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집의 성>, <우게츠 이야기>, <동경이야기>를 중심으로-
야망과 비극, 이 두 가지의 키워드를 지닌 작품들은 신화, 소설 그리고 영화 등을 통해 오랫동안 창작되어 왔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중 하나인 <맥베스>이다. 이러한 작품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그들이 원하는 무언가를 얻거나 잠시 이루게 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한 편의 꿈처럼 그들이 이뤄낸 모든 것들이 사라지게 되고 그들 앞엔 싸늘한 죽음, 허무만이 남아있게 된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말고도 인생무상, 일장춘몽과 같은 허무주의를 짙게 표현해낸 영화도 오늘날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예시가 오손 웰손 감독의 영화, <시민 케인>이다. 아시아 영화에선 대표적으로,<거미집의 성>, <우게쯔 이야기> 그리고 <동경이야기>를 들 수 있다. 이를 통해 인간의 삶의 끝은 결국 죽음이라는 것을 말하는 허무주의는 시대와 나라의 문화권을 초월해 공유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허무주의적 색체를 가장 짙게 표현하고 있는 일본 영화들을 분석하고 이런 영화가 제작될 당시 일본의 정치적, 사회적 배경 등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거미집의 성>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의 이야기를 일본의 배경에 맞게 재구성한 걸작이다. 스코틀랜드에서 펼쳐지는 원작소설의 배경을 일본 전국 시대로 바꾸었으며, 원작에서 나오는 대사를 전혀 활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맥베스>의 불타오르는 야망보단 두려움과 불안이라는 심리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데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 볼 수 있다. 감정을 절제하는 방식의 노가쿠 연기는 극중 인물의 혼란스러운 심리와 두려움을 더욱 극대화시켜준다. 그렇다면 이 영화 속에서 두려움과 불안이라는 심리는 어떤 식으로 녹아들어 있던 것일까? 지금부터 알아보도록 하자.
한번 거미줄에 걸린 나비는 거미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줄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칠수록 온몸에 줄이 점점 더 달라붙게 되고, 그렇게 온몸 전체가 줄에 감싸인 채로 죽게 된다. 이 영화는 인간의 삶 또한 거미줄에 걸린 나비의 운명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와시즈와 미키는 비가 오는 밤, 나무가 자욱한 숲에서 길을 잃어버리게 된다. 나무가 자욱한 숲에선 의도치 않게 처음 왔던 길로 돌아가거나, 생전 마주하지 못한 곳에 들어가기도 한다. 가도 가도 같은 길이 나오는 것 같은 이 숲은 와시즈가 앞으로 겪게 될 운명을 상징한다. 화면 안엔 무수히 많은 나무들이 말을 타고 달리는 와시즈와 미키를 감싼다. 그들의 주위를 감싸는 여러 나무들은 그들을 옥죄어 오는 비극,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굴레를 의미한다. 길을 헤매던 나비가 거미줄에 걸리듯, 그들은 숲속에서 한적한 오두막을 찾아 들어가게 된다. 베를 짜고 있던 노인은 와시즈와 미키의 운명을 예언하고 홀연히 사라지게 된다. 미래에 대한 예언을 듣게 된 와시즈는 더욱더 불안의 늪에 빠지게 된다. 노인의 예언은 와시즈에게 어떠한 확신이나 결심을 전해주지 않는다. 거미집의 성을 눈앞에 두고 잠시 쉬었다 가기로 결정한 와시즈의 눈빛엔 아직도 불안이 깃들어있다. 만약 우리가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미리 알게 된다면 우리의 삶에 있어서 모든 불안은 사라질 수 있을까? 우리는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해 알지 못해 불안해한다고 말하지만, 이 영화는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알게 된 다해도 인간은 여전히 불안에 휩싸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와시즈에게 있어, 거미집의 성의 군주가 될 것이라는 예언은 저주였을까? 축복이었을까? 그는 처음엔 그 노인의 예언을 믿으려하지 않았고, 군주가 누구보다 자신을 신뢰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신의 지위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그의 마음속에 생기자, 그의 예언은 이내 저주로 변하게 된다. 그는 군주를 살해하고 예언에 따라 거미집의 성의 군주가 된다. 그의 예언을 실현시킨 것 역시 그의 두려움이고 그의 예언을 저주로 바꾼 것 역시 그의 두려움이었다. 아내가 그의 두려움을 자극시키지 않았더라면 그의 예언은 이뤄질 수 없었을 것이며, 그가 결단을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영화는 인간의 삶이란 극도의 두려움 앞에선 무너지고 뒤바뀔 정도로 허망한 것임을 보여 준다. 와시즈는 노인이 한 다른 예언에 대해 두려워했다. 그것은 바로 미키의 아들이 그를 이어 거미집의 성의 군주가 된다는 예언이다. 그 예언에 두려움을 갖게 된 와시즈는 자신의 친구 미키를 죽이지만 그의 아들을 죽이는 데에는 실패한다.
극 초반, 말을 타고 달리던 그를 가두었던 숲속의 나무들은 결국 그의 최후의 순간에 그가 있던 성 주위를 둘러싼다. 이러한 수미상관 식 연출은 벗어날 수 없는 굴레 속에서 발버둥 치며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와시즈의 군사들은 움직이는 나무를 보며 도망치거나 와시즈에게 화살을 겨눈다. 와시즈는 성안의 군사들이 아직도 자신을 위해 싸워줄 것이라 믿었으나, 성안에는 자신의 편인 군사들이 모두 떠난 후였다. 그리고 그에게 무수히 많은 화살이 날아오게 된다. 어마어마한 수의 군대와, 군주라는 지위 또한 그가 눈치 채지 못한 사이에 모두 사라져 버린다. 이는 이 영화에 깊숙이 깃들어 있는 허무주의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우리는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알든 알지 못하든 끊임없이 두려워한다. 그러기에 권력과 힘이 그 두려움을 잠시나마 막아줄 것이라 믿고 그것들을 통해 두려움을 막아보려고 애쓴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에 모두 사라지고, 결국 우리에겐 죽음만이 남겨져 있을 뿐이다. 죽음 앞에서 극도로 두려워하는 와시즈의 모습은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이 영화는 결국 인생의 허망함에 대해 말하고 있다. 갈 길을 헤매다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인간은 끊임없이 두려움이란 거미줄 안에서 살아가게 된다. 이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권력을 차지하고, 많은 물질을 얻는 등, 끊임없이 발버둥치지만 거미줄에서 벗어나려는 나비의 몸부림에, 더 많은 거미줄이 나비의 몸에 달라붙는 것처럼, 두려움을 막아줄 것이라고 믿어왔던 것들이 우리 자신의 파멸을 재촉시킬 뿐이다. 결국 최후의 순간엔 우리 모두 죽음이라는 똑같은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꿈을 꾸고 있는 동안 우리는 우리가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꿈이라는 단어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꿈은 잠을 잘 때 꾸는 무의식적인 환상을 말하기도 하며, 먼 미래에 이뤄질 것이라고 믿는 어떠한 환상을 말하기도 한다. 꿈이라는 단어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지만, 이 두 가지의 다른 의미의 꿈에도 공통점이 있다. 꿈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잠을 자는 것으로 꾸는 꿈은 잠에서 깨면 끝난다. 우리가 갖고 있던 미래의 목표나 환상은 그 꿈이 이뤄지는 순간 혹은 죽음의 순간에 끝나게 된다. 인생이 봄날에 꾼 꿈과 다르지 않다는 말에는 인간의 삶과 꿈마저 언젠가 끝을 맺기 마련이라는 한탄이 담겨져 있다. 이 영화는 그러한 인생의 덧없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전국 시대에 사는 두 사내는 꿈을 꾼다. 겐주로는 도공이 되어 부를 축적하는 꿈을, 도베이는 사무라이가 되어 명예를 얻는 꿈을 꾼다. 어느 날, 그들이 사는 마을에 검을 든 사무라이들이 찾아와 약탈을 시작한다. 이 사건을 겪자 겐주로의 가족은 다른 곳으로 도주를 시도한다. 겐주로는 적군이 쳐들어오고 있는 와중에도, 자신이 굽고 있는 도자기를 포기하지 못한다. 한 사람에게 깃든 열망은 죽음마저 무릎 쓰게 만든다. 도자기가 다 만들어진 것을 확인한 겐주로는 그의 아내와 동생 그리고 형수를 데리고 시내로 행한다. 그는 강을 건너던 도중, 해적을 만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내를 만난다. 이를 보고 위협을 느낀 겐주로는 자신의 아내와 자식을 고향에 놔두고, 다시 출세의 여정에 오른다. 겐주로의 가정은 전쟁과 폭력이 아닌 겐주로의 선택에 의해 해체되게 된다. 그간의 영화는 전쟁이 가정을 해체시켜 왔다고 말해왔다. 반면 이 영화는 전쟁을 일으켜 겐주로의 집을 침범했던 사무라이들의 야망과 부를 쌓기 위해 아내를 위험한 곳으로 내몬 겐주로의 야망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음을 말하고 있다. 전쟁과 폭력은 결국 인간의 야망이 극단적으로 치달아 나타난 결과이다. 출세 역시 마친 가지이다. 어떤 이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 가정을 버리고, 지금 자신에게 있는 행복을 내팽개치고, 이뤄질 지도 모르는 미래의 꿈에 목숨을 걸게 된다. 이런 야망들에 의해 가정은 해체되고 여성은 홀로 남겨지게 된다. 이를 통해 영화는 전쟁과 출세라는 꿈엔 무수히 많은 희생이 뒤따랐음을, 그 부질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겐주로가 만난 귀부인의 모습에서 더욱 드러난다. 귀부인 역시 전쟁으로 인해 버려진 여성이자, 격동의 역사 속에서 잊힌 인물이다. 귀부인과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겐주로는 귀부인의 정체를 알게 되자 두려움을 갖고 그곳에서 도망치려한다. 전쟁을 통해 인간이 이루고자한 야욕의 끝에는 오로지 살해당한 영혼만이 지상에 떠돌 뿐이다. 귀부인을 보고 두려움에 떨었던 겐주로의 모습처럼 우린 그 불편한 진실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의 열망과 야욕을 향해 달려간다.
집으로 돌아온 겐주로는 자고 있는 아들과 화로를 보게 된다. 남들이 보기엔 별거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겐주로에겐 자신에게 남겨진 유일한 삶의 의미였을 것이다. 가끔은 욕망에 이끌려 꿈을 꾸듯, 주변에 있는 일상마저 저버린 채 달릴 때가 있다. 그렇게 달리다 넘어져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내가 잘못 살아 왔음을 깨닫게 되고 그것을 고쳐가는 과정이 결국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영화에는 욕망과 야망에 이끌려 전쟁 일으키고, 정복을 일삼았던 과거 일본사회에 대한 반성이 담겨져 있다. 일본이 자행한 전쟁범죄로 인해 무수히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고, 전쟁이라는 야망의 끝에선 일본은 결국 파멸에 이르렀다. 그렇게 모든 일상이 파괴되었고, 그것을 회복하는데,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는 결국 그 일상을 회복해내는 것 역시 인간이라는 아주 작은 희망을 전해주고 있다.
자식은 부모에게서 부터 멀어지고 산 자는 죽은 자에게서 부터 멀어진다. 죽음은 예고 없이 찾아오며, 그걸 감내해야하는 자에겐, 오로지 적막만이 남겨져 있다. 죽음이라는 것이 누군가에겐 감내할 수 없는 슬픔임에도 그 다음날엔 아름다운 새벽이 찾아오기에, 죽음에 슬퍼했던 이들도 언젠가는 그들을 잊고 살아가기에, 인생은 더욱 무상하다.
이 영화는 죽음을 앞둔 노부부의 이야기를 통해 삶의 무상함에 대해 직관적으로 그리고 있다. 가족을 만나러 도쿄로 상경한 노부부, 그들의 자식들은 그들을 정성껏 모실 것처럼 말하지만 정작 일이 바쁘단 핑계로 그들을 집에 방치한다. 노부부를 가장 정성껏 모신 인물은 남편을 잃은 경험이 있는 노리코이다. 노리코는 노부부를 모시기 위해 휴가를 내고 도쿄를 관광시켜드린다. 부모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기에, 그들이 죽음과 가까워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살 때가 있다. 결국 죽음이 찾아오고 난 다음에서야, 가족과 보내는 시간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영화 내내 웃는 얼굴로 노부부를 모셨던 노리코의 마음엔 남편을 잃어버린 슬픔과 남편을 잊어가고 있다는 죄책감이 있었다. 결국 누군가를 잃어버리고서야 그 소중함을 깨닫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가족들은 자신들이 노부부를 극진히 모시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그들을 이타미로 보낸다. 아버지가 그곳에서 한 숨도 자지 못하는 것을 모르고, 아들은 분명 아버지께서도 좋아하실 것이라 말한다. 이때 분명 어머니의 병세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음에도 아들은 그것을 몰랐다. 그렇게 아들은 부모에게서 점점 멀어진다. 아들은 다시 누군가의 아버지가 되고 딸은 다시 누군가의 어머니가 되면서 그들의 부모와 멀어진다. 그렇게 영원히 끊어질 것 같지 않았던 가족이란 울타리는 시간이 지나 녹이 슬고 결국 무너진다. 영원할 것만 같은 가족이란 유대 역시 시간 속에서 허무하게 무너져 버린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다시 새로운 가정은 만들어지고 아이들은 자라난다.
가정이 그렇듯, 우리의 삶 역시 적막한 밤이 지나고 아름다운 새벽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죽음으로 가족과 친구를 잃은 이들에게도 결국 내일은 찾아오고, 새로운 만남이 생긴다. 죽음이란 적막 속에서도 다른 누군가는 그 삶을 감당할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삶은 끝나고 다시 시작된다.
앞서 소개한 세 영화는 공통적으로 인간의 삶에 대한 허무가 담겨있다. 동일한 시기에 이러한 허무주의를 다룬 세 영화가 나올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일본의 정치적 상황과 엮어 설명할 수 있다. 1940년 아리타 하치로에 의해 대동아 공영권이 선언되게 되고, 이는 동아시아의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는 사상이 되었다. 서구 열강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일본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국가를 바꿀 수 있다는 희망, 그것이 당시 일본의 정부가 갖고 있었던 말도 안 되는 야망이자 열망이었다. 그들의 야망과 열망 하에 무수히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고, 결국 학살의 화살은 다시 일본에게로 돌아왔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거미집의 성>은 자신의 지위를 빼앗길 것이라는 두려움에 빠져 전쟁을 일으키고 많은 이들을 학살해왔던 일본의 모습을 와시즈라는 인물을 통해 그리고 있다. 극 중 와시즈가 갖고 있던 두려움은 세계화 속에서 뒤처지지 않고자 했던 당시 일본 사회의 강박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 강박에 빠진 일본은 더욱더 잔혹한 방식으로 주변 국가와 자국민들을 몰아세웠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일본이 패망하는 결과를 부추겼고, 그렇게 학살의 화살은 다시 그들 자신에게 그대로 돌아오게 된다. 동아시아 국가들 중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를 시작한 당시의 일본에겐, 근대적인 정치방식과 사고가 더욱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그러나 근대화의 희망은 세계 2차 대전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 처참히 무너지게 된다. 더 발전 된 사회를 이륙하기 위한 명목으로 일으킨 전쟁의 끝엔 처참히 죽은 시체만이 널브러져 있을 뿐이었다.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당시의 일본 사회에는 극도의 허무주의만이 남아 있게 된다.
이 허무주의는 미조구치 켄지 감독의 <우게츠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에서 직관적으로 그려진다. 전쟁과 출세에 미친 남성들에 의해 여성과 아이는 위험 속에 방치된다. 그리고 갈 길을 잃은 아이들은 부모 없이 홀로 남겨지게 되고 여성들은 몸을 빼앗기게 된다. 그렇게 의미 없는 전쟁이 끝난 후에야, 자신의 욕망 때문에 희생된 영혼을 바라보게 된다. 하지만 미조구치 켄지 감독은 전쟁을 일으켜 약자를 희생시키고 일상을 파괴시키는 것 역시 인간이지만, 그것을 회복하는 것 역시 인간이라고 말하고 있다. 자신이 잘못 살아왔다는 것을 아내를 잃고 나서야 알게 된 겐주로는 다시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 도기를 굽는다. 전쟁과 욕망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었음에도 다시 일상을 회복하려는 겐주로의 모습을 통해 영화는 전쟁과 욕망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은 일본이 다시 회복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즈야스지로 감독의 <동경이야기>에선 전쟁과 근대화를 거치며 역사 속에서 사라진 자들에 대해 회고하고 있다. 오즈 야스지로가 말한 희망은 이전에 일본 사회가 꿈꾸었던 근대화의 희망과는 다르다. 그가 말하는 희망은 회복에 중점을 두고 있다. 전쟁이 나은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떠나간 이들을 추억하며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이 눈물은 남아 있는 자만의 것이 아니다. 전세대가 같이 눈물을 흘리며 해결해야할 하나의 과제이다. 아내를 잃은 노인이 남편을 잃은 노리코를 위로해주는 장면은 세대를 뛰어넘어 전쟁의 상처를 위로하고 회복하고자하는 이들의 모습이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그러한 회복의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