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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 Jan 04. 2023

삶을 위한 움직임, 그 속에서 느껴지는 삶의 향기

[체리향기]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

맛과 향기는 그것을 경험한 사람마다 다르게 느낀다. 체리의 맛과 향기가 대강 달콤하고 시큼하다는 것을 다들 얼핏 알고는 있지만 이 맛을 표현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각각 다르다. 삶 또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모두 같은 시간대에서 살아가지만 각자 삶과 죽음을 다르게 받아들이고 해석한다. 어떤 이는 세상이 아직 살만한 곳이라는 것을 충분히 느끼고 그 삶의 향기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반면, 다른 어떤 이는 타인들로부터 여러 번 호의를 받고 처음만난 노인으로 부터 세상이 아직 살만하다는 것을 들었음에도, 죽음에 몸을 맡긴다. 또 다른 이는 삶과 죽음에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자신이 해야 할 업무에만 몰두하고, 다른 이는 삶과 죽음은 신으로 부터 온 것이라 믿으며 스스로 죽음을 택하려고 한 남자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매 순간 삶의 맛과 향기를 느낀다. 자동차를 타고 자신의 죽음을 결정해줄 사람을 찾는 한 남자는 하루 동안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그들이 느낀 각자의 삶의 무게와 그 향기를 느낀다. 이들 모두 같은 시간을 살아가지만, 이들이 가진 삶의 목적, 가치를 두고 있는 것들은 각자마다 달랐다. 바디는 자동차를 몰고 자신의 죽음을 결정해줄 사람을 찾아 나선다. 가장 처음으로 그의 차에 탄 남성은 군인이다. 자신의 죽음을 책임져 달라는 바디의 부탁에 그는 곧바로 질색하며 거부한다. 그에게 있어서 삶과 죽음의 문제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부대라는 공동체 안에서의 규율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이 그의 삶의 목적이었다. 자신의 죽음을 맡기겠다는 바디의 부탁은 군인신분으로 그로썬 지킬 수 없는 것이었기에, 그는 그 부탁을 거부하고 달아난다. 첫 번째 남자는 사회가 정한 규율과 규칙을 상징한다. 군대라는 사회에 속한  남자는 군대가 정한 규칙이 그의 삶에 있어 크게 작용한다. 민간인의 죽음을 그대로 목격하고 방관하는 것은 군인신분으로 할 수 없는 일이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러기에 그는 더 이상 일이 커지기 전에 그 자리를 떠난다.

 바디의 자동차에 두 번째로 탑승한 사람은 성직자이다. 그는 바디가 자살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듣자마자, 그것은 신의 뜻을 어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성직자는 불우한 상황 속에서도 돈을 벌기 위해 매일 노력하고 있었으나,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이 믿어왔던 신앙적 가치를 포진 않는다. 자신의 삶과 죽음은 누가 결정하는 것인가? 성직자는 삶과 죽음은 신으로 부터 오는 것이고, 인간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을 죄악이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바디에게 죽음이란 삶을 견딜 수 없는 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해결책이었다. 삶과 죽음은 누구로부터 주어지는 것이고, 이 삶과 죽음을 인간이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죄인가? 적어도 신을 믿는 누군가에겐 죄라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신을 믿지 않고 죽지 못해 살아가는 이들에겐 그것은 죄가 아닌 지옥과 같은 삶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결책일 것이다.

 두 번째 남자는 종교를 상징한다. 매일 불우한 상황 속에서도 종교적인 신념, 신의 교리를 포기하지 않는 남자의 모습은 우리가 흔히 생각해온 이상적인 종교인의 모습이다. 그에게 있어 죽음을 선택한다는 것은 신의 교리에 반하는 것을 의미하고, 이것은 죄악이 된다. 종교와 아무런 관련 없는 바디와 같은 사람에게 죄란 신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바디에게 있어 자살이 결딜수 없는 삶으로 부터의 해방이라면, 성직자에게 있어 자살이란, 신이 자신에게 준 삶을 스스로 내던지는 죄악인 것이다. 이 둘이 느끼는 삶과 죽음의 무게는 확실히 다르다. 이 둘의 차이를 통해 영화는 종교인과 비종교인이 삶과 죽음에 대해 느끼는 무게가 다름을 보여주고 있다.

 세 번째로 바디의 자동차에 탑승한 남자는 삶의 순간순간을 포착해낸 사람이다. 그는 과거 바디와 같이 자살을 기도했지만, 그 순간 바닥에 떨어진 체리를 맛보게 되고 다시 삶의 의지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 체리의 맛과 향기를 느끼는 것은 살아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감각은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해주는 가장 직관적인 요소이다. 감각을 통해, 자신이 살아있었음을 깨닫고 삶의 의지를 얻었다는 남자의 말을 들은 바디는 그 감각을 다시 한 번 느껴보고자 한다. 바디는 박제사로 일하고 있는 남자에게 다시 찾아가 자신이 자고 있을 뿐 살아있을 지도 모르니, 돌멩이 두개를 던져달라고 말한다. 이전까지 자신의 이름을 두 번 불러달라는 부탁만을 해온 바디가 통증을 통해 다시 한 번 삶의 감각을 느껴보고자 한 것이다.

 우리를 살게 만드는 것은 무엇 일까? 무엇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살아있다고 느껴지게 만드는가? 그것은 움직임을 통해 얻어지는 감각들이다. 종교와 사회적 규칙은 우리에게 삶을 살아갈 방법과 정신적인 위안만을 전해줄 뿐이다. 직접 움직여 삶의 목적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삶은 바뀌지 않는다. 삶의 목적을 찾고자 하는 그 움직임 속에서 우리는 여러 감각들을 느끼고, 그 감각을 통해 삶의 의지를 얻는다. 언젠가 한 토크쇼에서 한 진행자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아무 것도 안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입니까? 그냥 저렇게 있으면 되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얻을 수 있는 건 없다. 바디는 자살을 위해 자동차를 몰고 길을 헤매던 와중에서도 삶을 살아가는 다양한 인간군상을 보게 된다. 군인과 성직자, 박제사 모두 자신의 직업적 사명 아래에 일하고, 그 노동을 통해 삶의 감각을 느끼는 이들이다. 이 영화는 죽기 직전의 남자의 하루 동안의 여정을 보여줌으로써,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 속에서도 움직임이 있으며, 그 움직임을 통해 느껴지는 감각이 우리를 다시 살게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시즈프스는 매일 산꼭대기까지 바위를 굴려 가야하는 형벌을 받는다. 그가 바위를 산꼭대기에 올려놓으면, 바위는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지게 된다. 혹자는 이 시즈프스의 이야기가 한 가지 목표를 이뤄도, 또다른 목표가 생기면서 매일 이것을 반복되는 우리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이 영화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 매일 반복되는 움직임이 우리를 살게 만들고 그 움직임 속에서 얻게 되는 감각들이 우리를 살게 만든다고 말하고 있다.

 <체리향기> 속의 여러 인물들은 각기 다른 삶을 살아갔고, 그들이 느낀 삶의 감각도 각자 마다 다르다. 우리는 장면들을 통해 그들의 삶을 간접적으로 들을 뿐, 그들의 인생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또 영화는 그들이 내린 결정과 판단이 무조건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라는 마지막 노인의 말 또한 극 중 긍정적으로 묘사되진 않는다. 어디까지나 관찰자의 시점에서 그들의 삶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바디는 성직자에게 당신과 내가 살아온 삶이 다르기에 나를 설득하려거든 포기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인생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이 영화의 태도이다. 누군가의 삶을 두고 그것이 옳고 그르다는 것을 쉽게 판단하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큰 오만일지도 모른다. 각자 마다 다른 삶이 있고, 다른 선택들이 있을 뿐이다. 죽음을 향한 바디의 선택은 어쩌면 그에게 있어선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끝까지 죽겠다고 마음을 먹었던 바디가, 노인의 말을 듣고 내가 살아있을지 모르니 돌을 두 번 던져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그가 자신만의 관점에서 벗어나 타인의 생각을 조금씩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관객들에게 특정한 삶의 태도를 강요하지 않고, 그들의 삶을 조금씩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태도는 매우 관조적이다. 그러나 인생을 바라보는 이 관조적인 태도가, 이 영화를 더욱더 가치 있게 만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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