한번 느꼈다. 전반적으로 춤을 참 잘 만드시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당스데꼴이라는 엄격한 규칙을 지켜야하는 고전 발레는 무용수 개인의 감정을 자유롭게 표출할 수는 없다. 음악에 담긴 감정들을 표현하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클래식 발레가 요구하는 규칙 안에서만 허락이 된다. 그리고 클래식 발레가 전달하는 감정 표현이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를 보완하는 발레 마임이 언제나 바늘과 실처럼 따라다닌다. 여기에서 반발하면서 나온 무용이 현대 무용이고, 이후에 발레계에서도 조금 더 다양한 움직임을 추구하고자 등장한 장르가 모던 발레이다. 고전 발레의 우아함을 추구하되 플롯을 없앤 장르가 네오클래식 발레이고, 비현실적인 감정을 표현하기보다 지금 여기의 감정을 표현하고자 등장한 장르가 드라마 발레이다. 그러나 이 장르의 발레들은 모두 발레의 정체성을 지키고 있다.


하지만 컨템포러리 발레는 그야말로 자유롭고 파격적인 춤사위 때문에 육안으로 봤을 때는 컨템포러리 발레와 컨템포러리 댄스를 구분하기가 쉽지가 않다. 이를 구분하는 것은 무용수들의 훈련 과정으로 알 수 있다. 그 훈련 과정에 클래식 발레 테크닉으로 무용수들의 신체를 단련하는 '발레 클래스'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구분하면 된다. 결국 무대 위에서 고전 발레 테크닉을 파격적으로 해체한 컨템포러리 발레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발레의 역사를 지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보이지 않는 곳에서 발레의 역사를 이고 지고 가는 컨템포러리 발레는 겉모습은 아주 혁신적이고 파격적이기 때문에 고전 발레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낯선 장르인 것만은 사실이다. 발레를 취미로 배운다고 했을 때 우리가 배우는 것은 당스데꼴을 철저히 지켜야 하는 클래식 발레이지 모던 발레, 컨템포러리 발레를 배우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 역시 컨템포러리 발레는 무척 낯설다. 그러나 고전 발레를 잘 알고 있기에 컨템포러리 발레를 보면서 왠지모를 해방감을 느꼈다.


국내 최초로 창단된 컨템포러리 발레단인 서울시 발레단. 사전 공연으로 <봄의 제전>을 했고, 창단 첫 공연으로 <한여름 밤의 꿈>을 세계 초연했다. 한국 발레의 역사적인 사건에 나도 함께 했다는 벅차오르는 감동을 느꼈다. 그리고 기량이 출충한 세계적인 무용수들은 계속 나오는 반면 안무와 같은 창작에서 빈약한 한국 발레의 현실을 생각할 때에 이러한 역사적인 사건들은 정말 반가웠다. 세계 초연한 이 작품은 앞으로 어떻게 변화되어 뻗어나갈까. 드디어 국내에도 이식한 컨템포러리 발레가 무럭무럭 자랐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고전 발레에 대한 색안경을 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등 여러가지 생각을 했다. 원래 한쪽에서는 역사를 지키고 다른 한쪽에서 혁신을 시도한다. 발레가 엄격하게 당스데꼴에 의해 발레 훈련을 시켜야 그에 대한 반동으로 창의적인 예술가들이 나온다는 발레 역사가 제니퍼 호먼스의 생각에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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