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북이긴 하지만 덕후들은 왠만큼 다 봤을 이 영화를 나는 엘지유플러스 덕분에 이제서야 봤다. 마침 올해가 모리스 라벨 탄생 150주년인데, 한국에서 4월 30일에 개봉했으니 그 시기가 딱 맞아 떨어진 거였다. 제목은 <볼레로 : 불멸의 선율>인데, 제목과는 다르게 라벨을 입체적으로 다룬 영화였다.
평소 라벨의 음악을 좋아하는 나는 기대하고 봤는데, 기대 이상이었다. 별다른 대사가 없어도, 감정표현을 과하게 연기하지 않아도 이렇게 다 표현할 수 있다니, 이렇게 모든 것을 다 전달할 수 있다니 감탄했다. 창작의 고통으로 인한 라벨의 내적 갈등과 고뇌, 어머니와의 끈끈한 연결감,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 미시아를 향한 애틋한 감정, 드디어 세기의 걸작 <볼레로>를 탄생시켰지만 그 음악으로 인해 자신의 다른 곡들이 잠식당할까봐 자신이 창조한 음악인데도 음악가로서 가지는 양가감정, 그러면서도 작곡가로서 절대 꺾이지 않는 신념과 자신의 음악이 왜곡되어 해석, 연주되었을 때 분노를 표출하는 패기 등 "모리스 라벨"을 매우 다양한 각도로 바라본 영화여서 라벨이라는 작곡가를 더 잘 이해하게 되어서 좋았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음악 중의 하나인 <볼레로> 뿐만 아니라 라벨의 주옥같은 명곡들이 미술작품같은 영상미에 덧입혀져 은유적이고 함축적인 묘사를 더해주었다. 영화의 시작부터 재즈, 밴드음악, 클래식 등등 연주자라면 누구나 다 <볼레로>를 연주하고 싶어하고, 무용수라면 <볼레로>를 추고 싶어하는 것을 보여주면서 내용 전개에 따라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라 발스>, <그로데스크한 세레나데>, <밤의 가스파르>, <피아노 협주곡 G장조> 중 2악장 Adagio assai 등이 적재적소에 배치되었다. 뿐만 아니라 쇼팽의 왈츠 Op. 67 no. 2도 파티 장면에서 흘러나오니 선곡도 대단히 센스있게 한 영화이다.
매우 단순한 선율이지만 음향적인 입체감을 점점 더하면서 감정이 크레센도가 되어 카타르시스와 희열을 느끼게 해주는 라벨의 발레곡 <볼레로>. 이 중독성 강한 음악에 매료된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지만 정작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손상된 뇌로 인해 점점 창조자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죽어가는 라벨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담은 영화의 엔딩은 정말 여운이 남는다.
영화 감독이 라벨의 실제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실제로 이미 유명해진 작곡가, 음악계에서 굉장한 고인물이 된 라벨이 정작 '로마 대상'에서는 번번이 탈락해서 고배를 마시는 장면도 담았다. * 나중에 프랑스 정부에서 프랑스 음악계에 지대한 공헌을 한 라벨을 인정하고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하려고 했지만 라벨은 이 훈장을 거절했다. (나무위키 참조)
또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오른팔을 잃은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이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을 써달라고 의뢰했다는 내용도 영화에서 나온다. 그래서 라벨은 비트겐슈타인을 위해 진짜로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했지만 양손이 치는 것처럼 작곡한 음악의 난이도로 인해 정작 곡을 의뢰한 피아니스트는 너무 어려우니 쉽게 고쳐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라벨은 "단 한 개의 음도 고치지 않겠다."고 응수했다는데, 덕분에 오늘날 이렇게 빛나고 아름다운 곡을 그대로 들을 수 있으니 좋고 그런 라벨의 패기와 신념이 나는 좋다.
이다 루빈스타인을 위해 작곡한 발레음악 <볼레로>
https://youtu.be/N9Ceer_SfUU?si=pukvM7bM_jrM7iYF
https://youtu.be/SS_WJmLGFrA?si=sqpjW4c4VTFU27iT
안데르센의 <빨간 구두>가 생각날 정도로 광기어린 왈츠음악 <라 발스>
https://youtu.be/x-gTFySGxCQ?si=NfDRqwGdf0CLEHzA
https://youtu.be/aCGIbpUlgtc?si=ftwcvxw8EWahtpUb
https://youtu.be/veATnRK6DoA?si=bdma_oHhv8qSrWp1
https://youtu.be/UIXe7H52UkA?si=yYetbCyLM6mWCN9H
https://youtu.be/5WEB_uMqQyg?si=ltglW2AMR3FkolBb
https://youtu.be/W1hyEjZros8?si=D0xnokvPcLPwaJm0
은유, 함축적인 표현보다는 간결하고 명료한 표현을 더 좋아하는 나같은 애니어그램 4번 유형도 있다. 그래서 내가 '시'를 좋아하지도, 평소에 프랑스 영화를 선호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어쩌다 만난 프랑스 영화는 다 하나같이 길고 긴 여운을 남겼다.
많은 대사 없이도, 감정표현을 과하게 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다 표현하고 전달하는 프랑스 영화. 그 모든 것을 빛과 색채, 구도로 표현하고 담아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격한 감정표현 없이도 몰입감 높이는 프랑스 배우들의 연기력이 언제나 마음 속 깊은 곳에 울림을 준다. 영화든 발레작품이든 전반적으로 프랑스 예술가들이 연기를 참 잘한다.
https://brunch.co.kr/@1645b8e591c6476/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