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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 Jan 04. 2023

스무살에 읽은 니체의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고

 

니체의 이름을 처음 접했던 것은 고등학교 2학년 <윤리와 사상>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현대 철학을 가르치면서 니체를 언급하셨다. 쇼펜하우어의 철학과 니체의 철학을 비교해 가며 설명을 해주었고 그 당시 내가 아는 니체는 “신을 부정하는 자”에 불과했다. 기독교 신자였던 나에겐 “신은 죽었다”라는 파격적인 발언은 매우 불쾌했고 나로 하여금 니체의 철학을 회피하게 만들었다. 나에게 그는 보편적 진리를 거부하는 삐뚤어진 사람이었다. 대학교 1학년 여름 방학 시기에 나는 플라톤의 이름을 접했고 그가 말하는 이데아와 이상 국가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인간의 인식할 수 없는 이상의 세계 ‘이데아’가 존재한다는 사고는 지나치게 관념적이었기 때문에 내 상황과 관련지어서 이해하기 힘들었다. 나에겐 조금 더 실용적인 철학서가 필요했고 교양으로 남는 책이 아닌 내 생활에 바로 적용될 수 있는 철학서가 필요했다. 실용적인 철학서를 찾던 도중 삼촌은 나에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추천을 해주었다. 이 책의 저자 ‘니체’라는 이름을 보았을 때 나는 곧 바로 거부감을 느꼈다. “어째서 신을 부정하는 사람의 책을 읽으라는 거지?, 그렇다면 그는 왜 신을 부정했을 까?, 왜 신을 부정할 수 밖 에 없었을 까?, 니체가 말하는 신은 정말로 내가 믿는 신(여호와)일까?, 쇼펜하우어와 니체가 말하는 허무주의의 차이는 무엇일까?,”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이런 의문들이 내가 몇 년간 기피했던 니체의 책을 읽게 한 계기가 되었다. 그에 대한 오해를 푸는 것을 목표로 나는 니체에게 다가 갔다.




이 책은 “배화교”라고 부르는 조로아스터교의 영어식 발음 “차라투스트라”를 책 제목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조로아스터교는 선과 악의 대립을 강조했다. 이러한 생각에 영향을 받은 서양철학은 선과 악을 확실히 나누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관념적으로 인식되는 세상이 존재한다는 플라톤의 이데아론, 육체적인 욕구는 좋지 못한 것이며 오직 이성에 따른 합리적인 판단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이 이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이분법적인 사고는 당시 사람들로 하여금 지나친 이상주의에 빠지게 만들었고 현실을 저버리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 책의 주인공 “차라투스트라”는 이런 이분법적인 사고를 지지하는 인물일까? 역설적이게도 그렇지 않다. 이 책은 이분법적인 사고를 대표했던 조로아스터교(차라투스트라)를 전면에 내세운다. 이분법적인 사고의 성찰을 통해 당시 사회를 지배해왔던 낡은 사고를 비판하고 현대 철학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준다. 이분법적 사고로 대표되던 조로아스터교(차라투스트라)가 이 낡은 사고를 거부한 것은 당시 서양철학이 극복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니체가 바라본 당시 서양철학의 문제점은 무엇이며 이에 대한 극복 방안은 무엇일까? 책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알아보도록 하자.



이 책은 10년간 산속에서 고독을 즐기던 차라투스트라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진 수행을 마친 그는 산에서 내려와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하려 한다. 그는 산에서 내려와 성자와 마주하게 된다. 성자가 그에게 산에 내려온 이유를 묻자 그는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산에서 나왔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자는 불완전한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어리석인 짓이라고 말하며 그의 행위를 비난한다. 여기서 성자가 가치를 두는 것은 ‘인간’이 아닌 ‘신’이다. 즉 물리적인 세상이 아니 관념적인 세상을 의미한다. 성자는 물리적 세계에 가치를 두지 않으며 이상, 신과 같은 모호하고 관념적인 가치에 집착한다. 이는 당시 서양철학이 실재하는 세상으로부터 멀어져 있었고 모호하고 관념적인 것에 집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산에서 내려온 차라투스트라가 군중들에게 전했던 것은 바로 ‘신의 죽음’이다. 그렇다면 차라투스트라가 말했던 ‘신의 죽음’ 은 무엇을 의미한 것일까? 그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여호와)를 비난하진 않았다. 그 역시 신은 완전하지만 인간은 불완전 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렇다면 완전한 신을 거부하고 인간을 택한 것일까? 이것을 알아보기 위해선 당시 유럽 사회를 지배해왔던 사고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서양의 아버지 ‘플라톤’은 물리적으로 인식될 수 없는 관념적인 세계 ‘이데아’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이 사상은 오랜 기간 동안 유럽사회를 지배했고 사람들로 하여금 이상에 집착하고 현실을 거부하게 만들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상에 지나친 강조, 신을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 들이 현실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즉 그가 말하는 신의 죽음은 ‘지나친 관념주의의 종결’을 의미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신의 죽음을 주장함으로써 현실에 충실하기를 주장한다. 하지만 그 역시 이상은 관념 속에서 완전할 수 있지만 현실은 불완전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여기서 한 가지의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데 이는 ‘이상을 향한 집착이 끝난 지금 불완전한 현실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이다. 이에 대해 차라투스트라는 한 가지 방안을 제시한다. ‘불완전한 현실은 우리들로 하여금 허무주의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허무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현실을 긍정하는 것이다.’라고 차라투스투라는 말했다. 현실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때 인간은 그 자체로 완전해 질수 있다고 본 것이다. 또 이런 긍정은 인간의 웃음을 통해 이루어 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디오니소스적 유희”로 무한의 긍정을 의미한다. 현실을 그대로 긍정함으로써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다.



이렇듯 니체에게 있어서 “실재하는 것”은 큰 의미를 지녔다. 그는 실재가 갖는 ‘의지’를 강조했는데 그에게 있어서 의지란 존재를 입증 시켜주는 것이었다. “돈을 많이 벌고 싶다”, “아름다워지고 싶다” 등 이 의지의 예시로 될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의지가 인간을 허무주의에 빠뜨리는 원인이라고 주장한 반면, 니체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는 목표를 추구하는 행위가 인간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라 보았다. 그는 실재하는 것이 갖는 의지를 ‘힘의 의지’라 불렀으며 이런 ‘힘의 의지가 있을 때 인간의 삶은 고결해 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끊임없이 목표를 추구하며 스스로를 발전시키는 것, 이것이 그가 말한 고귀한 삶인 것이다.


또 본질에 대한 그의 생각은 이전의 철학자들과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플라톤’은 관념으로 만 인식 될 수 있는 세계 ‘이데아’를 주장했다. ‘플라톤’은 우리가 지각할 수 없는 세계 ‘이데아’를 제시함으로써 인식의 한계를 말했다. 동시에 이데아와 같은 절대 진리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니체는 이런 생각을 거부했다. 그는 사물이란 인간이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과일 장수에게 사과란 장사에 필요한 물품에 불과하다. 한 과학자는 사과를 통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해 냈고 시인들은 사과를 인간의 욕망을 빗대는 보조관념으로 사용되기도 한다.이처럼 사과하나를 가지고도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듯이 관점에 따라 여러 해석이 나올 수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또 그는 플라톤이 제시한 절대 진리에 반기를 들었는데 그에게 있어서 지식이란 익히고 습득하는 것이 아닌 매일 해석되고 창조 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연속적인 해석과 창조가 있을 때 인간의 지적인 역량은 성장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있어서 지식은 절대적 진리로 머무는 적이 아닌 매일 해석 되고 창조되는 것이었다.


당시 서양 철학을 지배해왔던 ‘지나친 관념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정신을 중시하고 신체를 등한시 하는 삶을 살게 만들었다. 성자들은 고귀한 정신을 지키기 위해 신체적 욕망을 제어하는 교리를 만들고 고귀한 정신을 위해 신체를 혹사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니체는 이런 행위를 비판하는데, 그에게 있어서 신체란 정신과 육체를 포한 제 3의 대상이었다. 정신과 육체를 분리해서 생각했던 이전의 철학자와 달리 그는 정신과 육체를 하나로 보았다. 그는 인간의 이성이 작동하기 위해선 신체적인 욕망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체란 욕망만을 지닌 껍데기다 아닌 이성, 의지를 포괄하는 하나의 유기체인 것이다. 즉 인간의 존재는 인간의 신체 ‘그 자체’ 인 것이다. 니체는 우리의 신체를 부정하지 말고 신체를 사랑하라고 말한다. 또 그는 자신의 육체에 대한 사랑이 선행되어야만 타인에 대한 이타심 또한 발휘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현실을 긍정하지 못하게 하는 외부적인 힘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본인의 삶을 부정하게 만드는 외부적인 힘을 ‘중력의 영’이라고 이는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중력의 영”을 극복할 방법으로 ‘웃음’을 제시한다. 니체는 웃음만이 중력의 영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중력의 영’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낙타, 사자, 어린아이 3가지 단계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가장 낮은 단계인 낙타는 “중력의 영에 쉽게 굴복하는 존재를 의미한다. 낙타에게 힘에 의지란 찾아 볼 수 없으며 현실의 주어진 대로 살아갈 뿐이다. 두 번째 단계인 사자는 ‘중력의 영’에 적극적으로 맞서는 존재를 의미한다. 평소 소신이 뚜렷하고 절대적인 권위에 반대할 수 있는 사람이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사자는 힘에 의지에 따라 소신 있게 행동하지만 긍정과 웃음을 소유할 순 없다. 따라서 사자는 ‘중력의 영’에 대항할 수 있지만 ‘중력의 영’으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다. 마지막 단계인 어린 아이는 웃음과 긍정을 지닌 존재이다. 그에게 있어서 ‘중력의 영’은 투쟁이 대상이 아닌 놀이의 대상이 된다. 그는 긍정함으로써 중력의 영에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이렇듯 니체는 순응과 투쟁이 아닌 긍정과 웃음을 최고의 가치로 두었다.


니체는 ‘신의 죽음’을 말함으로써 낡은 도덕, 형이 상학, 신앙 과 같은 가치를 부정했다. 그는 오랜 시간동안 서양 사회를 지배해왔던 가치가 사라졌을 때 생길 혼란을 알고 있었다. 그는 신, 형이 사학, 낡은 도덕에 집중되었던 사람들의 사고를 전환하고자 ubermansh(넘어선 인간)을 제시한다. 한국어로는 “초인”으로 번역되는 “위버맨쉬”는 인간적인 것을 넘어선 인간을 뜻한다. 이는 초능력을 가졌거나 지능이나 능력 면에서 뛰어난 인간을 의미하지 않는다. 니체가 말하는 “위버맨쉬”란 헛된 것에 집착하지 않고 현실에 충실히 살아가는 사람이다. 또 그는 위버맨쉬란 힘에 의지를 통해 매일 자신을 극복해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쉽게 말해 위버맨쉬란 현실에 충실하며 현재 자신을 극복하는 사람이다. 인간적인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바로 안주하려는 자세, 무언가에 의지하려는 자세이다. 니체는 진정한 위버맨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런 자세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위버맨쉬란 어떤 과정을 통해 이뤄 낼 수 있을 까? 이에 대해 니체는 끊임없이 자신을 파괴하는 행위를 통해 이뤄 낼 수 있다고 말한다. 더 발전된 자신을 만들기 위해 기존의 자신을 파괴하는 것 파괴를 통한 극복이 선행되어야만 위버맨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위버맨쉬를 실현한 사람은 현재까지 존재했었는가? 이에 대해 니체는 위버맨쉬를 실현한 사람은 현재까지 존재하지 않는다고 얘기한다. 이 책의 주인공인 차라투스투라도 위버맨쉬를 향해 나아가는 인간이긴 하지만 위버맨쉬를 실현시킨 인간은 되지 못했다. 이는 차라투스트라 의 방법이 위버맨쉬로 가는 절대적 기준은 아니라는 것을 독자에게 시사한다. 위버맨쉬로 가는 절대적 기준은 없으며 인간은 위버맨쉬로 가기 위해 각자 나름의 방법으로 스스로를 극복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니체는 본인의 생각이 절대적인 진리가 되는 것을 거절했고 결국 독자들에게 위버맨쉬라는 과제를 남겨 놓고 이 책을 마친다.


 

니체의 철학이 우리에게 시사한 바는 무엇일까? 바로 ‘절대적 진리에 대한 거부 일 것이다. 그는 절대적 진리를 거부하기 위해 인간 이라는 존재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인간의 육체가 그저 욕망만을 가진 껍데기가 아닌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또 의지에 따라 행동하는 인격페로 본 것이다. 그렇게 그는 인식하는 것의 가치를 확립 시켰고 존재가 인식하기에 따라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 책도 마찬 가지일 것이다. 우리가 이 책에서 전하는 바를 어느 관점에서 바라보는 가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다. 니체의 말이 틀렸다고 주장할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니체의 말에 동의하는 사람 또한 있을 것이다. 이 책이 독자들의 사고를 발전시키는 데는 기여할 수 있지만 절대적 기준은 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니체의 생각에 대한 탐구 또한 계속해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위버맨쉬가 자기 파괴를 통해 극복되듯이 그의 생각 또한 파괴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니체가 우리에게 남긴 하나의 숙제일 것이다.




니체와 함께한 한 달


이 책에 다가가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이 책은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해 설명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책이 전하는 바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다. 이 책을 여러 번 읽고 참고문헌을 읽어 보았을 때 책이 시사 한 바를 이해 할 수 있었다. 니체 또한 이 책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정답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위버맨쉬가 되기 위해선 우리는 매일 기존의 자아를 파괴하고 새롭게 창조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 책이 위버맨쉬로 가는 방법의 정답으로 정해진다면 위버맨쉬의 탐구 범위는 극히 좁혀 질 것이다. 니체는 이 책을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이기 보단 우리 나름의 방식으로 받아들여져 매일 새롭게 해석되기를 원했을 것이다. 니체는 “‘절대진리’는 우리의 지적 발전 가능성을 막고 인간을 창조하고 성장하는 존재가 아닌 습득하고 수동적인 존재로 만든다.” 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나 또한 이 책이 전하는 바를 위버맨쉬로 나아가는 지표는 될 수 있지만 정답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가르치지 않는 다는 것이다, 독자들에게 지식을 가르치는 방식이 아닌 지식에 대한 의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니체는 인간을 능동적인 존재로 보았고 우리의 스스로의 능력을 끌어올리기를 원했다. 형이 사학, 낡은 가치, 관념론에서 벗어나 창조적인 생각을 하는 진정한 ‘자유로운 인간이 되길 원했던 것이다. 나는 그동안 니체를 어떻게 바라봤던가? 그는 나에게 ’신을 부정한 자‘이었다. 하지만 그는 우리에게 생각의 자유를 선사한 “해방자” 이었다.그를 단순히 염세주의자, 아나키스트라고 속단한 것을 반성하게 되었다. 이 책을 읽은 후로 나는 어떤 지식을 습득하더라도 개인적인 사고의 시간을 갖는다. “이 지식이 나에게 어떻게 활용될 수 있을 까?”, “나는 과연 이 지식은 올바른 지식일까?” 와 같은 사고의 과정을 거친다. 나 또한 니체의 사고를 매일 재해석 할 것이며 나에게 맞는 방식으로 적용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생각을 내 삶에 어떤 방식으로 적용할 수 있을까? 그가 말했듯이 우리 모두는 중력의 영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현실에서 느끼는 허무함, 포기하려는 마음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인간적인 것’들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 까? 니체는 중력의 영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3가지 단계로 나눠서 설명했다. 이는 낙타, 사자, 어린아이 인데, 나는 여기서 내가 어느 단계에 속할지 고민해 보았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낙타 단계이었다. 주어진 지식에 수동적으로 순응했으며 창조적인 사고란 찾아 볼 수 없는 동태의 눈을 하고 살아왔다. 힘에 의지 또한 존재하지 않아 내 스스로 무언가를 이뤄 내고자 하는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 가면서 나는 사자의 단계로 진보했다. ‘toeic시험 준비’, ‘고전 독서’, ‘우수한 학점 취득’ 과 같은 목표가 생겼고 힘에 의지에 따라 생각하기 시작했다. 회의적인 생각이 들 때마다 떨쳐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나는 중력의 영과 맞서 싸웠지만 중력의 영에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나의 목표를 좇느라 내 삶을 긍정하지 못했고 어느새 나는 웃음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힘에 의지를 가졌지만 긍정과 웃음을 가지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그 다음 단계인 어린아이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나에게 주어진 일을 의무가 아닌 놀이라 생각하고 하루를 투쟁이 아닌 긍정을 통해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투쟁의 삶이 긍정의 삶으로 가기란 쉽지 않다. 내 삶을 긍정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만 매일 긍정하며 나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지금은 사자와 어린아이의 중간 단계에 있다고 볼 수 있지만 언젠가는 어린아이의 단계의 도달하여 진정한 위버맨쉬(ubermansh)에 도달 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이 책을 읽을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지 않았거나 이 책을 읽고자 하는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이 책은 수동적인 인간을 위한 책이 아니라는 점이다. 수동적으로 책의 정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인간은 이 책을 읽을 자격이 없다. 반면 책을 읽고 책의 내용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자세를 가진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을 자격이 있다. 또 의지가 없는 사람은 이 책을 읽을 자격이 없다. 자신이 처한 현실을 매일 회의적으로 바라보고 극복하려는 생각이 없는 사람이 이에 속한다. 그들에게 이 책은 올바른 좌표가 되어주지 못 할 것이다. 반면 매일 현실을 극복하며 살아가는 사람에게 이 책은 올바를 좌표가 되어줄 것이다. 마지막으로 니체는 인간이 가진 최대의 가치로 웃음을 얘기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이 긍정의 삶으로 나아가길 희망했다. 만약 당신이 이 두 가지의 조건에 만족했다면 이 책을 통해 긍정의 삶으로 나아가야한다. 긍정에 다가 가는 가장 쉬운 방법은 ‘웃음’이다. 니체는 이러한 웃음만이 중력의 영을 죽일 수 있다고 얘기한다. 우리는 중력의 영과 맞서 싸울 필요가 없다. 그저 웃음을 통해 중력의 영을 극복하면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웃음을 통해 긍정의 삶으로 다가갔다면 그다음 단계는 니체의 사고를 재해석 하는 것이다. 니체의 생각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제시하고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을 스스로 찾아내는 것이다. 이처럼 파괴를 통한 극복의 과정이 이루어졌을 때 독자들은 위버맨쉬에 더 가까워 질 수 있을 것이다.


이전까지의 철학은 철학자들의 논쟁거리에 불과했다. 대중들에게 철학이 전해지는 쉽지 않았고 철학이 인간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일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니체는 대중들에게 철학이 적용될 수 있는 통로를 말해준 것이다. 이는 인간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전시키는 실용주의 철학의 장을 열어 준 것이다. 니체는 인간이 가진 최고의 무기는 웃음과 긍정이라고 주장한다. 우리 스스로 긍정과 웃음을 장착하고 중력의 영에 대항할 필요가 있다. 또 우리는 매일 위버맨쉬에 도달하기 위해 스스로를 파괴해야 된다. 기존의 자신을 파괴하는 일은 어쩌면 두려운 일일 수도 있다. 한계를 직면해야 되며 끝없는 도전 속에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어제의 본인과 오늘의 본인이 같다면 그것은 제자리걸음에 불과할 것이다. 어제의 자신을 파괴하고 내일의 발전된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 이것이 니체가 우리에게 준 하나의 과제일 것이다.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이 세상이 주는 압박 속에서 절대 자유로울 순 없다. 어떤 사람은 시험성적에 의해 본인의 삶을 비관할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제정문제에 의해 본인의 삶을 비관할 수 있다. 하지만 니체는 “세상이 주는 압력에서부터 자유”를 얘기한다. 문제를 투쟁의 대상으로 보기 보다는 놀이의 대상으로 보라고 말한다.사소한 것에 얽매이지 않고 즐기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인간이 가진 능력은 극대화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제 니체의 생각을 우리 삶에 적용할 때가 된 것이다. 그동안 나에게 있어 학업은 좋은 성적을 취득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니체의 사고를 내 삶에 적용하고 보니 학업은 즐기는 놀이가 되었고 끊임없이 탐구해야하는 대상이 되었다. 이로써 나는 좋은 성적을 잘 받아야 된다는 압박에서 벗어 날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읽은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바로 아모레 파티(AMOREーFATI) “자신의 삶을 사랑해라” 이다. 세상이 주는 압박은 우리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우리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세상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세상이 주는 압박에 굴복하지 말고 스스로를 긍정하라” 이것이 니체가 평생을 걸쳐 우리에게 전하고자 했던 핵심의 말일지도 모른다. 나는 몇 년이 지나도 이 책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을 절대 기준으로 두지 않을 것이다. 내 스스로의 의지로 “위버맨쉬”로 가는 길을 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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