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가 듣는 <백조의 호수> 음악은 대체로 오리지널 악보가 아니다. <듣는 발레 보는 발레 9화 - 백조의 호수, 끝없는 이야기> 에서도 썼듯이 차이코프스키는 그의 첫 발레 작품 <백조의 호수>의 초연에 실패한 것에 크게 상처를 받았다. 이후 차이코프스키는 <백조의 호수>가 초연에 실패하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운 발레리나 안나 소베슈찬스카야가 그의 발레 음악을 다르게 사용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했다. <백조의 호수> 중에서 '흑조 파드 되'의 음악과 안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발레리나 안나는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넘어가 이 부분의 음악을 루드비히 밍쿠스에게 부탁을 하고 안무도 새롭게 재구성하려고 했다. 이에 차이코프스키는 '분노의 파드 되'를 작곡했다.
결국 차이코프스키는 살아생전에 <백조의 호수>가 클래식 발레의 대명사로 탈바꿈되어 날아오르는 것을 보지 못했다. 차이코프스키 사후에 마리우스 프티파가 안무에 대대적으로 수정을 가하고 작곡가 드리고가 오리지널 악보에 손을 대면서 미운 오리새끼에서 아름다운 백조로 변신한 <백조의 호수>.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원전 악보에 접근하기란 쉽지가 않다. 그러니까 현재 대부분의 발레단에서 사용하고 있는 <백조의 호수> 중 '흑조 파드 되'는 발레리나 안나 소베슈찬스카야 때문에 차이코프스키가 분노의 혼을 담아서 작곡한 음악이고, 오리지널 '흑조 파드 되'는 차이코프스키 사후 잊혀졌다가 미국의 안무가 조지 발란신이 원전 악보에서 이 부분을 찾아내 안무한 발레 소품 <차이코프스키 파드 되>와 루돌프 누레예프가 개정한 안무를 사용하고 있는 파리 오페라 발레단 <백조의 호수>중 '흑조 파드 되'에서 부활했다. 따라서 오늘 올리는 발레 작품 <차이코프스키 파드 되>에 사용된 음악이야말로 오리지널 '흑조 파드 되' 음악이다.
잊혀질뻔 했던 오리지널 '흑조 파드 되' 음악을 발란신이 원전 악보에서 찾아내 매우 경쾌하고 아름다운 발레 소품으로 탄생시켰다. 클래식 발레의 '그랑 파드 되' 형식을 그대로 차용한 발란신의 <차이코프스키 파드 되>는 그가 안무한 작품답게 다채로운 방향 전환과 리드미컬한 음악적인 스텝, 현란한 연속 회전과 중력을 거스르는 공중 도약, 피쉬 다이브가 특징이다.
Viktoria Tereshikna and Vladimir Shklyarov in "Tchaikovsky Pas de Deux"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발레가 프랑스로 건너가 찬란한 꽃을 피우고 이후 덴마크, 러시아 등의 국가로 넘어가 각양각색의 매력을 가진 발레로 발전하였듯이 미국의 안무가 조지 발란신이 만든 <차이코프스키 파드 되>도 각 발레단에서 발란신 스타일에 저마다의 색채를 덧입혀 각자 개성을 살린 작품으로 재연출했다.
Yekaterina Krysanova and Andrey Merkuriev in "Tchaikovsky Pas de Deux"
**마린스키 발레단**
모든 발레 동작을 교과서적으로 구사하는 러시아 발레답게 발란신의 작품에서도 모든 동작들을 정확하게 다 보여주고 있다. 특히 아다지오 다음에 이어지는 박자가 빠른 남성 독무, 여성 독무, 코다 부분에서도 신체의 모든 에너지를 길게 사용하고 있다. 많은 동작을 보여주기보다 되도록 폴드브라와 시선, 하체의 근육을 늘이는 느낌으로 발레 동작을 하면서 관절의 가동범위를 최대한 넓혀 해부학적인 한계에 도전하는 춤을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면서도 무용수들이 음악에 몸을 싣고 있는데, 특히 여성 독무에서 발레리나 알리나 소모바가 리듬을 타면서 폴드브라를 늘일때마다 시선까지도 여운을 남긴다. 이 지점이 춤을 참 잘 춰보이게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춤을 잘 추는 무용수일수록 시선에도 여운을 남긴다. 전형적인 러시아 발레리나의 체형을 가진 알리나 소모바는 손가락의 유연성도 타고난 발레리나이다. 무용수들은 신체가 악기이기 때문에 자신의 장점을 관객들에게 어필하기 마련인데, 알리나 소모바 역시 손끝으로도 매우 아름다운 춤을 추면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한층 더 부각시키고 있다.
**로열 발레단**
전세계 발레 메소드 중 영국의 발레 메소드인 'RAD(왕립무용원) 메소드'와 미국의 발레 메소드인 '발란신 메소드'가 가장 흥미롭고 재미있다. 발레 동작을 문법처럼 사용하는 러시아 발레와 낭만발레의 특징이 남아있는 프랑스, 덴마크 발레 메소드와는 확연히 다른 영국과 미국만의 개성과 창의력이 돋보인다. 발란신 메소드가 정박보다 더 빠른 리드미컬한 무용수들의 발스텝을 요구하는데, 영국발레도 거의 비슷하다. 무용수들의 활기찬 발스텝이 특징인 영국 발레는 하체의 테크닉으로 음악을 표현하고 있다. 영상 속 무용수들이 하체 테크닉을 비롯한 발스텝으로 음악을 가지고 놀면서 춤을 추고 있는데 완급조절을 하면서 동작을 늘였다가 음악의 템포보다도 박자를 더 쪼개서 춤을 추다가 다시 춤선을 늘였다가 또다시 박자를 쪼개서 춤을 추는 등 무용수들이 음악을 사용하는 게 재미있다. 이처럼 영국 발레는 음악의 감정들을 춤으로 표현하면서 춤을 통해 음악으로 밀당을 하고 있다. 이게 영국 발레의 특징이기도 하다. 러시아 발레보다는 다리를 들어올리는 각도는 낮지만 대신에 음악의 활기찬 느낌들을 감상자에게 훨씬 더 잘 전달하고 있다. 물 속의 물고기가 파드닥거리면서 물기를 터는 것처럼 발레리나도 손끝으로 물기를 탁탁 털면서 춤을 시작하는 것을 감상하는 것도 묘미이다. 일렁이는 물결 속에서 나부끼는 발레리나의 치맛자락이 또하나의 아름다운 춤선이 되어 마음속으로 촉촉하게 스며든다.
원래 발란신은 이 작품을 안무할 때에 관객들이 중간중간에 박수를 칠 일이 없도록 멈추는 부분이 없이 안무했다고 하는데, 영상을 보면 사실상 관객들이 중간에 박수를 치고 있고, 무용수들이 나와서 인사를 하고 있다.
마지막 영상은 현재 영국 발레의 지면을 장식하고 있는 발레리나 마리아넬라 누네즈가 춘 '차이코프스키 파드되'이다. 무대 위에서가 아니라 연습실에서 춘 춤인데도, 춤추는 게 행복해보이니 감상자의 마음도 덩달아 행복해진다. 로열발레단의 수석 무용수인 누네즈는 발레단의 첫 일과인 발레단 클래스 시간에도 춤 추는 게 행복한 발레리나이다. 그녀가 행복한 이유는 발레를 그만큼 사랑하기 때문이다.
(누네즈 베리에이션은 5분 9초부터 5분 53초까지이다.)
https://youtu.be/kvo5mbecQ60?si=4mrjueIqrMhnhqGw
<참고 영상 및 문헌>
유튜브 채널 : 테르프 <차이코프스키의 분노가 만든 발레곡 | 흑조 그리고 차이코프스키 파드되>
<해설이 있는 발레>, 김긍수, 예니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