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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 서연 Nov 30. 2023

<호두까기 인형> 중 '꽃의 왈츠'

마린스키 vs 뉴욕시티 발레단

마린스키 발레단의 <꽃의 왈츠>

* 초연 : 1892년 12월 18일 황실 마린스키 극장

* 초연 당시 안무 : 마리우스 프티파, 레프 이바노프(보조안무)

* 개정 안무 : 바실리 바이노넨 (현재 마린스키에서 사용)

* 초연 당시 지휘자 : 리카르도 드리고

* 감상 키워드 : 비엔나 왈츠, 예의와 격식, 바가노바 메소드


차이코프스키가 발레 음악을 작곡하기 전까지는 발레 음악은 발레 애호가들한테는 무용에 종속된 존재로 취급받았고, 음악 애호가들한테는 (오페라와는 달리) 변방 음악 취급을 받았다. 발레 음악은 이래저래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인 존재감이 거의 없는 음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차이코프스키가 발레 음악을 작곡함으로서 발레 음악을 무용과 대등하고 예술 음악으로서도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킨 최초의 작곡가가 되었다.


하프의 카덴차에 이어 호른의 중후한 선율로 시작하는 <꽃의 왈츠>는 <호두까기 인형>의 2막중 디베르티스망의 끝부분에 나오는 왈츠로 러시아 황실 극장에서 초연한 작품답게 기품있고 고풍스럽다. 여기에 목관 악기의 낭만적인 음색과 현악기의 나풀거리는 선율까지 더해 밝고 화사한 비엔나 왈츠를 연상시킨다.


실제로 마린스키 발레단의 꽃의 왈츠는 2인 1조 파드되로 구성된 단원들의 군무로 이루어져 있다. 비엔나 왈츠 역시 2인 1조로 구성된 커플 댄스이다. 차이점은 비엔나 왈츠는 대부분 아마추어들이 추는 커플 댄스이고, 파드되는 비르투오소들만이 구사할 수 있는 커플 댄스라는 점이다.


여담이지만 발레단의 군무로 출연하는 단원들은 혹시 실력이 없어서이냐는 질문들을 많이 받기도 했는데, 학생 시절부터 혹독한 훈련을 견디면서 바늘구멍만한 발레단 입단에 성공한 무용수들이 군무로 출연을 하니 이미 입단하면서부터 프로 무용수들이다. 거기서부터 차근차근 승진하면서 드미 솔리스트, 솔리스트가 되는 거고, 최고의 무용수들 중에서도 가장 최고가 되면 수석 무용수까지 되는 거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주연 배우들 못지않게 조연 배우들 연기력이 중요한 것처럼 발레에서도 똑같다.


하프의 카덴차가 흐를 때 2인 1조로 구성된 단원들이 무대 위에 등장을 한다. 이어 호른이 고풍스럽게 연주를 시작하면서 단원들이 정확히 4분의 3박자 왈츠 스텝(발랑세 스텝)을 밟으며 커플 댄스를 우아하게 추기 시작한다. 관능과 욕망의 상징인 탱고와는 달리 왈츠는 상류층의 커플 댄스답게 사교춤이면서도 예의와 격식을 갖춘다. 고전발레에서 커플댄스인 파드 되 역시 예의와 격식을 갖추어야 한다. 다른 댄스에서는 남자가 여자를 리드하면서 추는 경우도 있지만 발레에서는 남녀 모두 비르투오소들이다. 그러면서도 남성 무용수들은 여성 무용수들이 매력을 발산하고 현란한 발레 테크닉을 구사할 수 있도록 보조하는 역할까지 담당해야 한다.


비엔나 왈츠를 연상시킬만큼 우아하고 화사한 꽃의 왈츠는 발레이기도 하기 때문에 발레 무용수들이 뽐내는 초절기교도 감상할 수 있다. 음악의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발레리나들은 훼떼 앙투르낭이나 그랑 제떼 등의 현란한 발레 테크닉을 선보인다. 마린스키 버전에서 유일하게 로맨틱 튀튀를 입고 추는 꽃의 왈츠는 그래서 더욱 왈츠를 출때 입는 드레스처럼 풍성하고 흩날리는 꽃잎처럼 나풀거린다.


군무이기 때문에 커플 댄스를 추다가도 소그룹으로 나뉘고 소군무를 추기도 하고 전체 대열로 합쳐지는 등 동선이 유기적으로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단원들의 물 흐르듯이 바뀌는 동선들을 감상하는 묘미가 있다.


러시아 발레답게 왈츠를 추면서도 발레의 모든 동작과 손끝을 따라가는 시선까지 완벽하고 정형화된 칼군무를 보여주고 있다. 다른 발레 메소드보다도 월등히 관절의 사용 범위가 넓은 바가노바 메소드는 모든 에너지를 길게 쓰기 때문에 춤선이 더 길어지는 춤이다. 러시아 무용수들이 빚어내는 꽃의 왈츠는 왈츠이면서도 고난이도의 발레 테크닉을 겸비한 선의 예술이다.

https://youtu.be/bOC36Qjug4U?si=mngLp00c91Rfp9v5



뉴욕시티 발레단 <꽃의 왈츠>

* 안무가 : 조지 발란신

* 감상 키워드 : 신고전주의, 음악의 이미지, 리드미컬한 움직임


미국의 안무가 조지 발란신은 사실 러시아에서 태어나 러시아 발레를 배우며 자란 사람이다. 러시아 발레를 배웠던 사람이 프랑스로 건너가 디아길레프의 인정을 받으며 작품 안무를 시작했고, 이후 미국으로 흘러들어가 발레 애호가 링컨 커스틴의 후원을 받으면서 발레학교를 세우고 발레단을 창단해 미국 곳곳에 발레가 뿌리내리고 열매를 맺게 해서 발레 강국으로 만든 러시아 출신의 미국 안무가이다.


발란신과 커스틴이 세운 발레 학교는 아메리칸발레학교이고 이어서 설립한 발레단이 뉴욕시티 발레단이다. 그럼에도 발란신은 발레를 가르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발란신은 발레 클래스 자체가 안무에 쓰일 동작들이었고, 연습실에서 일어났던 에피소드를 실제 안무에 사용하기도 했다. (작품 : 현을 위한 세레나데)


고전주의 발레가 성행했던 시절에 러시아 발레를 배운 발란신은 러시아 발레와는 많이 다른 장르를 창조했다. 스토리를 없애고 음악의 느낌과 우아한 춤선만 남겨놓은 신고전주의 발레를 만든 것이다. 그러니까 발란신 작품에서 악보의 음표는 느낌표이고, 무대 위에서 펼쳐보이는 무용수들의 춤선은 표이며, 그 느낌표와 음표들이 조화를 이루면서 춤이 되는 음악 신고전주의 발레이다.


스토리 중심의 <호두까기 인형>에서도 발란신 버전을 감상할 때에는 발란신이 신고전주의 발레를 창시한 안무가라는 점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발란신도 1막의 중간부분까지는 원작의 스토리 전개를 따라가도록 발레 마임을 넣으며 안무를 만들었지만 1막 끝부분에 나오는 눈송이 왈츠부터는 신고전주의 발레 안무가로서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마리우스 프티파와 차이코프스키가 협업한 <호두까기 인형>은 원작과 대본에 충실한 안무와 음악의 소산물이었다. 그러나 발란신에게는 원작에 충실한 스토리텔링과 음악적인 해석은 중요하지 않았다. 발란신에게는 자신의 상상력과 음악의 이미지가 더 중요했기 때문에 원곡에서 주는 선율의 이미지만 쏙 골라 자신만의 스타일로 재해석했다. 그래서 2막에 등장하는 디베르티스망(요정들의 춤)의 리듬과 템포는 다른 발레단과 많이 다르며 심지어 연주되는 모음곡 순서를 바꾸기까지 했다.


발란신이 남긴 명언 중에 "춤이 쇼의 주인공이 되게 하라."가 있는데, 이 말을 발란신 작품을 감상할 때에 참고할 필요가 있다.


현란한 치마를 입고 하체와 폴드브라를 매우 바쁘게 움직이는 발란신의 <꽃의 왈츠>는 꽃 퍼레이드나 카니발 축제를 연상시킬만큼 꽃들의 현란한 향연이다. 군무이지만 러시아 발레처럼 정갈한 칼군무가 아닌 현란해보이는 군무이다. 빠른 템포에 스텝을 바쁘게 밟아야하고 폴드브라도 활기차게 표현해야하며 갑작스러운 박자의 변화와 방향전환이 빠르게 바뀌니 음악보다도 더 리드미컬하게 춤을 춰야 한다. 선율의 밝고 꽃의 화사한 느낌을 활기 넘치는 현란한 춤선으로 표현한 음악이 발란신의 <꽃의 왈츠>이다.


개인적으로 발란신의 <꽃의 왈츠>는 매우 친숙하다. 이 작품으로 군무를 췄기 때문이다. 발레 선생님이 작품의 앞부분에 몇몇 동작만 마린스키 버전을 차용해넣고 선생님이 창작한 동작 몇가지 외에는 대부분 발란신 버전을 사용해 안무를 만들었었다. 발란신 버전의 <꽃의 왈츠>는 여자 솔로와 코르 드 발레(군무)로 구성되어 있으나 우리는 코르 드 발레만 췄는데 발란신 버전의 코르 드 발레와  상당부분 똑같이 췄다.


마린스키 스타일은 에너지를 끝까지 사용하면서 동작을 정확히 다 보여줘야하는 게 힘들었고, 발란신 버전은 재빠른 동선 이동과 리드미컬한 움직임을 표현하느라 힘들었다. 게다가 발란신 버전에서 갑작스럽게 꽃잎이 접히듯이 무릎을 구부려 댄스 플로어 위에 닿아햐하는 동작을 수없이 연습해야 했기 때문에 선생님이 내게 무릎 보호대 착용을 하지 않으면 무릎이 상할 거라고 하셔서 연습기간 내내 무릎 보호대를 착용하고 연습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마린스키 스타일의 꽃의 왈츠 의상을 입고 바가노바 메소드로 표현한 발란신 버전의 꽃의 왈츠를 추었던 것이다.

https://youtu.be/LKcZL8q1eBw?si=jXMW8bUo57BrRiC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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