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발레에 뿌리를 두고서 안무가 자신의 자의식과 미국 문화가 융합된 발란신 메소드. 그의 작품들을 보면 미국 스타일과 안무가의 개성이 융화된 것을 느낄 수 있다.
<호두까기 인형> 2막 "사탕 요정과 프린스의 파드 되"에서도 "앙트레(그랑 파드 되의 시작을 알리는 무용수들의 준비 자세)"가 다른 메소드와 다른 미국만의 스타일이니 무용수들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준비자세를 어떻게 하는지 러시아 발레 등과 비교해보면 재미있다.
선율 중심의 추상 발레의 대가 발란신도 고전발레에서는 디테일을 제외하고는 많은 부분에서 러시아 발레, 클래식 발레의 형식에 뿌리를 두고 있다. 파드 되를 추다가 발레리나가 멋진 발레 피규어를 보여주고 있고, 발레리노는 발레리나의 춤과 실루엣이 잘 돋보이도록 보조를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확장된 에너지로 가급적 땅보다는 천상에 닿으려고 하면서 발레리나를 천상의 이미지로 만들기 위해 발란신은 발레리나들의 파트너로 덴마크 출신의 발레리노들을 선호했다. 개성이 부각되기 보다는 절제를 배웠던 덴마크 출신의 발레리노들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 프렌치 메소드와 부르농빌 메소드가 상체 표현을 가장 절제하는 발레 교육법이다. 프랑스 발레에 가장 영향을 많이 받았던 부르농빌 스타일은 표현을 절제하는 법을 가르친다고 한다. 거의 순도 100퍼센트로 오염되지 않은 부르농빌 메소드는 옛날 옛적 프랑스 발레 스타일을 간직하고 있다. 오늘날의 프랑스 발레는 루돌프 누레예프가 예술감독으로 재직하면서 재정립한 메소드이다. 그럼에도 프렌치 스타일 역시 상체를 절제해서 표현한다.**
발란신의 자의식이 들어간 안무를 추는 발레리나의 회전 동작을 감상하는 것이 감상 포인트이다. 특히 발레리나가 마네주를 돌 때에 파드샤(고양이 점프)를 하면서 회전하다가 4번 포지션으로 매우 큰 폭의 피케턴을 회전하는 모습에서 발란신이 그만큼 빠른 회전 속도를 추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파드 되에서도 발란신이 무척 좋아했던 쏘드 샤 점프가 어김없이 나온다.
https://youtu.be/9cSk6rGt504?si=mi6iR_8QR6eeXTGm
발란신 메소드에서 손 포지션은 무척 독특하다. 부드러우면서도 귀엽다. 이런 손 포지션을 몸에 새기기 위해 고무공을 쥐고 약 2년간 훈련받는다고 한다. 오늘날 영상을 통해 발란신 춤이 알려지면서 다른 나라의 발레인들이 이런 손모양을 따라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발란신의 제자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손 포지션을 따라하는 모습이 "눈에 거슬려요."
그래서 그런지 미국의 발레인들은 발란신 스타일을 꽁꽁 봉합한 채 공개하기를 꺼려한다. 그리고 옛날 옛적 자신들이 스승에게 배웠던 그 춤 그 느낌 그대로 후배들에게 전수하려고 하고 있다. 미국 발레가 이렇게 공개가 안 되니 의외로 한국에서 미국 발레에 대한 인식이 낮다. 공격적으로 마케팅하는 영국 발레와는 사뭇 다른데, 그럼에도 전세계의 인재들이 미국으로 몰려들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나보다. 어쨌든 이런 미국 발레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미국인들이 의외로 보수적이라더니 융통성도 없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렇게 스승의 가르침을 보호하고 후배들에게 그대로 전달하려고 헌신적으로 노력하고 있음에도 발란신의 제자들은 절망하고 있다.
"우리는 발란신같은 분위기나 힘이 없죠."
"아무리 노력해도 발란신의 발레는 퇴색해요."
어느 무용수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할수만 있다면 발란신에게 묻고 싶어요. 제가 발란신의 정신을 제대로 전하고 있는지."
그런데 미국의 발레인들이 너무 자책하지 않았으면 한다. 같은 메소드라도 무용수의 이미지, 체형 등에 따라 다르게 발현된다. 특히 발레는 스토리텔링의 예술이기 때문에 같은 메소드여도 기르치는 선생님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예를 들어 똑같은 바가노바 메소드를 배워도 러시아인들과 한국인들은 다를 수 밖에 없다. 특히 나처럼 키작은 한국인은 러시아인들보다 더 에너지를 확장해서 써야 한다.
이번에 사탕 요정 베리에이션을 바가노바, RAD, 발란신 메소드별로 감상하고 정리하면서 피지컬도 중요한 바가노바 메소드는 러시아 무용수들처럼 팔, 다리 길고 얼굴도 작고, 뼈 위에 근육만 붙은 체형이 아니고서는 느낌 내기가 힘들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오히려 발란신, RAD 메소드가 다양한 사람들이 취미로 배우기에 좋은 메소드라는 생각이 들었다. 발란신, RAD 메소드 역시 난이도 최강이지만 적어도 발레 체형 때문에 스트레스 받을 일은 바가노바 메소드보다는 덜 할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