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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 Jan 04. 2023

개인을 가두는 시대의 허상에 대하여

<홍등>, <교사형>을 중심으로


자유를 강탈당한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강탈한 사회체제와 결국 동화되거나 동화되지 못해 결국 미친 사람으로 남게 된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20년대의 중국은 중국을 지배해오던 봉건질서가 무너지고 공산당이 창당되던 시기였다. 시대는 역변 했으며, 중국 안에선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이 점차 생겨나게 된다. 하지만 이런 시대의 흐름과 상관없이 시간이 흐르는 곳이 있다. 진나리댁에 팔려간 송련은 철저히 외부와 단절된다. 높은 성벽과, 그녀의 주위를 감싸는 붉은 홍등들, 수직과 수평구도의 화면들은 그녀가 철저히 외부와 단절된 삶을 보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대학생신분이었다는 송련의 과거는 언급만 될 뿐, 정확히 나오지 않는다. 마치 진나리 댁에 오기 전 그녀의 과거는 없다는 듯, 영화는 과거 그녀의 삶에 대해 침묵한다. 마치 그것이 그녀의 운명으로 정해져 있었던 것처럼, 그 잔혹한 현실을 조용히 묵도한다.


“부자에게 시집가는 것, 그것이 여자의 운명이 아니었나요?”


 시대가 바뀌고 격변해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그것은 거대한 사회 체제 속에서 개인에게 행해지는 감시와 통제이다. 중국은 근대화의 시기 동안 여러 번 정권이 바뀌었지만, 현재까지도  개인을 향한 감시와 통제는 중국 사회에서 변하지 않고 남아 있게 된다. 일제 침략자들의 통제, 국민당의 통제, 공산당의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에 이르기까지 중국 사회엔 개인을 향한 통제가 끊임없이 이뤄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송련을 가두었던 성벽과 기와지붕 그리고 홍등은 모두 중국의 전통과 관련이 있는 것들이다. 중국의 전통이라 할 수 있는 건축물과 홍등이 개인을 가두고 속박한다. 이는 중국이란 국가가 개인을 속박하고 통제하는 것을 마치 전통인 것처럼 행해왔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 체제 속에 갇힌 개인은 처음엔 절망하지만 얼마 안가 그 체제에 적응하게 된다. 홍등을 들고 거울 앞에서 눈물을 흘렸던 송련은 이내 체제에 적응하기 위해, 같이 있던 여성들과 경쟁하고 또 다른 누군가를 희생시킨다. 홍등을 차지하기 위해 그들이 벌인 거짓과 음모, 절도 등을 나쁘고 잔인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진나리 댁이라는 사회 속에 적응하기 위해 그 사회와 동화된 것이다. 마치 진나리 댁에 들어오기 전의 삶의 꿈을 잊어버린 듯, 그들은 그들을 속박한 사회가 요구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미친 듯 달려가게 된다. 이러한 모습은 당시 문화 대혁명 시기 홍위병의 모습과 비슷한 점이 너무나도 많다. 대학생 시절의 꿈을 모두 포기한 채 공산당의 체제에 순응하고 거기서 지시하는 것을 무조건 적으로 따랐던 홍위병들의 모습은 극중 송련의 모습과 많은 부분 겹친다. 송련 역시 대학생신분으로 진나리 댁에 오게 되어 그녀가 이전까지 꿈꿔온 것들을 자연스럽기 포기하고 진나리 댁에서 요구하는 여자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셋째 마님은 진나리댁 여성들 중 그나마 자유를 꿈꿨던 사람이다. 그녀는 경극 배우로 이름을 알렸던 자신의 옛 꿈에 대한 추억을 잊지 않고 살아간다. 그러나 장내관과 불륜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술 취한 송련에 의해 발각되게 되고 결국 사망하게 된다. 진나리댁에서 사람으로서, 여성으로서의 꿈을 갖는 것은 곧 사망을 의미했다.


 가법이란 체계는 원래는 진나리댁의 여성들을 통제하고 순응하게 만드는 데 목적이 있었지만, 여성들끼리 서로를 비난하고 몰락시키기 위한 도구로도 사용된다. 그 과정에서 약자들은 권력 싸움에서 소외되고 이용당한다. 송련을 밑에서 보좌하던 안은 둘째 마님과 송련 사이의 권력 싸움 밑에서 철저하게 이용당한다. 감시와 통제의 체제 속에서 힘조차 낼 수 없는 약자들은 그 체제 안의 있는 강자들의 권력싸움에 희생양이 된다. 홍등을 훔쳤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게 된 후, 송련에게 “미안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이 한마디만 하면 살 수 있었으나, 그녀는 불타는 홍등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자신이 사죄를 한다고 해서 이 체제가 바뀌는 것은 아니며, 다시 송련 밑에서 시중을 든다 해도 자신의 삶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홍등을 보면서 두 편의 영화가 떠올랐다. 하나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이고, 다른 하나는 <매드맥스:분노의 도로>이다.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들>의 서사에선 철저히 남성인물을 배제한다. 귀족중심의 봉건적인 영국 사회 속에서 여왕과 시녀의 이야기를 다루고 그들 간의 갈등만이 주가 된다. 이 극 속에서 남성인물은 봉건적인 시대를 말해주는 배경에 지나지 않는다. 홍등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송련을 포함한 다른 여성들을 속박했던 천씨는 극중 제대로 나오는 장면이 거의 없다. 천씨는 그저 중국 사회의 통제와 감시를 상징하는 배경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이 영화에선 오로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진나리댁 여성들의 싸움만이 중계된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에선 임모탄이라는 절대자에게 굴복한 시타델의 주민들이 그가 나눠주는 물을 얻기 위해 구걸하는 장면이 나온다. 시타델의 주민들이 이모탄이 주는 물에 모든 것을 거는 모습 그리고 이모탄의 관심을 받고자 스스로를 희생하는 워보이들의 모습은 홍등을 켜기 위해 어떠한 행동이라도 하는 진나리댁 여인들의 모습과도 같다. 이모탄은 자신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여러 명의 아내를 두고 있었으며, 그 아내들은 아이를 낳기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 이는 홍등에서 나온 천씨의 아내들의 모습과도 매우 비슷하다. 다만 매드맥스는 구원자 퓨리오사가 나타나 여성들과 함께 이모탄을 죽이고, 시타델의 주민들에게 물을 나눠준다는 결말을 지니고 있다.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자신들을 속박해온 체제를 부순다는 점에서 조금은 희망적인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의 결말과는 달리, 홍등의 결말은 매우 현실적이다. 셋째 마님의 죽음을 지켜본 송련은 충격을 먹고, 셋째마님과 자신의 집에 있는 홍등을 전부 킨다. 이는 송련이 주체적으로 진나리댁의 가법을 부순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이런 행위는 혁명이나, 저항으로 해석되기 보단 단순히 미친 사람의 행위로 사람들에게 보인다. 송련을 가둔 사회는 그대로 지속되며, 그 것에 저항한 송련은 미친 여자로만 남게 된 것이다. 개인을 감시하고 속박하는 사회전체가 바뀌지 않는 이상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에서 퓨리오사가 보여준 혁명은 사실상 실현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홍등은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중국의 사회를 너무나도 현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2.국가라는 허상

[교사형] -오시마 나기사 감독-

 살인은 죄다, 허나 국가를 위한 살인은 죄가 아니다. 살인이라는 죄는 무엇을 위해 하는 가에 따라, 스스로 정당화된다. 두 명을 살해한 조선인과 국가의 체제를 유지시키기 위해 살인을 한 일본인들, 이 들이 저지른 죄의 무게는 같다. 하지만 죽는 건 조선인뿐이다. 국가라는 명분은 죄를 가리기 위한 허울에 불과하다. 그 허울은 그들과 같은 죄를 범한 민중, R을 통해 낱낱이 드러난다.


 R은 죄를 지었고, 사형에 처하게 된다. 그는 법이라는 국가의 체제를 유지시키기 위해 죽어야 한다. 그러나 R의 육체는 죽음을 거부한다. R이 무죄이기에, R이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하기에 죽음을 거부한 것이 아니다. 국가가 죄를 지은 자신을 처벌하는 것이 정당한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죽이는 국가는 정당한가? 일본은 여태껏 국가라는 체제를 세우고 유지시키고자 무수히 많은 민족들의 생명을 앗아갔다. 소수자를 억압하고, 살해하며 세운 것이 현재의 일본의 질서이자 법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법은 다시 죄를 저지른 민중을 향한다. 일본이 저지른 살인과 전쟁은 과연 누가 처벌할 것인가? 국가라는 체제를 만들기 위해, 일본이 저지른 악행이 처벌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은 무슨 자격으로 개인의 죄를 심판하는 것인가?


 R은 자신이 R임을 거부한다. 단순히 그 자신의 본명이 R이라는 것을 몰랐던 게 아니다. 일본인들에 의해 규정된 R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의심을 품었을 뿐이다. 조선인은 이렇게 행동해야한다. 조선인 가족 밑에서 자란 넌 이렇게 했을 것이다.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폭력적인 말과 시선을 내비친다. 이는 이당시 일본이 조선을 포함한 다른 식민지 국민들을 얼마나 폭력적으로 대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R은 조선인이기에, 범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R은 조선인에 대해 일본인들이 갖는 편견을 모두 품고 죽어야 한다. R의 상상 속에서 존재한 누나는 당시 일본인들이 조선인들 향해 가졌던 편견들이 그대로 형상화된 인물이다. 조선의 통일을 위해, 민중을 위해 저항을 하고 이를 위해선 폭력적인 방법도 마다하지 않는 인물, 그것이 당시 일본인들이 생각한 조선인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R의 누나는 R의 범행을 두고 국가를 위해 민족을 위해 한 것이라고 변호한다. 그러나 R은 자신이 범행엔 그런 동기가 있지 않다고 말한다. R은 일본인이 생각하는 조선인 R이 아니다.


 집행인들은 과거 R이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왔다는 것을 착안하여, 그의 과거의 기억을 되새긴다는 명분하에, 가난한 가정의 모습을 집행 장 안에서 재현한다. 가난한 가정을 재현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편견과 폭력을 어김없이 드러낸다. 가족끼리 폭력을 휘두르고, 말을 못하는 어머니는 서글프게 운다. 이것이 소외된 사람들을 바라보는 일본이란 국가의 모습이자 실체다. 가난한 사람, 조선인을 바라보는 국가의 시선은 편견에 가득 차 있었다. 국가는 모든 국민을 온전히 품을 수 없다.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을 모두 죽일 것이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내뱉고 조선인은 죽여도 아무런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가난한 자, 이방인들은 국가라는 틀을 유지하는 데 있어 방해되는 자들이다. 일본은 대동아 공영권을 내세우며 단일화된 국가, 단일화된 민족을 주장했으며, 이를 침략의 도구로서 철저히 이용해왔다. 그렇게 국가라는 명분으로 자행된 학살과 살인은 결국 일본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소수자들을 향하게 된다.


 R은 스스로의 살인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것을 상상 속의 일이라 속여 왔고, 상상 속에서 살아왔다. 그러나 마지막에 그는 상상 속에서 벗어나 자신이 R임을 인정한다. 이러한 R의 모습은 자신의 살인을 두고 국가를 위한 것이라, 국가라는 체제가 시켜서 해온 것이라 굳게 믿어왔던 집행인들의 모습과도 겹쳐진다. R의 상상은 그가 사는 곳, 곳곳마다 존재했다. 사형 집행인들에게 국가는 그들이 사는 곳, 곳곳마다 존재했다. 마치 R의 상상 속의 존재처럼 국가란 그 실체는 없지만 내가 가는 곳곳마다 보이는 상상 속의 존재와 같이, 우리를 구속하고 살인과 폭력을 정당화시킨다. 당시 일본이 국가를 위한 다는 상상에 미쳐 얼마나 많은 전쟁범죄를 저질러왔는지를 생각한다면, 이 영화가 얼마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R은 조선인도 일본인도 아니다. 동시에 조선인과 일본인 모두이기도 하다. R은 허울뿐인 상상을 통해 자신의 범죄를 정당화해온 일본인의 모습과 일본이란 국가적 명분에 의해 희생되는 조선인의 모습을 모두 담고 있다. R이란 존재는 국가를 위한다는 일제의 광기어린 정책에 의해 살인과 폭력을 저지른 일본인, 그 폭력 속에서 희생되는 조선인 모두를 의미한다.


 국가라는 허울뿐인 실체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단 걸 알게 된 R은 죽음을 선택한다. 집행 장 바깥을 나가도, 자신이 일본이라는 국가에 속한 개인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국가라는 허상 속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 체제를 바꿀 수도, 국가라는 허상을 없앨 수도 없다. 그렇게 벗어날 수 없는 허상 속에서 R은 결국 죽음을 택한다. 이 영화는 인간은 인간 스스로 살인의 정당함을 부여하기 위해 법이란 체제를 만들고, 사형이라는 규칙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국가와 법이라는 체제가 만약 살인을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면, 그것은 자신의 살인을 잊기 위해 상상 속에서 살아온 R의 모습과 무엇이 다른가?


 사형제도는 왜 폐지되어야 하는가? 극 중 아무도 그 이유에 대해서 제대로 된 답변을 하지 못한다. “찝찝하다. 기분이 좋지 않다.”정도로만 말할 뿐이다. 하지만 이젠 사형 제도의 실체를 바라봐야 한다. 사형제도란 살인을 정당화하기 위해 국가 만든 허상에 가깝다. 국가라는 허상이 인간을 살해하는 것을 정당화한 다해도,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게 죄라는 사실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





3.개인을 가두는 시대의 허상에 대하여

 위의 두 영화 모두, 개인을 가두는 체제에 대해 말하고 있다. <홍등>은 오래전부터 내려온 중국 사회의 감시와 통제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교사형>은 국가라는 체제를 유지시키기 위해 개인을 억압하고 살해한 일본 사회에 대해 말하고 있다. 비합리한 체제 속에서 개인은 어떻게 동화되었고, 어떻게 저항하였는가. 사회를 유지시키기 위해 설립된 체제는 언제나 합리적이고 정당한가? 모든 개인들에게 있어, 국가라는 체제는 합리적이었는가? 국가와 법은 결국 누구를 위해 존재해왔는가? 전통 사회의 체제 속에서 자신의 권위만을 내세우는 천씨, 사회와 법을 유지한다는 명목을 위해 무수히 많은 민중들을 살해해온 일본의 공무원들, 이들은 국가와 전통이라는 체제를 유지시키기 위해 이방인과 여성과 같이 소외된 이들을 구속하고 억압해왔다. 그렇다면, 전통과 국가라는 체제의 당위성은 누가 정하는 것일까.  진나리 댁은 전통과 가법에 의해 모든 것이 정해진다. 가법은 이 사회를 유지시키는 체제이다. 하지만 이 가법에서도 개인이 절대 알아선 안 되는 비합리적인 행위가 벌어진다. 살인을 보고도 보지 않은 척 해야 하고, 알아도 알지 못한 척을 해야 한다. 전통 사회를 유지시키기 위해 모든 이들이 이런 비합리적인 행위를 받아들인다. 일본의 공무원들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잘못된 것임을 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찝찝하고 기분이 안 좋다고 말하지만, 국가가 정한 법이라는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형을 집행한다. 합리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 형성된 국가와 법임에도 불구하고, 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비합리적인 행위가 벌어진다. <홍등>에선 가법에 따른 절차가 이에 해당하고 <교사형>에선 사형 제도가 이에 해당한다. 결국 우리는 합리적인 사회의 체제를 만들기 위해 일정 부분 비합리적인 행위를 묵인하고 있다. 위의 두 영화는 우리가 속한 사회체제는 늘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합리적인 체계를 유지시키기 위해, 누군가는 불합리한 진실을 묵인하고, 다른 누군가는 목숨을 잃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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