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아트릭스 포터의 <피터 래빗 이야기>
딸아이가 어릴 때 베아트릭스 포터의 동화책을
읽어주려고 번역본을 샅샅이 찾았지만 아류작만 있었을 뿐 당시 국내에는 제대로 된 번역본이 없었다.
그래서 오디오 CD가 수록되어 있는 원서를 사서
딸아이에게 보여주었고, 베아트릭스 포터가 수채화를 그리고 동물들을 관찰하면서 동화를 쓰는 실사 영화와 포터의 동화 속 주인공들이 만화영화의 주인공이 된 장면들이 합쳐진 애니메이션 DVD(영어 더빙)를 구입해서 보여주었다.(이후 원서와 dvd는 영어를 좋아하는 지인에게, 즉 지인의 딸에게 물려주었다)
"딸아이가 동화를 잊은 나이로 자라서도
동화를 잊지 못했던 나는 이후에도
포터의 번역본이 나와있는지 생각날 때마다 검색했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비록 번역본은 아니지만
포터의 일생과 스케치, 작품 배경이 설명되어 있는
<피터 래빗의 정원>이 나와있는 것을 보고
바로 구입해버렸다.
그리고 시간이 또 한참 지나
드디어 작년에 베아트릭스 포터의 원작이
초반본 디자인으로 번역된 책이 나와있는 것을
보고 어찌나 감격했는지...
지극히 영국적인 동화책임에도
(수채물감, 펜과 잉크로 그려진 그림체와 영국의 자연과 풍습) 자그마한 동물들이 귀여운 주인공으로
나오니 전세계 어린이들이 이 동화에 마음이 사로잡힐만 하다.
게다가 동물과 식물 그림들이 너무나도 세밀해서
피터 래빗 동화처럼 이런 식으로 삽화와 이야기가
어우러진 동화책이라면 값비싼 세밀화 그림책 전집이나 자연 동화 전집이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과학적 호기심과 동화적 상상력을 지녔던 베아트릭스 포터
빅토리아 시대에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베아트릭스 포터는 매우 풍요롭게 자랐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의 교육을 담당하는 가정교사들이 여러 명이 있었을 정도였는데, 빅토리아 시대의 가정 분위기답게 부모 얼굴은 잠잘 시간이나 특별한 날에만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아버지와는 친밀했으나 어머니와는 살가운 모녀 사이는 아니었다. 이런 포터에게 동물들은 언제나 좋은 친구였다.
동식물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균류학, 화석 등 자연 과학에 소질을 보여 논문을 쓸 정도로 조예가 깊었으나 아무리 명문가 여식이라도 여자라는 이유로 학계에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비록 시대적 한계 때문에 식물학자가 되지는 못했으나 뛰어난 그림실력과 관찰력, 어른이 되어서도 간직하고 있었던 동심을 동화적인 상상력으로 풀어내는 동화 작가가 되어 남긴 이야기들이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어린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나는 새롭게 만드는 일은 못하겠어요. 그저 보이는 대로 따라 그릴뿐이죠."라며 포터가 한탄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애정어린 마음으로 직접 키운 동물들을 세심하게 관찰하면서 그린 동물 그림들은 귀여우면서도 인위적인 캐릭터가 아닌 살아숨쉬는 생생한 동화 속 주인공들이 되었다.
동화를 출판할 때에도 어린아이들과 "꼬마 토끼"들이 사서 읽을 수 있을 정도의 가격을 유지하는 데에 노력을 기울였다는 포터는 자신의 농장을 찾아오는 꼬마 친구들에게 동화적 상상력을 가미해서 키우고 있는 토끼들이 피터 래빗의 후예들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느꼈다. 포터가 어린이들에게 동화적인 상상력을 불어넣으면서 했던 대답에서 오히려 그녀의 진솔한 마음과 거짓없는 순수한 마음, 어린이들을 배려했던 따스한 감성을...
포터의 예리한 눈썰미와 정교한 선과 색채로 이루어진 그림은 유명 화가들의 작품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자연 생태계와 상상력, 영국인 특유의 섬뜩한 감성과 풍자가 어우러진 영국적인 동화
인간하고 친숙한 자그마한 동물들이 동화 캐릭터로 등장하면 아이들은 동화 내용을 쉽게 받아들인다. 쥐와 도마뱀과 같은 다소 협오스러운 동물들도 동화의 주인공이 되면 이내 친근감을 느끼게 된다. 게다가 포터의 동화에 나오는 동물 캐릭터들 중 호기심 많은 토끼와 장난꾸러기 고양이 톰 키튼의 모습은 아이들의 습성과도 닮아 있어서 어린이들이 자신과 쉽게 동일시 할 수 있다.
포터의 동화에 나오는 동물들은 모두 의인화되어 인간처럼 옷을 입고 말하고 생활하지만 다른 동화책의 동물 삽화나 애니메이션의 동물 캐릭터와는 달리 인위적인 모습이 아닌 자연의 모습 그대로이다. 그래서 동화 속 토끼의 털이 실제 토끼의 털처럼 한 올 한 올 생생하며 뒷다리로 힘차게 점프하는 개구리와 고양이가 우아한 자태로 앉아있는 모습 등과 같이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진짜 동물들처럼 살아숨쉬고 있다.
빅토리아 시대에 상류층 집안에서 태어난 포터는 상류사회에는 관심이 없는 조용한 성격이었다. 인간관계보다는 동물들에게 관심이 많았던 그녀가 그린 그림들을 보면 확실히 인간을 그린 그림보다 동식물 그림들이 훨씬 자연스럽고 생생하다.
뛰어난 관찰력과 그림 실력, 과학적 호기심을 바탕으로 동화적 상상력을 불어넣어 지어낸 그녀의 동화에도 자연스럽게 영국인 특유의 섬뜩한 감성과 여러 인간군상에 대한 풍자가 녹아있다.
(p. 8)
어느 날 아침, 엄마 토끼가 말했습니다.
"우리 귀염둥이들, 들판이나 오솔길에서는 마음껏 놀아도 돼. 하지만 맥그레거 아저씨네 정원에는 절대 들어가면 안 된다. 너희 아빠도 맥그레거 아저씨한테 잡혀서 파이 속으로 들어가시고 말았잖니."
(p. 201~202)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제미마(오리)가 다음날부터는 알을 품고 앉아 있어야겠다고 말했어요.....(중략)
"부인,...(중략) 그 전에 내가 요리를 하나 해드리지요. 우리끼리 파티나 한번 하는 게 어떨까요?" 갈색 수염 아저씨(여우)가 공손하게 말했습니다. "맛있는 오믈렛을 만들어 드리고 싶은데, 실례가 안 된다면 농장 정원에서 채소를 좀 가져다주실 수 있습니까? 깻잎괴 꿀풀, 박하와 양파 두 개 그리고 미나리를 좀 가져다주세요. 고기는 제가 준비하죠, 부인."
제미마 퍼들 덕은 자신이 품을 알이 오믈렛이 되고 자신이 따올 채소와 함께 오리구이가 될 운명이 될 지도 모른다는 것을 전혀 의심하지 않고 순진하게 여우 아저씨가 시키는대로 농장에 가서 채소를 따온다. 이처럼 포터는 동화 속에서 제미마 퍼들덕 이야기를 통해 잘 속는 사람과 그걸 이용하는 인간의 모습, 말썽꾸러가 고양이 톰 키튼의 엄마 고양이를 통해 일반적인 엄마들의 모습을 재치있게 풍자했다.
https://youtube.com/shorts/NMby7IFhoho?si=kAnrrmWWabKkhfX-
본문에 인용한 동화 내용과 문헌
* 베어트릭스 포터의 사랑스러운 스케치북 <피터 래빗의 정원>, 베아트릭스 원작, 에밀리 잭 외 지음, 김현수 옮김, 생각정거장
* The Tale of Peter Rabbit By BEATRIX POTTER, 구자연 옮김 ,더 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