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러시아, 영국 "레이몬다"
*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
초연 안무 : 마리우스 프티파
작곡가 : 알렉산더 글라주노프
초연 날짜 : 1898년 1월 19일
지휘 : 리카르도 드리고
*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
개정 안무 : 알렉산더 고르스키
초연 : 1900년 2월 5일
* 발레 음악 <레이몬다>의 작곡가 '글라주노프'
마리우스 프티파가 노년에 80이 넘은 나이에 야심차게 만든 대작이다. 차이코프스키와 이미 3번이나 협업했던 그는 이 작품을 만들 당시에 이미 차이코프스키는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차이코프스키처럼 유능한 작곡가를 물색했다. 그래서 찾은 작곡가가 바로 알렉산더 글라주노프였다.
글라주노프는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제자로 당시에는 촉망받는 음악가였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제자들을 가려서 받았기 때문에 재능이 뛰어난 음악가들만이 그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제자로 프로코피예프와 스트라빈스키가 매우 유명하지만 당대에는 글라주노프 역시 유능하고 촉망받는 작곡가였다. 이처럼 신동 소리를 듣던 글라주노프는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면서 그의 음악 인생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그럼에도 아름다운 선율을 잘 뽑아낸 덕분에 젊은 나이에 지휘자 데뷔,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장까지 지내면서 러시아 음악의 중심에 우뚝 섰다. 붉은 혁명 이후에는 소련으로부터 인민 훈장까지 받았다. 그러나 오늘날에 글라주노프는 그냥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한 작곡가 정도로만 알려져있다.
* 전체 3막 <레이몬다> 줄거리
작품 배경 : 중세시대 헝가리, 십자군 전쟁
등장 인물 : 헝가리 왕 앤드류 2세, 브리안(십자군 기사), 레이몬다(브리안의 약혼녀), 압둘라 흐만(사라센의 지도자, 레이몬다에게 반하다)
줄거리 :
1막
브리안은 헝가리 왕 앤드류 2세와 함께 십자군 원장을 떠난다. 브리안은 참전하기 전 사랑의 징표로 레이몬다에게 하얀 베일을 선물한다. 레이몬다는 전쟁터로 떠난 연인을 그리워하며 아련한 선율이 심장을 파고드는 하프 선율과 함께 하얀 베일로 그리움의 춤선을 그린다. 그러다가 잠이 든 레이몬다는 꿈 속에서 연인 브리안을 만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행복한 시간도 잠시. 갑자기 낯선 인물이 등장해 그녀를 납치하려고 한다. 놀란 레이몬다는 그 자리에서 기절한다. 행복했던 꿈이 악몽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2막
레이몬다가 거처하는 도리스성으로 피신한 사라센의 지도자 압둘라 흐만은 레이몬다를 보자마자 한 눈에 반한다. 온갖 금은보화로 그녀를 유혹하면서 구애하지만 그녀가 완강하게 거부하자 압둘라 흐만은 그녀를 납치하려고 한다. 그 순간에 앤드류 2세와 브리안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고, 앤드류 2세는 결투로 승부를 겨누라고 명한다. 브리안과 압둘라 흐만은 치열한 칼싸움을 벌이고, 결국 브리안이 승리한다.
3막
특별한 줄거리가 없지만 작품 <레이몬다>는 3막이 가장 재미있다. 3막의 음악이 가장 재미있고 연주기법을 표현한 발레 동작들이 가장 재미있기 때문이다. 유난히 스타카토, 피치카토가 많이 나오며 레가토, 악센트, 테누토, 아첼레란도 등 음악의 아티큘레이션들이 발레 동작으로 그대로 표현되고 있는 게 정말 재미있다. 또한 스페인 춤과 함께 작품의 배경이 되는 헝가리 민속 춤 차르다시 등에서 차용한 춤동작들이 나오며 이 작품의 시그니처 동작인 독특한 발레 포즈들이 3막에 나온다. 손뼉을 친 후 한 손은 머리에, 한 손은 골반 즈음에 대는 동작이다.
또 양팔을 크로스한 동작 역시 이 작품에서 유명한 발레 동작이다.
* 파리 오페라 발레단
개정 안무 : 루돌프 누레예프
공연 : 2008년 파리 오페라 하우스
출연 : 마리 아녜스 지요(레이몬다), 호세 마르티네즈(브리안), 도로테 질베르(레이몬다 친구를 비롯한 다양한 디베르티스망에 등장)
누레예프가 서방에 등장하기 전까지 유럽인들은 <레이몬다> 작품의 존재 자체를 몰랐다. 누레예프가 서방에 제일 먼저 알린 작품이 바로 이 작품이었던 것.(로열 발레단이 공연) 그 뒤부터 유럽의 발레단들에서도 이 작품을 종종 무대 위에 올린다.
한국에서도 발레인들에게 레이몬다는 유명한 작품이다. 그런데 1막의 하프 베리에이션과 3막의 그랑 파드 되 중에서 브리안과 레이몬다의 베리에이션이 친숙하다는 것이지 <레이몬다> 전막을 감상한 경우는 별로 없다. 사실 이 작품은 굳이 전막을 안 봐도 되는 작품이다. 궁금하면 바로 위에 적은 베리에이션들만 찾아서 봐도 충분하며 좀 더 궁금하신 분들에게는 3막을 추천한다.
2008년에 파리 오페라 하우스에서 공연한 영상물에서 가장 빛나는 발레리나는 주연이 아닌 여러 배역을 맡아 바쁘게 출연했던 도로테 질베르이다. 보통 직급이 낮은 무용수들이 한 작품 안에서 여러 장면에 나오거나 디베르티스망을 추는데, 그녀가 지금은 에뚜왈인 이유를 알 정도로 그녀의 춤은 시선을 잡아끌었다. 도로테 질베르는 매번 작품마다 비록 조연으로 출연했더라도 감상자의 눈을 사로잡은 발레리나였고, 현재 에뚜왈인 그녀의 춤은 언제나 믿고 본다.
(이 문단부터는 개인적인 생각이 많이 포함되어 있음을 미리 밝힙니다. 읽고 참고만 하시면 됩니다.) 아쉬운 점은 역시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무대 디자인과 발레 의상인데, 레이몬다 3막이 온통 붉은 색인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황금빛 아니면 붉은색이라니...프랑스가 유럽의 중국이라는 별명이 있던데, 진짜인가봐 이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지난 파리 올림픽 개막식을 보다가 조용히 굳이...런던 올림픽 개막식을 찾아서 본 뒤부터는 프랑스인들의 미적 감각에 대해서 상당한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과거 프랑스인들의 미술 감각이 뛰어났던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날에도 그럴까하는 의심과 함께 오히려 영국인들이 훨씬 색채를 감각적으로 사용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미술사를 보면 위대한 프랑스 화가들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영국도 과거부터 그림 잘 그리고 뛰어난 색채 감각을 보여왔으니(레이놀즈, 게인즈버러, 터너, 라파엘전파, 유미주의, 영국 미술 공예 운동 등등) 미술사학자들은 근대 이후부터 20세기까지의 프랑스 중심의 미술사관을 다시 한 번 생각해주었으면 좋겠다. 정치사처럼 미술사나 음악사 역시 패권에 의해 입김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일찍이 유럽 패권을 장악했던 프랑스와는 달리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부터 서서히 기틀을 잡기 시작하면서 빅토리아 여왕 시대가 되어서야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은 춤을 정말 잘 춘다. 역시 춤 DNA가 타고났다. 중세 시대에 흑사병이 창궐했을 때에도 춤을 췄던 프랑스인들의 후예답다.
* 볼쇼이 발레단
개정 안무 : 유리 그리고로비치
출연 : 올가 시미르노바(레이몬다), 아르테미 벨야코프(브리안)
레이몬다의 내용 자체가 매우 클리셰한데다 중세시대, 헝가리 귀족, 십자군 전쟁이라는 배경이 한국인들한테는 그다지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는 설정은 아니다. 그래서 한국의 발레단들이 이 작품을 레파토리에 넣지 않고, 주요 베리에이션들만 전공반 학생들의 입시 또는 콩쿠르 작품으로 사용하거나 취미 발레인들이 배우는 정도로만 사용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다지 재미있는 작품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볼쇼이 발레단의 레이몬다는 발레의상과 무대 디자인이 훌륭하니까 지루할 틈이 없었다. 역시 옷이 날개라고 의상이 한 몫했다. 러시아 발레는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다. 무용수들의 비주얼, 춤실력, 음악적인 표현력, 오케스트라단의 연주, 무대 디자인,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튜튜. 덕분에 한 동안 박스선에 머물렀던 러시아 발레에 대한 애정에 산타랠리가 오면서 상승빔을 쏘아주었다.
게다가 주연 무용수들도 작품 줄거리에서 쏙 빠져나온 것 같은 외모들을 지녀서 더욱 작품에 몰입을 할 수 있었다. 레이몬다의 라이트모티프가 1막의 하프 베리에이션에서는 아련하고, 그 중간에는 로맨틱한 선율이 나오며 3막의 베리에이션에서는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묘사하기 때문에 오렐리 뒤퐁, 마리 아녜스 지요처럼 선이 굵고 풍채가 좋은 발레리나들보다도 올가 시미르노바, 스베틀라나 자하로바처럼 여리여리한 발레리나들이 더 잘 어울린다.
아름다운 러시아 발레리나 올가 시미르노바가 출연한 영상물을 감상했다. 정말 아름다운 발레리나이다. 그녀는 몇년전에 네덜란드 국립발레단으로 이적했는데, 사진을 찾아보니 더치 나라에서도 레이몬다를 추었다.
모든 게 만족스러웠던 볼쇼이의 레이몬다.
마리우스 프티파의 초연 안무를 바탕으로 알렉산더 고르스키의 개정 안무를 후에 다시 개정한 유리 그리고로비치의 안무를 사용한 볼쇼이 발레단의 레이몬다와 루돌프 누레예프가 개정 안무한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작품을 감상했다. 그래서 두 개정 안무는 비슷한 부분도, 다른 부분도 있다.
개인적으로 네덜란드의 레이몬다는 정말 궁금하다. 여기도 조명, 무대 디자인, 튜튜 패턴 등 뭐하나 빠지는 게 없다. 네덜란드인들의 미술 감각이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 로열 발레단
개정 안무 : 루돌프 누레예프
로열 발레단 초연 : 1964년
레이몬다 3막 각색 버전 : 1969년 코벤트가든
내가 좋아하는 발레리노 바딤 문타기로프가 출연한 레이몬다를 감상하려고 하니 영상 길이가 약 38분. '그럴리가 없는데...'하면서 영상물 정보를 읽었더니
"누레예프가 자신이 키로프 발레단(현 마린스키 발레단)에서 레이몬다를 공연했던 기억을 되살려 1964년 로열 발레단에서 공연했다. 그 후 3막으로 각색해 1969년 코벤트가든에서 선보였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아쉬웠다. 문타기로프가 칼싸움하는 모습을 꼭 보고 싶었는데. 그래도 로열 발레단의 웅장한 무대 예술과 화려한 발레 의상과 어우러진 러블리한 춤선은 아쉬운 마음을 이내 잊게 해주었다. 로열 발레단의 발레 코디네이션은 정말 러블리하다. 아주 아주 사랑스럽고 예쁜 춤이다.
무엇보다도 레이몬다 역의 나탈리아 오시포바. 근육전사, 운동선수 이미지로만 보여서 그녀의 춤을 보기 전까지는 항상 의구심을 가진다. 그러나 막상 그녀가 춤추는 모습을 보는 순간 그런 의구심은 언제나 눈녹듯이 사라진다. 이번에도 음악을 타면서 신들린듯이 춤추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앞으로는 도로테 질베르처럼 믿고 보기로 했다.
클래식 튜튜의 패턴과 스커트 형태가 러시아와 유럽이 많이 다르다. 나라별 레이몬다에서도 확실히 느꼈다. 러시아인들이 튜튜 디자인을 참 잘한다. 색감도 잘 쓰고 색채 조화도 전체적으로 어우러지게 사용한다. 패턴은 꼭 필요한 요소만 깔끔하게 넣어 포인트를 살린다. 유럽은 전반적으로 러시아에 비해 화려한 패턴을 좋아하는 듯하다. 선호하는 패턴과 디자인이 러시아와 유럽인들이 다른 듯 하다. 미의 기준이 다른 듯 하다.
레이몬다를 기준으로 러시아의 클래식 튜튜는 팬케이크 튜튜이다. 치마 밑단을 지나치게 풍성하게 사용하지는 않는다. 영국과 프랑스는 우산처럼 처진 엄브렐라 튜튜이고 영국에 비해 프랑스식 튜튜가 치마밑단이 풍성하다.
레이몬다는 잘 안보는 작품이지만 이번 기회에 날 잡고 감상했다. 비록 영상물로만 로열발레단의 무대 예술을 접했지만 로열발레단 덕분에 시야가 넓어졌다. 로열발레단의 무용수들의 신체조건은 대체로 인간적인 체형을 지닌 무용수들이 많다. 그러나 뛰어난 피지컬이 아닌 인간적인 체형으로도 저렇게 발레를 아름답게 출 수 있다는 것을 로열발레단이 깨닫게 해주었다. 발레는 비주얼 예술이라는 공식에서 생각을 바꾸게 해준 발레단이다.
참고 문헌
나무위키 : 알렉산더 글라주노프, 림스키코르사코프
위키백과 : 레이몬다 탄생 배경
사진출처
핀터레스트, 로열오페라 하우스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레이몬다
https://youtu.be/EDIaW_t6IYE?si=pXK3K6jWP8DqLwLf
https://youtu.be/bzumYHgRayA?si=Yeoohg_3Fuw08VLi
볼쇼이 발레단의 레이몬다
영상 1은 앞부분 25분 정도 건너뛰어서 보시면 됩니다. 그 중간에도 광고가 많이 나오니 그 부분도 건너뛰시면 됩니다.
https://youtu.be/Az001JxYMCI?si=3Eah_bIj9-yPWFj1
https://youtu.be/-Zoq9UYPcVQ?si=Qh5ngvY-8IuYnnm_
로열발레단의 레이몬다
https://youtu.be/_KMtfXXthhA?si=dGhQzYzeQSevfzzX
https://youtu.be/ojbsyz5h_0c?si=zwU6YiIcmvxRGsXr
https://youtu.be/g6MEm2IxyUE?si=PfiNeS2KR1nNpwx1
함께 읽으면 좋은 글
https://brunch.co.kr/@1645b8e591c6476/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