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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 Jan 04. 2023

<속죄와 용서의 스토리텔링>

-이창동 감독 영화 『시』와 『밀양』에 대해서-


『서론』

속죄와 용서의 과정을 묻는다.


누군가의 죄로 인해 인물간의 갈등이 시작되는 서사는 영화 속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이런 서사의 경우 가해자시선에선 속죄의 과정을, 피해자시선에선 복수 혹은 용서의 과정이 그려진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가해자를 향한 복수의 과정을 연출해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전할 수 있지만 그 과정은 피해자의 아픔과 내적인 심리를 온전히 전할 방법은 아니다. 피해자가 겪는 마음의 상처를 자극적인 장면이나 한 줄의 대사로 규정짓는 것은 폭력이 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영화들은 자극성에 치중해 속죄와 용서의 본질적인 물음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속죄와 용서의 과정은 쉽게 다뤄질 이야기가 아니다. 가해자와 그 주변인은 일차원적인 악이라 말할 수 없고 가해자의 폭력을 폭력으로 보복하는 것을 선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가해자의 속죄와 피해자의 용서의 과정을 영화에 담아내는 가장 올바른 방법은 무엇일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지닌 이들은 어떤 식으로 이것을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할 것인가? 이들이 짊어질 무거운 상처들을 관객들에게 어떤 식으로 전해줘야 할 것인가? 가해자의 입장에선 피해자들에게 전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속죄는 무엇일까? 금전적인 배상이 올바른 속죄일까? 


본고는 이창동 감독의 『시』와 『밀양』을 통해 이 무거운 질문들에 대해 오늘날의 영화는 어떤 식으로 답을 하고 있는 지 알아보겠다. 속죄와 용서의 과정은 우리 사회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본고에서 소개할 두 영화 모두 우리 사회 속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두 작품은 같은 사건을 두 가지 다른 시선에서 다루고 있다. 두 작품에선 모두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의 모습이 나온다. 『시』에서는 가해자의 부모가 된 미자 할머니의 입장에서 성폭행 피해자를 향한 올바른 속죄가 무엇인지 말하고 있다. 시 속의 미자 할머니는 시를 적기 위해 아름다운 꽃들을 바라보고자 한다. 하지만 그녀는 손주의 성폭행에 의해 자살한 여중생의 이야기를 듣게 되고 불편한 진실과 마주한다. 시란 아름다운 것인데 미자가 바라보는 현실은 아름답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감독은 왜 불편한 진실을 시라는 소재와 함께 영화 속에 담아낸 이유는 무엇일까? 시를 쓰는 미자의 행위와 피해자를 향한 속죄는 어떤 식으로 연결되는 것일까? 이 물음들에 대해 본고에서 다루고자한다. 『밀양』은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의 입장에서 합리적인 용서의 과정이란 무엇인지 묻는다. 가해자를 용서해야하는 종교적 가르침과 가해자를 향한 인간적인 증오 사이에서 무엇이 올바른 용서가 될 것인가. 이 물음 또한 본고에서 다뤄보고자 한다. 본고는 속죄와 용서라는 흔하고 무거운 주제를 표현했던 대표적인 사례를 분석해봄으로써 우리 사회에서 용서와 화해라는 문제는 어떤 식으로 표현되어야 하는지 알아보겠다. 




『본론』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와 『밀양』을 묶는 주제는 속죄와 용서이다. 속죄와 용서를 다룬 이야기는 대중문화에서 흔하게 찾을 수 있는 소재이다. 피해자가 가해자의 죄를 보복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플롯이나 극적인 사건에 의해 인물간의 속죄와 용서가 이뤄지는 플롯은 극적 장치로서 영화나 소설에 활용된다. 하지만 극적인 사건으로 완결되는 영화 속의 이야기를 현실에 적용시킬 수 없다. 현실 속 피해자의 무거운 상처를 한마디의 대사나 한 장면으로 표현할 수 없고 가해자 측이 짊어질 죄의 무게 역시 한마디의 대사나 한 장면으로 표현할 수 없다. 이창동 감독의 두 영화는 용서와 속죄의 과정이 해결되는 극적인 서사에 중점을 두고 있지 않다. 속죄와 용서의 과정을 하나의 완결된 서사로 마무리하는 이타 영화들과 달리 그의 영화는 그 과정의 완결이 아닌 과정 자체에 주목한다. 『시』는 가해자에게 주어진 죄의 무게를 그린다. 이 피할 수 없는 불편한 진실을 가해자는 어떻게 바라 봐야할 것인가. 『밀양』은 피해자의 입장에서 상처뿐인 삶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갈지를 그린다. 용서를 말하는 신앙의 가르침과 인간의 원망 중에서 어떤 것이 피해자에게 더 합리적인 길인가. 지금부터 이 두 영화 속에 표현된 용서와 속죄의 과정을 살펴보며 영화 속에서 죄의 문제가 어떻게 다뤄져야 하는지 말해보겠다.




『시』 속에 미자 할머니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해자의 부모가 된다. 손주의 성폭행으로 인해 여학생이 자살하게 되고 가해자 학부모들은 이 사실이 언론에 드러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돈으로 이 사건을 덮고자 한다. 미자는 치매라는 불치병을 앉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를 쓰기 위해 수업에 들린다. 이창동 감독은 사회의 불편한 진실들을 시를 배우는 미자 할머니의 시선을 통해 전달한다. 흔히 이런 문제를 다룬 영화들은 매우 폭력적이고 자극할 만한 요소들이 들어가기 쉽다. 『시』는 시를 쓰는 미자와 손주의 성폭행으로 인해 자살한 여중생을 동일 선상에 놓고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시를 쓰기 위해 꽃을 바라보고 나무를 바라보는 미자 할머니의 노력과 달리 그녀의 눈에는 불편한 진실들이 차츰 보이기 시작한다. 죽은 자식의 시체를 보고 실성한 부모, 손주의 성폭행 혐의, 이를 덮으려는 부모들의 어두운 거래 등, 미자가 시를 쓰기 위해 바라보는 세상과 그녀 앞에 놓인 세상은 너무나도 다르다. 미자에게 시를 가르치는 김용탁 시인은 시를 쓰기 위해선 잘 봐야한다고 말하고 사과를 꺼내든다. 사과라는 것을 알고 싶어서 관심을 갖고 보고 싶어서, 보는 것이 진짜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선생은 무엇이 든 진짜로 바라보면 뭔가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있을 거라 말한다. 선생님은 한 달 강좌가 끝날 때 까지 시를 한편 씩 써달라는 과제를 제시한다. 미자에겐 두 가지 과제가 있다. 하나는 강좌가 끝날 때까지 시 한편을 작성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피해자 부모에게 합의금을 제공하는 것이다. 피해자를 향한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면서 시를 써야하는 미자의 현실, 이 상반되는 현실을 통해 영화는 시를 쓰는 과정은 아름다운 것을 바라보기 위함이 아닌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바라보기 위함인 것을 말해준다.


시는 가해자의 편에선 미자가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볼 수 있도록 만든다. 깨끗하고 순수할 것만 같은 미자의 삶도 결국은 아름답지 못하다. 그녀는 자신이 돌보는 독거노인과 성관계까지 하게 되어 합의금을 받아내게 된다. 박희진 학생의 자살에 자신의 손주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안 미자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미자의 나체는 그녀의 부끄러움을 전면적으로 보여준다. 그녀는 깨끗하고 순수한 자신의 모습이 아닌 나체의 모습으로 부끄러움을 느낀 후에야, 박희진 학생의 마음을 이해하고 느끼게 된다. 시를 쓴다는 것은 자신의 부끄러운 나체를 보는 것이고 그 모습 그대로 부서지는 것이다. “살구는 스스로 땅에 몸을 던진다. 깨어지고 밟힌다. 다음 생을 위해” 스스로 땅을 향해 추락하는 살구는 미자의 삶에 대한 비유이다. 시인이란 이 살구와 같이 고통스런 순간에서 자신을 깨뜨리며 시를 쓰는 것이다. 미자는 자신의 앞에 있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방관하거나 피하지 않고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며 부서졌다. 그 과정을 통해 가해자, 미자는 피해자와 동화되고 스스로 부서지고 시를 적어 속죄의 마음을 전한다. “사람은 언제나 몸을 깨끗이 해야 돼 몸이 깨끗해야 마음이 깨끗한 거야” 미자는 자신을 꾸며주는 겉면이 아닌 자신이 깨끗해야함을 손주에게 가르친다. 미자 주변의 사람들 모두 누구나 겉면은 그럴싸하지만 각자 자신만의 더러움을 갖고 있다. 온화해보이지만 성폭행 사건을 덮으려고 하는 학부모들, 미자에게 성관계를 요구한 노인, 아름다운 옷으로 자신을 치장하지만 피해자를 외면하고 잠시라도 그들과 동조했던 미자, 이들 중 나체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바라본 이는 미자 말 곤 없다. 시란 이런 부끄러운 자신과 마주하고 올바른 세상을 만들기 위해 쓰는 것이다. 


요즘은 시가 죽어가고 있어요.”라는 김용탁 시인의 말은 시의 가치가 점점 변질 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시란 어느새 겉면의 아름다움만을 찾는 것으로 인식되고 그 속에 담긴 아픔과 부끄러움은 점점 잊히고 있다. 미자는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온전히 마주하고 몸이 부서진 후에야 시를 적게 된다. 마치 땅에 떨어진 살구처럼, 시란 시인이 부끄러움과 아픔으로 부서져야 세상에 나오는 것이고 이를 통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다. 시를 적은 사람은 미자 밖에 없다. 부끄러움을 알고 온 몸을 부숴 시를 적은 사람은 미자말 곤 없다. “시를 쓰는 게 어려운 게 아니라 시를 쓰는 마음을 갖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사람마다 각자 죄책감을 갖고 살아가지만 시를 쓰는 마음으로 자신을 부수며 속죄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시를 쓰는 것이 자신의 부끄러움과 마주하는 과정인 것처럼 속죄의 과정 또한 불완전했던 자신과 마주하는 과정이다. 영화 『시』는 속죄의 무게에 대하여 말한다. 금전적인 배상을 피해자를 향한 속죄라고 말하는 부모들과 자신의 몸을 부숴가며 피해자의 마음을 이해하고자한 미자, 같은 속죄지만 그것이 갖는 무게는 다르다. 피해자를 갖는 마음의 상처를 외면하고 금전적인 배상만으로 무마하려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어버린 오늘날의 현실, 감독은 이 불편한 현실에서 시가 더욱 필요하다고 말한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마주하려 하지 않는다. 사과의 의미가 가벼워진 오늘날의 현실에서 사과의 의미를 제대로 바라보려 하는 사람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자신의 부끄러움과 마주하고 자신의 몸을 부숴 온몸으로 속죄를 하는 것 그것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과정이고 시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첫 단계이다. 영화는 개인과 사회에게 있어서 진정한 속죄란 무엇인지 말해주고 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은 자식을 잃은 부모의 이야기를 피해자의 입장에서 전달한다. 하루아침에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에게 어떤 말과 행동이 위로가 될 것인가? 쉽게 단정 지을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이 치유해줄 수 있다는 주변의 권유에도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그 사랑이 크다면, 왜 우리 아들을 데리고 가셨나요?”라는 대답이 올 뿐이다. 작은 햇빛 속에도 주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는 말도 그녀에겐 쉽사리 다가오지 못한다. 영화의 주인공 신애는 죽은 남편의 고향인 밀양에 내려가서 아들과 함께 사는 것을 선택한다. 그녀는 밀양에 내려오자마자 카센터 직원 종찬의 도움을 받는다. 그녀는 밀양의 뜻을 한자로 풀면 은밀한 햇빛이라 말한다. 그녀는 이 햇빛을 참 중요시 여긴다. 개업 소개 차 찾아간 옷가게에서도 이 가게에 햇볕이 잘 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이청준의 소설 “벌레 이야기”의 내용을 기반으로 창작된 영화 밀양, 영화가 소설과 다른 점을 보인 부분은 바로 제목 “밀양”에 있다. 은은한 햇빛이란 의미로 영화 내내 강조되는 밀양이 지니는 상징은 소설과 영화의 차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 신앙을 접하게 되는 이들에는 신애 만 있지 않다. 신애를 따라 교회에 나가게 된 종찬, 신애의 아들을 살해한 웅변학원 원장, 신애와 같은 교회를 다니는 성도들 과 같이 종교는 은은한 햇빛처럼 모두에게 열려있고 누구에게나 다가온다. 신애는 종찬에게 왜 교회 오냐고 묻는다. 신애는 종찬의 의도를 의심하고 그의 믿음을 평가하고 그를 깎아 내린다. 신앙이 없었을 적 염세적이었던 자신의 모습을 잊어버린 채 어느새 그녀는 누군가를 평가하고 깎아 내린다. 종찬이 교회에 나오는 이유는 비록 신애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일지 몰라도 그의 행동 자체가 시험 받고 비난 받을 이유는 없다. 종교를 향한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우연히 교회에 들어온 신애가 종교로 귀의했던 것처럼 종찬 또한 그 시작은 신애에 대한 마음으로 시작했으나 종교를 통해 변화 될 수 있는 것이다. 신애는 우연히 종교에 발을 들이게 되었던 과거 사실을 잊은 채로 자신만의 믿음만을 중시여기고 타인의 것을 비난하고 평가한다.


은은한 햇살 같이 찾아오는 종교의 사랑은 신애의 아들을 죽인 이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신애는 직접 웅변학원 원장을 용서하기 위해 그를 찾아가지만 웅변학원 원장은 자신도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제 죄를 용서해주셨거든요” 종교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것이다. 그것이 원장처럼 죄를 진 사람이든, 종찬과도 같이 한 여자에 대한 사랑으로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든, 신의 사랑은 누구에게나 은은한 햇살처럼 다가온다. 하지만 그 원리가 인간에게 쉽게 이해될 수 없다. 은은한 햇살은 죄를 진 자에게도 짓지 않는 자에게도 다가온다는 이 단순한 사실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인간의 구원이란 인간끼리의 책임과 관계 속에서 용서받은 다음 이루어지는 것이고 인간의 한계를 벗어났을 때 마지막으로 신 앞에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윤리나 용서를 비껴가 곧바로 신하고 직교하면 비인간화하게 된다.


-이청준 작가-



신애는 자신이 용서하지 못했는데 신께서 그 사람을 용서해 주셨다는 것에 원망을 느낀다. 신의 사랑은 누구에게나 은은한 햇살같이 다가오기 때문에 죄를 진 자라 해서 용서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인간 사이의 용서와 책임 없이 신의 사랑을 이해하라고 한다면, 곧바로 사람들은 원망을 느끼고 슬픔을 느끼게 되기 마련이다. 신의용서와 인간의 용서는 다르며, 인간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는 이상 인간은 신의 사랑을 절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후 신애는 용서할 기회조차 없애 버린 하늘을 원망하며, 종교행사를 방해하거나, 장로를 유혹해 성관계를 유도한다. 신애는 급기야 자살을 시도한다.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의 자살로 결말을 맺는 원작 소설의 결말과는 달리 영화는 주인공 신애에게 약간의 햇빛을 전해주며, 마무리 된다. 신애는 응급실에 실려가 살게 되고 치료를 받고 퇴원하게 된다. 퇴원 후 머리카락을 자르기 위해 그녀가 간 곳은 웅변학원 원장의 딸이 일하고 있는 미용실이었다. 신애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그곳을 나와 버린다. 신애는 자신을 이곳에 데려온 종찬에게 화를 낸다. “왜 하필 오늘 이집이냐고요” 신애가 그 날 이집에 온 것은 우연이 아닐 지도 모른다. 다른 날이 아닌 퇴원 후 첫날 원장의 딸과 마주친 건, 그녀에게 다시 주어진 용서의 기회일 지도 모른다. 하늘은 신애에게 용서할 마음은 주지 못했지만 용서할 수 있는 기회를 계속해서 주고 있는 것이다. 신애는 자신이 예전에 들렀던 옷집의 사장님과 만나게 된다. 옷 집 사장은 신애의 말대로 햇빛이 잘 드는 쪽으로 인테리어를 바꿨고 그렇게 했더니 매출이 올랐다고 말한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신애의 바람은 알게 모르게 이뤄지고 있다. 거울을 들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직접 자르는 신애, 그 순간 종찬이 들어와 뒤에서 거울을 잡아준다. 그 순간 그녀의 뒤로 은은한 햇빛이 비추며 영화는 마무리 된다. 아이를 잃은 부모의 자살로 끝나는 소설의 결말과 달리 이 영화는 신애가 용서를 못했을지 언정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로 결말을 맺고 있다. 소설과 영화 모두 인간관계에서의 용서와 이해가 이뤄지지 않은 채 유지하기 힘든 신앙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영화가 소설에 비해 조금은 더 희망적이다. 신애는 끝내 자신을 이렇게 만든 원장을 용서하지 못했다. 하지만, 퇴원 후 첫날, 원장의 딸과 만났던 것처럼 신은 신애에게 용서할 기회를 주고 있다. 또 신애의 말에 따라 인테리어를 바꾼 가게의 원장의 모습에서 보다시피, 신애를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도 점차 바뀌어가고 있다. 신은 신애에게 보이지 않지만 은은한 햇살처럼 그녀의 길을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신애는 가해자를 용서하지도 않았고 그녀의 이야기도 마무리 되지 않은 채 영화는 끝났다.



이 영화는 용서라는 종교의 가르침이 꼭 실천되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영화는 용서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신애의 선택이라 말한다. 신애가 원장의 죄를 용서하지 않고 종교적인 치유를 거부했어도 영화는 그 자체로 신애의 삶을 응원해주고 있다. 그녀 곁에 끝까지 남아있는 종찬은 신애를 향한 은밀하고도 지속적인 사랑을 보여준다. 신애에게 필요한 것은 용서하라는 종교의 가르침이나 연민의 시선이 아니다. 종찬과도 같이 그녀에게 은밀하고도 지속적인 관심과 응원을 해주는 것이다. 밀양이란 제목은 “은은한 햇살”을 의미한다. 이 햇살은 신애를 향한 보이지 않는 신의 사랑이라 해석할 수 있다. 영화 속에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성경의 말씀을 누구보다 잘 따랐던 이는 종찬이다. 종찬은 신애에 대한 마음으로 교회에 나왔지만 오직 순수한 사랑으로 그녀의 곁을 지켰다. 보이지 않는 햇빛은 신애에 대한 종찬의 마음을 상징하기도 한다. 멀리서 신애를 지켜봐준 종찬의 마음처럼 신 또한 멀리서 그녀를 지켜보고 위로해줬을 것이다. 신은 때론 신앙이 없는 사람들을 통해서도 자신의 뜻을 전하기도 한다. 작게 내리비추는 햇살에도 신의 뜻이 있듯, 신애의 괴로웠던 삶에도 비밀처럼 그녀를 비추는 햇살은 어디에서나 존재했을 것이다. 결말과 달리 영화는 종교의 의미를 매우 긍정적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작게 내리비췄던 햇살과도 같이 신의 은밀한 계획은 언제나 신애를 향하고 있었다고 잔잔히 말한다. 이 영화는 견딜 수 없는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삶에도 은밀한 햇살과도 같은 신의 사랑이 언제나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한다. 이창동 감독은 인간의 마음으로 이해되지 않은 신앙과 용서의 원리를 영화 속에 담아냄과 동시에, 그럼에도 은은한 햇빛으로 다가오는 신의 사랑에 대해 말해주었다. 피해자들에게 용서의 필요성을 알려주기 보단 그들의 삶을 위해 지속적이고 은밀한 관심과 응원은 전하고 그들 곁에 여전히 신의 은밀한 사랑이 함께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이것이 이창동 감독이 보여준 피해자를 향한 배려이다. 용서의 결정은 결국 그것을 겪은 피해자에게 있다. 용서의 과정을 영화의 서사를 통해 보여주거나 종교적 가르침을 통해 강요할 필욘 없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지속적이고 은밀한 응원과 사랑이다.



이창동 감독은 문학을 다룬 영화 두 편을 통해 진정한 속죄와 용서의 의미란 무엇인지 묻는다. 두 영화는 시를 적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의 모습을 통해 그 사건을 직면해야하는 가해자와 피해자 마음을 보여준다. 가해자의 마음 속 죄와 피해자 마음에 새겨진 상처는 시와 종교라는 소재를 통해 연출된다. 위의 두 가지 소재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것들이다. 용서와 속죄의 과정을 폭력적인 방법이나, 극적인 상황으로 연출하는 이타 영화들과 달리 그의 영화는 그 과정이 일상에 자연스럽게 녹아 들 수 있도록 한다. 그러기에 그의 영화들은 가볍고도 무겁다. 성폭행, 자살, 유괴와 같이 끔찍한 사건을 다루지만 그것을 다루는 과정은 우리의 일상과 연결된다. 대중매체 속에서 흔하게 다뤄지는 속죄와 용서의 이야기는 이젠 더 이상 영화나 소설 안의 문제만은 아니다. 영화 속의 용서와 속죄의 과정은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와 함께 해결되지만 오늘날 우리가 갖고 살아가는 죄와 용서의 문제는 쉽게 해결되진 않는다. 이젠 이러한 문제에 대해 묻는 콘텐츠들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어느 누가 각자가 지닌 죄에 대해 쉽게 말할 수 있을 까? 필자가 이창동감독의 영화를 높게 평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의 영화들은 각자가 갖고 있는 죄의 문제에 대해 돌아보게 한다. 용서와 속죄의 과정을 플롯을 위한 극적 장치로만 활용하는 콘텐츠가 많아지는 오늘날, 이 문제에 대한 심도 있는 접근을 한 콘텐츠는 찾아보기 힘들다. 속죄와 용서라는 불편하고 무거운 문제에 대해 오늘날의 콘텐츠는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할 것인가. 이창동감독의 영화는 그 근원적인 문제를 우리들에게 전해준다.


 

『결론』

5.오늘날의 대중문화 콘텐츠가 가야할 방향


죄를 진 악인이 누군가에 의해 처벌당하는 단순한 서사는 관객에게 통쾌함과 답답한 감정의 해소를 전해준다. 하지만 그 죄를 진 사람이 만약 나거나 우리의 주변의 누군가라면 우리는 그 장면을 보며 쉽게 손가락질을 하고 비난할 수 있을까? 속죄와 용서의 문제가 우리 자신의 것으로 다가오면 누구나 다 불편한 감정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대중문화의 콘텐츠들은 이 문제들로부터 관객들과의 거리를 두고 묘사한다. 마치 사회 어딘가에는 존재하지만 관객들과의 접점이 없는 악인들이 나오고 어느 정의로운 한 명 혹은 단체에 의해 그들은 처단 된다. <범죄도시>, <아저씨>, <베테랑> 등 여태 대중 매체는 사회 어딘가에 있지만 관객들과 관련이 없는 악인들에 대한 보복을 말해왔고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죄와 용서의 문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대중문화는 오락성을 추구하기에 이것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까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오늘날의 대중문화는 지나친 자극성과 오락성으로 인해 피해자가 갖는 내적인 심리를 매우 단순화시키거나 피해자의 보복을 정당화하는 데 너무나 많은 중점이 가있다. 피해자가 겪는 내면의 아픔을 단순히 분노라는 감정으로 일반화 시키고 이 감정에 관객들이 동화되도록 만든다 .『밀양』 속의 신애처럼 피해자의 마음엔 가해자를 향한 원망과 분노도 있을 것이고 자신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상을 향한 반항도 있었을 것이고 자신보다 가해자를 먼저 용서한 신을 향한 분노도 있을 것이다. 가해자가 자신의 손주이고 피해자를 향해 합의금을 제공해주면서 내적인 갈등을 겪는 『시』 속의 미자 할머니를 절대적인 악이며 보복으로 대상으로 볼 수 없다. 이처럼 죄의 문제는 복합적이고 다양한 시선을 통해 그려질 수 있다. 이 무거운 주제를 대중문화의 콘텐츠가 온전히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피해자의 아픔을 잠시라도 생각해보게 만들 순 있다. 영화가 그 감정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관객에게 느끼게 함으로써 그들이 겪는 감정과 삶에 대해 생각하게 할 수 있다. 이를 잘 보여준 예로 이한 감독의 영화, <증언>을 들 수 있다. 살해 현장을 목격한 장애인 소녀와 그 소녀를 취재하는 변호사의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는 끔찍한 현장을 목격한 소녀, 지우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그녀의 감정과 그녀가 살아온 삶에 대해 관객들에게 생각할 여지를 남겨둔다. 이와 같이 피해자가 겪는 감정과 삶에 대해 생각할 여지를 남겨두는 콘텐츠도 오늘날에 찾아볼 수 있지만 아직은 그 수가 턱없이 부족하다.


몇몇 영화들은 가해자를 향한 직접적인 욕설을 통해 그 분노를 보여주고 관객들을 심리적으로 동조하게 만든다. 관객들은 그 장면의 정서에는 공감하지만, 그것을 겪는 피해자의 정서는 어느 샌가 잊어버리게 된다. 영화가 피해자들의 삶에 공감할 수 있는 가장 올바른 방법은 그들의 삶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의 감정을 직접적인 대사로 전하지 않고 관객들에게 생각할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다. 이를 통해 관객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들의 감정을 느끼고 위로하고 체험하게 된다. 오늘날의 대중문화 콘텐츠엔 가해자를 향한 불꽃 튀는 비난만이 가득하고 피해자를 향한 은은한 햇살 같은 관심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젠 불꽃 튀는 비난 보단 피해자를 향한 은은한 햇살 같은 관심이 필요하다. 대중문화 콘텐츠가 피해자들의 삶에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길 희망하며 본고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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