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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 Jan 04. 2023

고통을 견딘 시대의 기록

-김훈 소설 『칼의 노래』, 『남한산성』에 대하여-

『서론』

 

1.고통을 견디는 역사, 개인과 국가의 무력함에 대하여


김훈의 장편 소설 『칼의 노래』와 『남한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전쟁을 배경으로 한다. 이 배경을 통해 두 소설은 고통스러운 삶을 견디는 인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끝없이 몰려오는 적들을 베어도 끝나지 않은 전쟁터는 고통과 허무의 공간이다. 김훈의 두 소설은 이 고통의 순간을 묘사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전쟁에서 입은 상처, 긴 전쟁으로 인한 굶주림, 죽이고 죽여도 살기를 품고 달려오는 적군들, 긴 고통의 순간은 승리의 순간마저 허무함으로 채운다.


『칼의 노래』는 이런 전쟁을 감당해야 하는 무장, 이순신의 시선에서 그 고통을 전한다. 왜적들에 의해 자신의 아들과 지인이 살해당한 순간마저도, 조정의 명에 순응해야 하고 통곡하는 백성들을 놔두고 전쟁터로 향하는 무장의 운명을 그린다. 조정의 모함에 의해 투옥되고 가족마저 상실한 그의 울분은 소설에서 직접적으로 표현 되지 않는다. 다만 그의 말과 체험으로 그것이 전해질 뿐이다. 『칼의 노래』는 이순신의 내면적 체험에 대한 이야기이자, 그와 세상 간의 갈등을 그린 작품이다. 적들을 베어도 적은 다시 그의 군사들과 백성들을 벨 것이다. 승리의 순간마저, 누군가의 시체를 바라봐야 했던 그에게 전장에서의 승리와 전장에서의 죽음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소설은 이 끝나지 않는 고통의 기록들을 통해 그가 자신의 고통스러운 삶과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 지를 보여준다. 그에게 삶이란 견딜 수 없는 것들을 견디는 것이다. 『칼의 노래』는 견딜 수 없는 삶과 죽음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칼로 베어지지 않는 슬픔과 울분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고통을 견디며, 조정의 칼과 적군의 칼 사이에서 죽음을 선택해야 하는 남자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 가? 『칼의 노래』의 중심에는 삶의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내면이 드러나 있다. 본 고에서는 세 가지 제재를 통해 『칼의 노래』 속에서 이순신의 내면의 정서가 어떤 식으로 표현되어 있는 지 살펴보겠다. 


이와 달리 『남한산성』은 개인의 운명이 아닌 국가와 백성의 운명을 그린 소설이다. 병자년 겨울, 조선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진다. 적에게 무릎을 꿇는 치욕을 견디는 것과 죽음을 무릅쓰고 끝까지 버텨 죽는 것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끊이지 않는 전쟁의 고통 속에서 무엇을 선택하여도 조선은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뎌야하는 운명을 마주한다. 무엇이 더 나은 길이라고 쉽게 말할 수 없다. 최명길이 생각하는 더 나은 삶의 길과 김상헌이 생각하는 더 나은 삶의 길만이 있을 뿐이다. 소설은 정답을 말하지 않은 채 그 갈림길 사이에서 고통 받는 백성들을 그린다. 김상헌의 칼에 죽음을 맞이한 뱃사공, 아버지를 잃고 성으로 오게 된 나루, 가마니가 없어져 추위에 떠는 병사, 이들에겐 사는 것과 죽는 것이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소설은 조정이 선택해야 했던 삶과 죽음의 길이 사실 백성들에겐 포개어진 같은 길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백성들은 죽어도 그 존재 자체가 사라지지 않는다. 국가의 존엄이 짓밟혀도 백성들의 삶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며, 전쟁의 폐허만 남은 곳에서도 봄은 오고 백성들은 다시 살아간다. 조정이 오랜 시간 고민했던 삶과 죽음의 선택지가 백성들에겐 죽음과 삶을 교차하며 이어지는 같은 길이었다. 이 포개어진 길이 누구를 향해야 되는 가에 대해서도 김상헌과 최명길의 생각은 다르다. 최명길은 이 고통스러운 길을 임금과 백성이 함께 버티며 나아가야 한다 말한다. 이와 달리 김상헌은 고통스러운 길을 백성이 더 이상 걸어갈 필요는 없으며 조선을 붙잡고 있던 명분과 대의가 온전히 깨져야만 백성들에게 삶의 길이 열릴 것이라 말한다. 『남한산성』은 병자년 조선에게 주어진 선택지를 통해 삶에선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견딜 수 없는 것들을 견뎌야할 때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본고에서는 『남한산성』에서 말하는 두 가지 물음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다. 


두 장편소설의 공통적인 주제는 위에서 언급했듯 고통스러운 삶을 견디는 인간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 초점이 가리키는 방향은 다르다. 『칼의 노래』는 나라의 명에 의해 울분을 품고 전쟁터에 나갔던 한 장수의 내면에 초점을 맞추었다. 국가의 부당한 명령, 명과 왜적간의 은밀한 거래 와 같이 그를 둘러싼 주변의 모든 것들이 그의 칼로 벨 수 없는 것들이다. 장수로서 그 사명을 다하지만 주변 백성들의 죽음을 견뎌야하고 조정의 불합리한 명령에 따라야 하는 무력함, 이 무력함이 그를 둘러싼 세상과의 갈등을 더욱 고조 시킨다. 

세상은 칼로써 막아낼 수 없고 칼로써 헤쳐 나갈 수 없는 곳이었다. 칼이 닿지 않고 화살이 미치지 못하는 저쪽에서 세상은 뒤채며 무너져 갔고 죽어서 돌아서는 자들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목숨을 벨 수 있지만, 죽음을 벨 수 없다.


『남한산성』에서의 갈등은 개인이 아닌 국가 전체의 무력함에서부터 발생한다. 칸이라는 절대 강자에 의해 삶을 구걸하거나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약자의 무력함이 소설의 갈등을 고조 시킨다. 최명길과 김상헌 역시, 이 무력함 속에서 한 개인이 아닌 국가의 충신으로써 국가가 선택해야 하는 길을 말한다. 최명길은 적과의 싸움이 승산이 없을 거란 것을 알고 그들과의 화친을 주장하지만, 김상헌은 치욕의 역사를 막기 위해 날쇠를 시켜 조선의 군대에게 격서를 보낸다. 


"전하 살기 위해서는 가지 못할 길이 없고, 적의 아가리 속에도 삶의 길은 있을 겁이옵니다. 적이 깨뜨리기 전에 성단을 내려 주소서"


이렇듯 김훈은 막막한 현실 앞에서 무력함에 빠질 수밖에 없는 개인과 국가의 역사를 두 소설을 통해 담아내었다. 그가 이런 무력한 현실을 소설에 담아낸 것에는 무슨 의도가 있을까? 김훈 작가는 두 소설을 통해 삶이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견디는 것이고 하루를 사는 것 역시 매일 치열한 전투를 버티는 것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본고에서는 작가 김훈이 전하는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 말하며 마무리 짓겠다.



『본론』


2.『칼의 노래』를 관통하는 3가지의 서사

칼의 노래의 주제를 관통하는 3가지 서사는 이별, 무력함, 울분이다. 첫 번째로 살펴볼 것은 이별의 서사 이다. 부모와 자식의 죽음은 전장 속에서 그에게 조용히 전해진다. 이들에 대한 최소한의 추모나 이별의 인사마저 남기지 못한 허무한 죽음은 그의 모든 것을 무너뜨린다. 조정의 명에 의해 고문 받던 날 어머니의 시체는 땅에 묻혔고 명량에서 적의 함대를 무너뜨린 날, 그의 아들 면이는 적의 칼에 죽임을 당한다. 명량 전투 이후 그에게 다가온 것은 승리의 영광이 아닌 그가 사랑했던 여진의 시체이다. 칼과 화포로 다가오는 적들을 막을 순 있어도 누군가의 죽음까지 막을 수 없다. 잠시나마 물러간 적들은 다시 돌아와 그의 것들을 빼앗아갈 것이다. 그를 떠났던, 어머니, 면이 그리고 여진이와의 기억은 그의 감각을 통해 선명히 기록된다. 어머니의 아궁이 냄새, 어머니의 한 마디, 여진이의 날 비린내, 그녀의 몸의 촉각, 여진의 한 마디, 면이를 끌어 앉은 기억, 면이의 젖 냄새 등 과 같이 그 단편적인 기억들이 그의 삶에 쌓여가게 된다. 그 단편적인 기억들만 남긴 채 이별은 갑작스럽게 다가온다.


『칼의 노래』는 삶을 잃어가는 한 남자의 처절한 생애를 다룬 소설이다. 가족과 조정의 신뢰 까지 잃은 채 피할 수 없는 전쟁을 해야만 하는 장수의 운명을 그리고 있다. 모든 삶을 전쟁과 조정으로 부터 빼앗긴 한 남자는 무슨 감정을 갖고 전투에 임했을 까? 인간으로 써 갖는 슬픔과 한나라의 장수로써 전투를 해야만 하는 숙명 사이의 갈등은 점차 고조된다. 죽은 시체의 모습으로 그의 꿈에 나타나는 면이의 모습은 그가 지켜내지 못한 아들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이 만든 형상이다. 이런 죄책감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사로운 감정을 갖지 않고자 꿈속의 아들을 꾸짖는다. 아들 면이가 그의 시아에서 멀어지자, 그는 급박하게 아들을 찾다가 꿈에서 깨어나게 된다. 장수로서 사사로운 감정을 전투에 개입시킬 순 없지만 결국 그 또한 개별적인 죽음들 앞에선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런 내적 갈등 속에서 타인의 죽음을 바라보는 그의 태도 역시 변화되게 된다. 그는 수많은 죽음들을 바라보며 자신도 머지않아 이들과 같이 전쟁터에서 허무한 죽음을 맞이할 운명임을 깨닫게 된다. 죽음에 대한 그의 태도가 변화되는 과정 역시 소설에서 주의 깊게 봐야할 대목이다.


"두 달이 지났으니 어머니는 땅 속에서 썩었을 것이다. 그날 밤 나는 혼자서 취했다. 허리가 결리면서, 비가 내렸다. 차가운 비였다. 어머니의 몸과 피난민들의 노숙 자리에 내리는 비를 생각하면서 나는 자꾸 마셨다."

 

죽음은 그의 내면을 모두 무너뜨렸다. 그에게 있어 타인의 죽음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듣던 날 그는 밤에 술을 마시며, 슬픔을 홀로 삼킨다. 그는 어머니에게 마지막 인사마저 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후회, 그들을 지켜내지 못한 슬픔을 느꼈을 것이다. 칼로 막아낼 수 있는 적들이 아닌 막을 수 없는 죽음과 지켜내지 못한 자들에 대한 슬픔이 그를 더욱 무너뜨렸을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에 그는 한 번에 무너지게 된다. 


"나는 개별적인 죽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온 바다를 송장으로 뒤엎어도 그 많은 죽음들이 개별적인 죽음을 설명하거나 위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여자가 죽으면 어디가 먼저 썩을 것인 지를 생각했다. 나는 그 썩음에 손댈 수 없을 것 같았다. 죽은 자는 나의 편도 아니고 적의 편도 아니었다. 모든 죽은 자는 모든 산 자의 적인 듯도 싶었다."


이후 그는 자신이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개별적인 죽음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된다. 자신이 온전히 위로하고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명량에서의 전투를 끝내고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여진의 시체를 보게 된다. 시체를 보고 그가 느낀 감정은 더 이상 슬픔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표현 할 수 없다. 이는 죽음을 무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자신에 대한 한탄에 가깝다. 수많은 적들과 자신의 군사들이 죽어가는 전장 속에서 더 이상 죽어가는 한 개인을 이해하고 위로할 순 없다. 죽음이란 결국 인간이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이라는 걸 그 스스로 뼈저리게 깨닫고 있는 것이다. 그는 점차 죽음이란 불가항력을 받아들이고 있다. 


"죽음은 끝내 소통되지 않는 각자의 몫이었고 나는 여전히 적의 적이었으며 이 쓰레기 위에서 나는 칼을 차고 있어야 했다. 죽이되 죽음을 벨 수 있는 칼이 나에게는 없었다."

 

그는 자신이 극복할 수 없는 죽음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 스스로 죽음은 칼로 벨 수 없다고 언급하며, 이 죽음이란 숙명에 점차 순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후 그는 자신이 죽어야할 자리에 대해 고민한다. 그의 죽음의 자리는 장수로써 어떤 은총도 주어지지 않는 곳이어야만 한다. 칼의 노래가 높은 문학성을 지닐 수 있었던 이유는 죽음에 대한 이순신의 고찰과 태도를 깊게 확인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삼군 수군통제사로서의 이순신이 아닌 타인의 죽음을 목도하고 괴로워하며 무너지지만 결국 그 죽음이라는 운명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인간적인 이순신은 첨예하게 다뤘다. 슬픔에서 순응으로 이어지는 그의 죽음에 대한 태도변화를 통해 소설은 결국 죽음이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두 번째로 살펴볼 것은 무력함에 대한 서사이다. 이 무력함은 전쟁으로 인한 개인의 피로이자 국가와 백성들의 두려움을 잠재우지 못한 자신에 대한 한탄에 가깝다. 소설은 조정의 모함으로 직위를 박탈당한 이순신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직위가 탈환 된 상황에서 다시 찾아온 국가의 부름에 의해 그는 아직 자신에게 사명이 있음을 느낀다. 그렇게 전장에 나섰지만 조정의 간섭은 끊이지 않는다. 탈영한 배설을 붙잡지 못했다는 이유로 주어진 면사, 전쟁에 의해 물자가 부족한 상황에서도 물자를 바치라는 조정의 명령 등 온갖 불합리한 지시들을 참고 싸운 이유를 단지 국가를 향한 충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소설은 그가 조정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다고 말하지도 않고 조정의 명령에 온전히 동의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먼 바다를 바라보며 왕이 울음을 느끼지만 과거 길삼봉을 잡겠다는 명분하에 백성 여러 명에게 누명을 씌어 죽였던 이야기를 통해 조정에 대한 원망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그렇다면 『칼의 노래』가 중점을 두고 있는 이순신의 감정은 무엇일까? 그것은 조정과 백성의 두려움을 잠재우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무력함이다. 임금은 앞으로 몰려올 적군들이 두렵고 그들을 막아낼 수군통제사를 두려워했다. 


"나는 겨우 알았다. 임금은 수군통제사를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명량 싸움의 결과가 임금은 두려운 것이다. 수영 안에서 혹시라도 배설을 감추어놓고 역모의 군사라도 기르고 있는 것이 아닌지 그것이 임금의 조바심이었다."


선박 열 두 척이라는 희망마저도 온전히 임금의 두려움을 막아줄 수 없다. 열 두 척으로 적선을 모두 막아낸다 한들 이순신에 대한 임금의 두려움은 더욱 커질 것이고, 커져가는 불신 또한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명량에서의 전투 이후 그는 자신을 향한 임금의 불신이 더욱 커졌음을 느끼게 된다. 전쟁의 승패가 한나라의 정세나 군사력이 아닌 한 장수에게 걸린 상황은 임금에겐 큰 두려움이었을 것이고 그 명예는 이순신 자신에겐 떼어낼 수 없는 무거운 짐이었을 것이다. 이런 무거운 짐을 지고도 임금과 백성의 두려움을 풀어주지도 덜어내지도 못할망정, 그것을 키워가는 자신에게 그는 무력함을 느낀다. 그러기에 그는 명량에서의 전적을 더 적은 수치로 고쳐 적는다. 검으로 적들은 벨 수 있어도 그를 둘러싼 세상의 두려움은 베지 못한다. 적을 벨수록 커져가는 두려움은 자신에 대한 무력함으로 이어지고 그와 세상간의 갈등을 고조시킨다. 소설은 자신을 향한 세상의 두려움을 죽음으로 극복하는 이순신의 모습을 그린다. 그의 목을 조여 오는 세상의 두려움과 이를 해결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무력함을 벨 수 있는 방법은 오직 그의 죽음뿐이다. 소설에선 이순신이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자처하고 있다는 묘사가 종종 나온다. 소설은 그의 죽음은 그를 둘러싼 세상과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그의 마지막 수단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영원한 충신도, 역적도 될 수 없었던 그는 세상과의 이별을 통해 임금과 조선 조정에게 새겨진 두려움의 굴레를 끊게 된 것이다. 『칼의 노래』는 전투에서 승리하는 장수의 모습이 아닌 세상과의 갈등에서 승리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이것이 같은 소재를 다루는 다른 역사 소설들과 『칼의 노래』가 결을 달리하는 지점이다. 

 


세 번째로 살펴볼 것은 울분에 대한 서사이다. 이순신은 가토의 특공대를 붙잡아 아들과 비슷한 나이대의 청년, 아베 준이치와 대면한다. 면이를 죽인 것으로 추정되는 이 청년에게서 아들의 모습을 본다. 아들을 죽인 적군 앞에서 그의 칼은 조용히 울린다. 면이가 죽은 원인이 결국 자신에게 원인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쉽게 칼을 들 수 없다. 베어서 아들의 울분을 풀어주라는 칼의 울림도 아들과 비슷해 보이는 청년의 모습 앞에서 망설여진다. 적군에 대한 울분을 버리고 다가가면 보이는 건 명령에 따른 한 군사의 모습이고 누군가의 아들이었을 청년의 모습이다. 가족을 지키고자 싸운 면이는 죽고 그곳에서 면이를 죽인 아베는 살아 이곳에 있다. 같은 나이대의 두 청년이 마주한 너무나도 다른 운명에 그의 울분은 커져만 간다. 그를 죽여도 아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지만 점점 크게 들려오는 칼의 울음은 그를 괴롭게 만든다. 원치 않게 싸워야 했던 아들에게 죽음은 괴로웠던 것이지만 명령을 따랐던 그 청년에게 죽음은 명예로운 것일 지도 모른다. 결국 그의 울분은 커져 그 청년을 죽이기로 결정한다. 죽은 자의 울분을 자신의 칼이 풀어줄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는 아베를 벤다. 그렇게 그의 칼의 울림은 잦아들게 된다. 


이전부터 그의 칼은 여러 번 울렸다. 다시 조선의 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던 날, 배고픔이나 성욕과도 같은 무언가가 그의 내면에서 끓어오른다. 그것은 적군에게 쌓여왔던 분노나 맘속의 답답함일 수도 있다. 그가 처음으로 칼의 울림을 느꼈던 순간은 배설과 대면하였을 때이다. 자신의 어법을 흉내 내며 비웃는 배설의 태도에서 그는 다시 칼의 울림을 느낀다. 그를 베려고 한 순간 배설이 진도의 갯가에 숨겨둔 열 척의 배들이 생각이나 잠시 분노를 잠재운다. 그는 칼의 울림 앞에서 흔들리지만 그것에 따라 행동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전쟁터에서 그 또한 감정에 동요될 순 없고 자신의 감정에 조선의 운명을 맡길 수 없었다. 장수로서의 사명과 인간으로서의 울분 사이에서 그의 내적 갈등은 고조된다. 제목 『칼의 노래』는 이순신의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와 설움을 상징한다. 자식과 부모의 죽음을 갑작스럽게 직면한 이의 내면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 순간 마다, 울분은 쌓이고 조용히 칼의 노래는 울린다. 그는 조선의 장수로서 끝까지 그 칼의 울림을 거부하지만 아들의 죽음 앞에서 참아왔던 그의 내면은 한순간에 무너지게 된다. 아들을 죽인 청년을 베어 자신의 울분은 잠재워도 조선에 새겨진 상처마저 잠재울 순 없다. 새겨진 상처가 오직 자신의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내면에서 울리는 칼의 울림을 버텨낸다. 그 오랜 시간 싸움 속에서 이어지던 칼의 노래는 그의 죽음으로 그 울림을 멈춘다. 소설은 칼의 울림만으로 살아갈 수 없는 삶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삶이란 내면의 분노와 답답함을 견디는 것이고, 이것이 칼의 울림을 견디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3.『남한산성』을 관통하는 두 가지 물음

남한산성을 결국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역사는 병자년 청 앞에 무릎 꿇고 삶을 구걸할 수밖에 없었던 임금과 조정의 모습을 기록한다. 하지만 소설은 그 견딜 수 없는 상황 하에서 무엇이 더 나은 삶인지를 고민하고 끝없이 싸워가는 인간들의 처절한 생존기를 담아낸다. 『남한산성』을 관통하는 물음은 두 가지이다. 첫 번째 질문은 이길 수 없는 싸움에 당당히 맞서 싸워 무너지는 것과 견딜 수 없는 치욕을 견디며 적 앞에 삶을 구걸하는 것 중 무엇이 올바른 삶의 길인가? 이다. 두 번째 물음은 그런 삶의 길은 누구를 위한 길인가? 이다. 김상헌과 최명길이 말한 두 길 끝엔 결국 삶의 길은 있다. 적에게 나라의 체통이 짓밟혀도 민중들은 다시 일어나 삶을 살 것이고 적에 의해 황폐화된 나라에도 봄은 오고 백성들은 살아갈 것이다. 그렇다면 이 견딜 수 없는 삶의 길들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남한산성의 본질적인 물음은 바로 여기에 있다. 죽음과 다르지 않은 삶의 길은 백성을 위한 것인가 임금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그 모두를 위한 것인가. 조정의 선택에 의해 백성들은 죽어갔고 조정이 청에 의해 짓밟히자 백성들은 살 수 있었다. 떼어 놓을 수 없는 삶과 죽음의 길은 누구를 위해 향해야 할 것인가? 먼저 그 첫 번째 물음에 대해 자세히 풀어보겠다. 


최명길은 청의 장수와 만나 곧 칸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칸이 조선에 왔다는 말이 조정에 들리자 조정은 이 싸움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가 행렬은 남한산성으로 향했고 더 이상 도망칠 곳 또한 없다. 조선의 군대는 동상에 손가락마저 얼어 총 한 자루 쥘 수 없게 되었고 추위에 떠는 병사들과 말들 중 하나는 포기해야만 한다. 김류와 이시백이 이끄는 군사들은 청의 군대에 의해 궤멸하였다. 그 모든 상황이 함께 겹치며 조선에게 살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로 좁혀진다. 이길 수 없는 것과 싸우는 것 그리고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는 것, 이중 무엇이 더 나은 삶의 길인가? 살기 위해 도망친 길은 더 좁은 길이 되어간다. 적과의 싸워 승리할 수 없고 적 앞에서 무릎 꿇고 나라의 체통을 지킬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김상헌과 최명길이 말한 더 나은 삶이란 무엇일까? 본고에서는 누구의 주장에 더 힘을 실어 말을 하지 않겠다. 단지 이 둘의 말 속에 담긴 의미를 분석해보고 그 동기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 


먼저 최명길이 말한 삶에 대해 알아가 보겠다. 소설 내에서 최명길은 대체로 조정의 의견과 반대편에 위치한 인물이다. 조정의 신하들은 대체로 그의 말을 반대하고 그를 역적으로 여기며 그의 머리를 청나라에게 바치라고 명하기도 한다. 최명길 또한 자신을 바라보는 조정의 시선이 좋지만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려 했던 조정의 신하들에게 있어 그는 반역자이다. 청으로부터 더한 공격이 오기 전에 화친을 맺는 것이 살길이라는 그의 생각은 그의 경험에서 기인한다. 소설에서 가장 많은 장소를 이동했었던 이는 최명길이다. 최명길의 갈등은 청의 용골대 장군과 대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적군의 장수는 최명길에게 칸이 오고 있다는 최후의 경고를 전해준다. 그 경고를 직접 듣게 된 당사자로서 이 사실은 쉽게 넘길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청의 기지에서 그들이 가진 화력과 군사력을 체험한 당사자의 입장에서 조선이 처한 운명은 너무나도 비참하였을 것이다. 왕을 대신해 청나라에게 답서를 적은 그는 자신을 만고의 역적이라 말한다.


살기위해서 갈 길이 없을 것이고 적의 아가리 속에도 삶의 길은 있을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조정에서 쉽게 받아들여질리 없다. 그의 주장과 다른 조정의 의견은 절대 국가의 명분과 체통이란 단순한 이유가 아니다. 적국에게 나라를 빼앗길 순 있어도 내어줄 순 없다는 그들의 생각이 최명길의 뜻을 막는다. 나라의 운명을 적국에게 맡기는 것은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일이 아니다. 최명길 역시 국가의 운명을 적국에게 맡기는 것이 역적의 길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견딜 수 없는 설움을 견디는 것이 힘없는 조선이 다시 일어서는 길이고 그렇게 일어선 후에야 국가의 존엄과 체통을 지킬 수 있는 것이지, 국가가 무너지기 직전의 상황에선 절대 존엄과 명분만을 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국가가 살아남아야 국가의 존엄과 대의가 있는 것이지 존엄과 대의 때문에 국가가 무너지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기에 그는 조금 더 현실적인 방안을 내놓게 된 것이다. 최명길의 생각은 조금 더 현실에 가깝다. 그가 생각하는 더 나은 삶의 길은 말 그대로 생존이다. 생존한 다음에 삶이 있는 것이지, 삶을 지키려다가 목숨마저 빼앗길 순 없다고 말하고 있다.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는 것은 결코 죽는 것은 아니며, 치욕을 견디더라도 죽어 없어지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그는 살기 위해서라면 갈 수 없는 곳이 없으며 설령 갈 수 없는 곳이라 해도 그곳에도 삶의 길은 있다고 말한다. 어떻게 보면 그는 국가를 위해서 어떤 길이라도 마다하지 않았던 충신으로 볼 수도 있다. 그를 적국에게 국가를 넘긴 역적으로 바라볼지, 국가를 위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았던 충신으로 보아야할 지는 관점에 따라 다르다. 적국에게 나라를 뺐기지 않기 위해 싸웠던 이들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그는 만고의 역적이지만 절대 강국과의 무의미한 싸움을 두고 볼 수 없는 이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그는 충신이 된다. 


다음은 김상헌이 말한 삶의 길에 대해 말해보겠다. 김상헌은 소설에서 가장 많은 변화를 겪는 인물이다. 그는 삶과 죽음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며 다수의 생존을 위해서 눈물을 머금고 소수에게 칼을 드는 이다. 그러기에 그의 말에는 절박함이 묻어나 있다. “살아 있기에 남한산성으로 가야한다.” 김상헌에게 남한산성은 살아 있는 자들이 머무는 곳이다. 청의 군대가 이곳으로 몰려든다 한들 조정과 군사들이 살아있는 한 그 곳에 살아갈 길은 있으리라 생각한다. 남한산성으로 향하던 도중 그는 얼은 강을 안내해주는 뱃사공과 만나게 된다. 청의 군대가 이곳을 지나게 될 때 길을 안내해주어 곡식을 얻겠다는 뱃사공의 말에 그는 슬픔을 느낀다. “이것이 백성이란 것인가, 이것이 백성일 수 있구나” 이 백성들에게 삶이란 나라의 운명과 관계없이 하루를 벌어 하루를 사는 것이다. 청에게 길을 안내해주어 하루의 곡식을 얻어갈 수 있지만 이것은 곧 조선을 죽이는 길이 된다. 백성이 살아가는 길이 백성이 죽어가는 길이 된다. 이런 게 결국 백성의 삶이라는 것에 김상헌은 슬픔을 느낀다. 김상헌은 이 연민 때문에 뱃사공에게 같이 남한산성으로 갈 것을 요구한다. 이 제안을 거절한 뱃사공은 김상헌의 칼에 죽게 된다. 김상헌은 하루를 살기 위해 청에게 길을 내어주는 선택을 하는 사정을 알면서도 검으로 뱃사공을 벤다. 백성의 하루의 삶이 국가의 죽음으로 이어질 수 없기에 그는 과감히 칼을 든 것이다. 이렇듯 그가 가진 삶의 의지는 때론 잔혹하기도, 절박하기도 하다. 그에게 있어 국가의 삶이란 다른 무언 가에게 삶을 구걸하는 것이 아닌 그 스스로 지켜 찾아야 하는 것이다. 김상헌의 삶을 향한 의지는 오랑캐에게 무릎 꿇지 않겠다는 단순한 명분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그는 조선이 한 국가로써 스스로의 삶을 끝까지 지키길 바래왔다. 하지만 그런 절박한 삶을 지키기 위해 희생해야 될 것이 너무 많다. 김상헌에 의해 죽임을 당한 뱃사공와 그로 인해 남한산성 주위를 떠돌게 된 소녀, 나루는 김상헌의 마음을 찌른다. 삶을 위해서 가지 못할 길이 없다는 말은 김상헌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국가의 삶을 위해 뱃사공은 죽고, 소녀는 겨울에 홀로 남겨진다. 그가 국가를 위해 희생시킨 것들이 결국 그의 주변으로 돌아온다. 그의 마음은 편치 않다. 국가의 삶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지만 그 희생을 감당하는 이들은 결국 백성들이다. 전쟁을 위해 덮고 잘 가마니마저 빼앗기는 병사들, 목숨을 걸고 격서를 전달하는 날 쇠처럼 죽음에 맞서 청과 싸워야 한다 말하는 건 김상헌이지만 죽음을 맞이하는 건 결국 백성들이다. 삶을 향한 그의 강한 열망은 어떻게 말할 수 있을 까? 조선이 강한 세력 앞에 무릎을 꿇지 않고 한 국가로써 그 삶을 꿋꿋이 지켜나가길 바래왔던 이에게 그는 충신이지만 그에 따라 희생된 백성들과 군사들에게 그는 역적이다. 


결국 이 둘이 주장하는 바는 다르나 그들 모두 더 나은 삶을 위해 견딜 수 없는 것들을 견뎌왔다는 것은 같다. 최명길은 청에게 국가를 넘긴 역적이 되는 것을 감안하고 국가를 지켜내었고 김상헌은 죽어가는 백성들을 바라보며 국가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워왔다. 이 둘의 운명을 통해 소설은 결국 어떠한 선택을 하더라도 견딜 수 없는 것이 있으며 이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삶의 길은 죽음보다 더 한 길을 걷는 것이고 사는 것과 죽는 것은 다르지 않다. 조정이 살기 위해 발버둥 치자 백성이 죽고 조정이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무릅쓰자 백성들이 살게 된다. 그럼 다르지 않은 삶과 죽음의 길은 누구를 위한 길인 것인가? 이제 두 번째 물음에 대해 더 자세히 보도록 하겠다. 다르지 않은 죽음과 삶의 길이 누구를 향하여야 하는 가에 대해서도 김상헌과 최명길의 생각은 다르다.



남한산성의 마지막 논의는 소설이 끝난 후부터 시작된다. 조정의 긴 결정 속에 백성들은 죽어갔고 왕이 무릎을 꿇자 백성들은 살았다. 죽음과 삶의 길이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다르지 않은 길은 누가 걸어 가야하고 누구를 향해야 하는 것인가. 견딜 수 없는 치욕과 고통의 역사는 백성의 것인가 나라의 것인가, 이에 대한 최명길과 김상헌의 생각은 갈린다. 최명길에게 견딜 수 없는 국가의 수난은 임금과 백성이 함께 가야할 길이다. 때론 백성의 희생으로 때론 조정과 임금의 희생으로 국가의 운명이 유지된다. 최명길은 자신이 쓴 답서를 두고 이 글은 글이 아닌 전하께서 밟고 가야할 길이라 말한다. 때론 지키고 싶어 하는 것을 밟고 가야할 때가 있다. 때론 글과 사상이 아닌 문제를 해결할 실질적인 길을 찾아야 할 때가 있다. 국가의 운명 역시 더 이상 조정의 오랜 사상과 명분으로 해결할 순 없다. 그것이 받아들여질 수 없고 견딜 수 없는 방법이라 해도 실제로 문제를 해결할 길이라면 그것을 밟고 가야한다. 그리고 이 길은 백성뿐만 아닌 조정의 희생이 함께 했을 때 이뤄진다. 적에게 삶을 구걸할 수 없다는 조정의 의도는 백성과 군사들에게 전해지기 힘들다. 하루를 벌어 하루를 먹고 사는 뱃사공에게 청나라 군대의 출현은 그저 곡식을 얻을 기회일 뿐이고 조선에서 노비로 살아온 정명수에게 청나라는 자신이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총을 쥘 수 없는 군사들에게 청과의 전투는 끝나기만을 바라는 전쟁에 불과했을 것이다. 말과 군사들의 생명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말하는 조정의 모습은 그들이 백성과 군사들이 겪는 고통과 같은 길을 걷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조정의 입장에선 청과의 맞설 군사력과 사기를 유지하는 것이 살아남을 길이었다면 군사들의 입장에선 그저 추운 겨울의 전쟁터를 무사히 버티는 것이 살아남는 길이었을 것이다. 조정이 그저 군사력 증진을 위해 군사들이 덮고 자던 가마니를 말에게 먹여 군사들을 추위에 내몰았던 것처럼 백성과 함께 하지 않는 길은 결국 백성을 죽이는 것이다. 최명길은 조정이 백성들의 모든 고통을 끝낼 생존의 길을 조정과 백성이 뜻을 함께하며 지나가길 바래왔던 것이다. 


김상헌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삶을 사는 데도 아름다운 자리가 있을 진데 그 자리가 적의 아가리일 순 없다고 말한다. 그는 살아남는 것이 아닌 살아가는 것 에 대해 말한다. 그는 조선이 적군의 무릎 밑에서 생존을 하는 것이 아닌 한 나라의 힘으로 온전히 살아가는 것을 바래왔다. 하지만 그의 이런 생각을 이루기에 조선은 그 생존마저도 버거워 하였다. 삶의 아름다운 자리를 논하기 이전에 조선은 삶의 자리조차 찾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소설 속에서 그는 삶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죽어가는 백성들의 모습을 무수히 접한다. 그 중에서 그의 마음을 가장 많이 뒤흔든 이는 나루 일 것이다. 삶의 길을 찾고자 그가 휘두른 검에 의해 한 소녀가 길을 잃게 된다. 결국 자신이 생각한 삶의 길이 결국 이뤄질 수 없단 걸 알게 된 그는 죽음을 택하게 된다. 그의 자살기도는 실패로 끝난다. 백성과 나라가 더 나은 삶의 길을 찾기 위해 그가 선택한 방법은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자신과 같이 명분만을 말하는 자가 죽고 사라져야만 백성들이 살아남고 머지않아 살아갈 것이다. 김상헌은 조선의 옛 가치들이 온전히 부서진 후에서야 삶의 길을 열릴 것이라 말하고 있다. 그는 이 고통스러운 길을 더 이상 백성들이 걸을 수는 없으며 조선의 옛 것들이 모두 사라졌을 때 비로소 삶의 길이 열린다고 말한다.


최명길과 김상헌 중 더 누가 더 나은 충신이고 누가 더 나은 삶의 길을 선택한 건지는 필자도 정확히 판단할 수 없고 쉽게 규정지을 수 없다. 누구의 주장에 더 동의하는 것은 독자의 선택에 의할 뿐이다. 하지만 이 두 질문들을 통해 우린 국가의 생존과 삶 중 무엇이 먼저 인지 생각해 볼 수 있다. 생존은 국가가 타국에게 넘어가더라도 그 존재만을 유지하는 것이고 삶은 한 국가의 정체성과 존엄을 적으로부터 지키며 국가를 유지하는 것이다. 생존을 위해 무릎을 꿇기만 하는 국가를 진정한 국가라 볼 수 있을 까? 생존하기도 힘든 상황에서 국가의 존엄과 위엄만을 내세우는 국가를 국가라 말할 수 있을 까? 남한산성이 전한 의문은 수세기의 걸쳐 인간이 고민하고 생각해봐야할 문제들이다.




『결론』

4.고통을 견딘 시대의 기록


두 장편 소설은 공통적으로 삶에 대한 작가 김훈의 통찰이 담겨 있다. 독자들은 두 소설을 통해 역사 앞에선 한 인간은 자신의 삶과 죽음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였는 지, 그리고 국가와 조정은 더 나은 삶을 위해 무엇을 선택했는지 알 수 있다. 『칼의 노래』가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의 한 인간의 내적인 변화를 그려낸 소설이라면 『남한산성』은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더 나은 길을 찾는 국가의 처절한 생존을 그린 소설이다. 두 소설이 보여준 고통스러운 기록들은 결국 우리의 모든 삶을 말해주고 있다. 가족과 연인의 죽음을 견뎌온 장수의 이야기와도 같이 우리의 삶에선 울분을 참고 자신의 목을 조여 오는 적들과 마주할 때가 있으며 강자 앞에서 무릎을 꿇는 것과 끝까지 사는 것을 선택해야했던 국가의 이야기와 같이 우리의 삶에선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는 것과 이길 수 없는 것과 싸우는 것 중 하나를 선택 해야 할 때가 있다. 작가 김훈은 이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편에서 그 모습을 그려낼 뿐 누군가의 주장에 힘을 주어 말하지 않는다. 그 고통스러운 삶 속에선 다른 삶의 방식만이 있을 뿐이다. 김상헌과 최명길이 생각한 삶의 길이 달랐던 것처럼 각자 다른 입장과 사고로 그 고통스러운 시대를 견디며 살아갈 뿐이다. 김훈의 소설이 한 인물과 시대의 고통을 중점적으로 묘사하려했던 이유는 삶을 바라본 그의 관점에 기인한다. 그는 두 소설을 통해 삶이란 고통을 견디는 것이고 죽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전한다. 때론 지독하고 피로에 찌든 것 같은 그의 소설은 시대에 기록된 삶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과거의 삶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고 느낄 수 있을까. 그것은 그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나뉠 수 있다. 하지만 그 시대 속에 기록된 고통과 설움은 언급할 필요가 있다.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 앞에서 개인의 내적갈등은 어떻게 진행되었고 해결되었는지, 국가는 어떤 식으로 삶의 길을 찾아왔는지를 통해 우리는 이 기록들을 우리의 삶과 고통의 문제에 대입시켜 볼 수 있다. 김훈의 두 소설은 고통의 기록들이 모두 역사의 줄기를 이뤄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두 소설을 통해 고통스러운 삶을 견뎌낸 이들의 삶이 조금 더 자세히 드러나길 희망한다. 본고가 고통스러운 역사를 바라보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희망하며 마친다.






-작가의 말-

끝날줄 모르는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우리는 고통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런 고통의 시대에 대한 기록을 적은 역사서는 많지만, 저는 그중 김훈의 소설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에 대한 저만의 해설을 더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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