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하게 변주된 <지젤> 이야기
낭만 발레의 정점을 찍은 작품 <지젤>
대본 : 테오필 고티에, 생 조르주
초기 안무 : 쥘 페로, 장 코랄리
재안무 : 마리우스 프티파
음악 : 아돌프 아당 (극의 캐릭터와 감정, 상황에 따라 반복적으로 같은 테마를 사용하는 '라이트모티프기법'을 사용), 부르크뮐러의 곡을 편곡해 1막의 '패전트(농민) 파드 되 '음악으로 사용.
이후 마리우스 프티파가 발레 <지젤>을 재안무하면서 작곡가 리카르도 드리고가 1막의 '지젤의 솔로 베리에이션' 음악을 추가해 넣었다.
초연 : 1841년
프랑스의 낭만주의 시인인 테오필 고티에는 독일의 문학가 하인리히 하이네의 책 <독일 이야기> 중에서 '사랑의 배신으로 죽은 처녀 귀신들이 밤마다 무덤으로 나와 춤을 춘다'는 윌리들의 내용에 마음이 사로잡혔다. 고티에는 곧바로 발레 대본가 생 조르주를 만나 '으스스한 달빛 아래에서 사랑을 배신한 남자가 윌리들의 명으로 목숨이 끊어질때까지 춤을 춘다'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이야기했고, 이에 따라 조르주는 고티에와 함께 발레 대본을 완성했다.
고티에와 조르주가 완성한 발레 대본을 바탕으로 쥘 페로와 장 코랄리가 완성한 발레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매우 순조로웠다. 이 작품의 아이디어를 제시한 고티에는 당시 이제 막 피어난 스타 발레리나 카를로타 그리시의 팬이었다. 애초에 고티에는 그리시를 뮤즈로 삼고 이 작품의 대본을 써내려갔기 때문에 오페라 극장 측에서도 스타 캐스팅에 흡족해하면서 이 모든 작품 제작 과정이 일사천리로 흘러갔다. 음악을 맡은 아당 역시 3주만에 빠른 속도로 작곡을 완성했다. 그리시를 위해 만들었던 발레 <지젤>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떠오르는 샛별이었던 그리시가 마리 탈리오니, 파니 엘슬러와 같은 당대의 스타 발레리나들과 나란히 어깨를 견주게 되었다.
초연 당시부터 성공해 오늘날까지 신화로 남게 된 발레 작품 <지젤>. '발레리나'하면 으레 공기처럼 떠다니는 <지젤>과 천상의 날개짓을 하는 <백조의 호수>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이처럼 발레리나의 이미지를 공식으로 만든 발레 <지젤>이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이유는 아름다운 로맨틱 튜튜로 빚어내는 환상적인 군무와 더불어 함께 춤을 추는 우아한 선율, 극적인 스토리를 따라가는 음악으로 몰입감을 높인 완성도에 있다.
https://youtu.be/DoLzZmqOGh8?si=GNaMJ690YxuetYNM
<라 실피드>가 낭만 발레의 서막을 연 작품이고, <코펠리아>가 낭만 발레의 끝무렵에 만들어진 작품이라면 <지젤>은 낭만주의 발레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만들어진 작품이다. 시대가 흘러도 변치 않는 사랑을 받는 발레 <지젤>에 담은 사랑의 설레임과 사랑의 배신, 죽어서도 변치 않는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정서가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도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심금을 울려서일 것이다.
지젤은 신분을 속인 귀족 알브레히트와 사랑에 빠진다. 사랑을 하다보니 어쩌다 신분이 높은 남자를 사랑하게 된 지젤은 지젤을 짝사랑하는 힐라리온이 나타나 알브레히트가 귀족이고 약혼녀가 있다는 사실을 밝히자 처음에는 이를 부정하다가 서서히 실성해가면서 죽게 된다.
https://youtu.be/Xi5GYXREeXQ?si=6cDH_Rd23XtRujS9
지젤은 윌리(사랑의 배신으로 죽은 처녀 귀신)가 되어 처녀 귀신들의 대장 미르타의 부름을 받는다. 여자의 한은 오뉴월에도 서리가 맺힌다는 말은 서양에서도 통하는지 사랑에 배신을 당해 죽은 윌리들은 어둠이 짙게 드라우면 언제나 무덤가에 나타나 숲에 남자가 들어올때마다 목숨이 끊어질때까지 춤을 추게 한다. 그러나 지젤은 죽어서도 알브레히트를 사랑한다. 뒤늦게 후회하면서 지젤의 무덤가를 찾아온 알브레히트를 죽게 하려는 윌리들로부터 지젤은 사랑하는 남자를 지킨다.
스토리만 보면 다소 흔한 내용이다 못해 조금은 엉성하다는 느낌도 든다. 그러나 <지젤> 1막에 나오는 밝고 사랑스러운 춤들과 지젤과 알브레히트가 나누는 사랑의 밀어들에 이어 극적인 장면 전환으로 지젤이 실성해가는 그 유명한 매드씬, 1막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2막 전반의 멜랑콜리하면서도 환상적인 분위기, 한치의 오차도 없는 칼군무를 추면서 빚어내는 가볍고 우아한 움직임, 전설이 된 아름다운 지젤 라인, 눈에 보이지 않는 신령스러운 존재와 파드 되를 추는 신비스러운 연출, 새벽공기에 흩날리는 로맨틱 튜튜의 춤선까지 이 모든 게 음악이 되어 진한 여운을 남긴다.
2막의 파드 되에서 발레리나는 죽어서도 연인을 사랑하지만 초현실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감정을 절제해야 한다. 과도한 감정 표현을 하지 않으면서도 애절한 마음을 우수짙은 선율에 녹이면서 우아한 춤선을 실어야 한다. 발레리노는 뒤늦은 후회와 미안한 감정을 담아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와 춤을 추는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해야 한다.
https://youtu.be/UdbBGqTU0vI?si=KCj0KGdTrCqOpKhk
** 윌리, 빌리, 빌랴 : 우리말로 하면 '사랑의 배신으로 죽은 처녀 귀신들'. 자정부터 새벽까지 자신들의 무덤에서 나와 춤을 춰야 하며 복수의 대상은 남자들이다. 남자들을 죽음의 춤으로 끌어들여 목숨이 다할 때까지 춤을 추게 해서 이승의 한을 푼다고 한다.
푸치니의 초기 오페라 <빌리, Le Villi>
한편 낭만주의 발레가 서서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을 때 이탈리아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는 발레 <지젤>의 내용에서 영감을 받아 오페라 발레 음악을 작곡했다. 가족들과 하객들의 축하를 받으며 로베르토와 안나는 약혼식을 올린다. 그러나 안나는 행복한 가운데 불안하기만 하다. 숙모의 유산을 받기 위해 곧 떠나야 하는 로베르토를 다시 보지 못할까 두려워하면서 아리아 "내가 너희 꽃처럼 귀엽다면(Se comme vio piccina lo fossl)"을 부른다. 로베르토는 돌아오면 결혼할 계획이라고 안나의 마음을 안심시키지만 안나의 마음은 여전히 불안하다.
유산을 상속받으러 마인츠로 떠난 로베르토는 요부 세이렌에게 매혹당하게 되면서 안나를 잊게 된다. 안나는 사랑하는 연인 로베르토를 기다리다가 결국엔 슬픔에 한이 맺혀 죽게 된다. 세이렌의 유혹에 재산까지 탕진한 로베르토는 그제서야 약혼녀 안나를 떠올린다.
안나는 그 사이 한 맺힌 처녀귀신 빌리(=윌리)가 되고 돌아온 로베르토를 숲으로 유인한다. 유산을 탕진한 돌아온 탕아 로베르토는 그제서야 물밀듯이 밀려들어오는 후회를 하며 용서를 구하는 한탄의 아리아 "행복했던 지난날로 되돌아가고파, Torna ai felice di"를 부른다.
https://youtu.be/rM3HpWsZpSc?si=hOi66LDAz1hn_etx
로베르토는 안나에게 용서를 구하지만 안나는 차가운 정령일 뿐이다. 복수심으로 차오른 빌리 안나는 로베르토를 배신자라고 부르며 다른 빌리들과 함께 그를 에워싼다. 빌리들은 호산나를 외치면서 로베르토가 죽을 때까지 함께 춤을 추면서 저주를 건다. 빌리들의 저주에 끊임없이 춤을 춘 로베르토는 죽고 나서야 춤을 멈추게 된다.
https://youtu.be/H46E0YlxuMU?si=D17uwbsSf3e_oTEF
<르 빌리>는 푸치니의 초기 작품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오페라 전막을 감상해보면 결코 습작이나 졸작이라고 할 수 없는 뛰어난 작품이다. 오페라 발레 작품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오페라와 발레가 한 몸이다. 뛰어난 관현악어법과 푸치니 특유의 아름다운 선율, 오페라 사이에 나오는 매혹적인 발레 음악이 감상자의 마음을 매료시킨다. 발레 <지젤>에서는 지젤의 영원한 사랑을 표현했다면 오페라 발레 <르 빌리>에서는 한 맺힌 처녀 귀신의 통쾌한(?) 복수가 차이를 두고 있다.
프란츠 레하르의 오페라타 <유쾌한 미망인> 중 '빌랴(=빌리, 윌리)의 노래'
오페라의 내용은 빌리(=윌리, 빌랴)와는 연관이 없으나 오페라 속 아리아에 '빌랴의 노래(메리 위도우)'가 나온다. 주인공 한나가 자신이 연 파티에 참석한 손님들에 대한 답례로 부르는 이 아리아는 매우 밝고 달콤한 선율이 매력적인 곡이다. 특히 영국 국립 오페라단이 출연한 영상 속 프로덕션은 동화 속 마법같은 연출이 돋보이며 한나 역을 맡은 소프라노가 신비스러운 빌랴의 이미지를 우아한 음색으로 그려내고 있다.
https://youtu.be/bCkHuD9izr8?si=pRZFQSRadFsVvuhY
동시대 작품 <지젤>
오늘날에도 사랑받는 <지젤>은 동시대 안무가들에게도 영감을 주고 있다. 이미 고전이 된 작품에 도전하여 재해석을 한다는 것은 에베레스트 산을 등정하는 것과 같을텐데도, 여기에 도전하는 자신만만한 안무가들이 있다. 낭만주의 발레의 걸작 <지젤>을 재해석한 방글라데시 이민자 출신의 영국 컨템포러리 댄스 안무가 아크람 칸도 여기에 해당하는 열정 넘치는 안무가이다.
아크람 칸은 신비스러웠던 <지젤>을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착된 계층간의 넘을 수 없는 벽으로 탈바꿈시켜 새롭게 해석한 작품으로 탄생시켰다. 저음의 굉음과 함께 벽에 손을 짚은 사람들은 이민자 출신의 의류 공장 노동자들이다. 이미 손자국이 찍힌 벽은 서로를 넘을 수 없고, 서로를 구분짓는 계층이라는 벽이며 노동자들이 벽에 손자국을 찍는 행위는 그들의 배경과 환경, 분위기와 사회문화적인 언어 등 모든 것을 아우르는 아비투스이다. 이민자들은 계층 타파를 외치는 듯한 매우 처절하고 격렬한 몸부림을 보여준다. 어두운 현실을 반영한 그들의 역동적인 춤은 분노와 한이 맺힌 춤이었다.
https://youtu.be/EHPT8IglL0s?si=-ZBA9NC5qXyyw6IM
이들 사이에 나타난 알브레히트는 노동자들과는 다른 언어를 구사한다. 사랑하는 지젤을 향해 취하는 폴드브라는 지배층라는 계층을 나타냄과 동시에 자의식이 포함된 문화적 우월감이 돋보이는 또다른 아비투스이다. 그 아비투스를 보며 지젤은 용기내어 알브레히트와 사랑의 파드 되를 추기 시작한다. 그러자 비로소 무대의 조명이 밝고 따스해지면서 조금은 아름답고 낭만적인 선율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이 순간 이들은 서로의 신분 차이를 극복하고 사랑을 이룰 수 있을거라는 동화와 같은 결말을 꿈꾼다.
그러나 이내 다시 저음의 굉음이 울리면서 벽이 위로 걷힌다. 벽 너머에 있는 사람들은 이민자들이 넘을 수 없는 산인 지배 계층들이 서 있다. 그들은 매우 호화로운 옷을 입고서 그들만의 아비투스를 구사한다. 그러자 조금전까지 개혁 의지를 가지고 춤을 춘 배고픈 이민자들은 지배 계층을 보고 이내 그들에게 복종을 한다.
재해석된 <지젤>에서도 알브레히트와 힐라리온의 대결은 치열하다. 오히려 낭만 발레 <지젤>에서보다도 힐라리온의 공격은 더 위협적이었다. 지젤을 사랑했지만 결국은 신분 차이를 넘지 못하고 알브레히트는 지젤을 뿌리친다. 여기에 지젤은 충격을 받으면서 현실을 부정한다. 고전적인 지젤은 사랑했던 남자가 어쩌다보니 신분이 높은 남자였고 지고지순하면서 결코 물들지 않는 순백의 여인이었다면, 아크람 칸의 지젤은 상승혼을 꿈꾸는 욕망으로 점철된 여인이다.
https://youtu.be/oesf3KWe0oU?si=RzNEJsLB-5j1awKt
버림받은 그녀를 같은 계층의 사람들이 에워싸지만 지젤은 그들을 뿌리치고 알브레히트를 놓지 않으려 한다. 아크람 칸에 의해 재창조된 지젤은 훅 불면 날아갈 것 같고, 바람에 실려 이내 사라질 것 같은 연약한 여인이 아니다. 신분이 높은 남자와 결혼해 계층 이동을 하려는 대단히 야망이 큰 여인이다. 결국 지배 계층 남성들이 지젤을 둘러싸고 잠시 후 지젤은 피 비린내 나는 무대 배경과 함께 서늘한 주검이 된다.
https://youtu.be/01Qf9ypbcq4?si=Y0FUXRPIQRrQBC1Y
아무리 지젤 속 윌리가 한 맺힌 처녀 귀신들로 남자가 복수의 대상이라고는 하지만 낭만 발레 속 윌리들은 차라리 환상적이고 아름답기라도 하다. 푸치니의 오페라 발레 <르 빌리>에 나오는 빌리들의 복수도 아크람 칸의 손에 의해 탄생된 윌리들에 비하면 양반이다. 아크람 칸에 의해 재창조된 윌리들은 그야말로 호러 영화에 나올법한 공포스러운 캐릭터들이다. 윌리들의 대장 미르타는 죽어있는 지젤을 윌리로 만드는 판토마임을 하면서 지젤을 소환한다. 지젤이 윌리로 변하자 다른 윌리들이 막대기를 들고 나타나는데, 그 막대기는 남자를 찔러 죽이는 무기이다. 남자를 죽이는 무기에는 남자에 대한 원한과 증오심, 활활 타오르는 복수심이 들어있다.
https://youtu.be/7_CLjM3KSLs?si=0lj37O3lZj806Sgg
지젤을 사랑했으나 질투한 댓가로 윌리들에게 죽임을 당한 힐라리온에 이어서 알브레히트가 지젤의 무덤가로 찾아온다. 미르타는 지젤에게 막대기를 주며 알브레히트를 찔러 죽이라고 명령한다. 처음에는 지젤도 미르타의 명령에 복종하려고 했으나 막상 알브레히트를 보니 마음이 약해져 그를 용서한다.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던 윌리들은 날이 밝아지자 어쩔 수 없이 물러가고 지젤도 다른 윌리들과 함께 간다. 알브레히트는 뒤늦은 후회를 하면서 비탄에 잠긴다.
동시대 안무가 아크람 칸은 고전적인 플롯을 선택해 인간의 깊은 내면에 깔려있는 욕망과 인간사회에 대한 탐구를 동시대 춤으로 재해석했다. 컨템포러리 댄스 안무가인 아크람 칸이 영국 국립 발레단을 위해 안무한 이 작품은 컨템포러리 댄스 & 컨템포러리 발레로 표현된 세속적인 인간 사회의 욕망이다.
동시대 작품에 나오는 지젤은 오직 사랑만 아는 순수한 소녀가 아닌 금수저와 결혼해 신분 상승을 하려는 계산이 빠른 여인이다. 믹대기를 입에 물고 춤을 추는 윌리들은 고전적인 윌리들처럼 움직임은 가벼우나 요정처럼 살랑거리는 이미지가 아닌 피를 부르는 냉혈한의 모습이다. 비극적인 사랑보다도 뛰어넘을 수 없는 삶에 대한 한이 서려있는 이 작품은 그나마 1막에서 십자대열의 군무, 2막이 시작될때와 미르타가 지젤을 윌리로 만들때 흘러나오는 편곡된 아당의 음악, 우유부단한 알브레히트의 모습이 이 작품의 모티프가 낭만 발레 <지젤>에서 왔음을 알게 해준다.
참고한 문헌 및 인스타그램
푸치니 서거 100주년 특강, 발레 <지젤> vs 푸치니 <빌리> 유인물, 김문경 강의, 2024년 1월 20일
(인스타그램@kmk_fm)
발레 음악 산책, 김지현 지음, FLOOR WORX
'지젤'의 모든 것, 파리 오페라 발레단 내한!, 객석, 2023년 3월 6일 기사
<지젤>로 보는 온라인 플랫폼의 가능성, 예술을 읽어요, 노블레스, 2020년 7월 9일
천상의 언어, 그 탄생에서 오늘까지 발레이야기, 이은경 지음, 열화당
발레, 무도회의 권유, 이단비 지음, 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