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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 Jan 04. 2023

사랑이란 이기심에 대하여

[해피투게더] -왕가위 감독


 하나는 둘이 될 수 없다. 둘 역시 하나가 될 수 없다. 그러나 모든 인연은 둘이 하나가 될 것처럼 시작한다.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면서 연인간의 갈등이 시작된다. 서로가 가장 뜨겁게 사랑을 나눌 때, 서로가 가장 가까워질 때는 서로의 관계가 가장 위태로워 질 때이다. 더 가까워지기 때문에 상대의. 결점과 자신과의 차이를 극명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연인간의 사이가 가장 가까워질 때 나타나는 그 위태로움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보영은 아휘가 자신의 여권을 감추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상황 속에서 씩씩대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방을 나간다. 보영과 아휘는 거칠게 싸우고, 다투지만 이내 포기하고 다시 본 상태로 돌아오게 된다. 사랑은 그런 위태로움을 감내하는 것을 통해 지속된다. 이 위태로움을 지속 시키는 이유는 함께 해야 한다는 강박, 그래야 행복해질 수 있다는 착각 때문일지도 모른다.


 빠르게 움직이면서 지나가는 자동차들, 현란한 불빛 들 속에서, 보영과 아휘의 시간만이 멈춰 있다. 폐쇄된 방안에서 그들은 위태로운 관계를 이어나간다. 폐쇄된 방안에선 다양한 감정들이 싹튼다. 자신을 속박하는 아휘를 향한 보영의 분노, 자신을 두고 매일 밤늦게 들어오는 보영을 향한 아휘의 의심 , 몸살 걸린 자신을 신경 쓰지 않고 밥을 해달라고 조르는 보영을 향한 아휘의 섭섭함,  이런 감정들이 모여 이들의 관계를 지속시킨다. 때론 이런 부정적인 감정들이 극단에 치닫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이런 부정적인 감정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관계가 지속 될 수 있다는 것은 그들의 사랑이 그 감정들을 뛰어넘을 만큼 강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증거이다.


 그런 모든 감정을 감내해가며 사랑했기에, 서로에게 있어 상대는 전부였기에, 이별 후 찾아오는 공허함은 더욱 크다. 그만큼 내가 사랑하고 내 감정을 투자해온 관계이기에, 그래서 더 놓지 못하는 것이고 그래서 더 그리워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어쩌면 완전히 이타적인 사랑은 없을 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그의 손이 낫지 않기를 바랐다. 아픈 그와 함께 있을 때가 가장 행복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보영의 손이 낫지 않기를 바랐던 아휘의 모습은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 관계를 맺고 그것을 지속시키고자 하는 우리들의 모습과 매우 닮아있다. 하지만 그런 이기심 없이는 아휘가 보영에게 보여준 강렬한 사랑을 할 수 없다. 아무리 사이좋고 서로를 먼저 생각하는 관계라 할지라도 결국, 각자의 삶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내 자신이 더 외롭기 때문에 상대에게 사랑을 갈구하기 마련이다.


 하나가 되지 못한 보영과 아휘는 이별하고 나서야 둘 사이의 공통점을 알게 된다. 바로 고독해졌을 때 인간은 모두 똑같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이기심과 외로움을 가지고, 위태로운 관계 속에서 사랑을 갈구한다. 그러나 그 사랑은 각자의 이기심과 외로움으로 부터 시작된 것이기에, 항상 평탄할 수는 없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외로워지는 것을 싫어하기에 그런 위태로운 관계 속에서도 사랑을 이어나가고자 한다.


 보영과 아휘 역시 이별 후 서로를 잊지 못해,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거나 사랑을 나눈다. 이것은 동성애이든, 이성애이든 마찬가지이다. 이별 후 찾아오는 통증은 상대에 대한 연민이나, 상대를 위한다는 마음에서 부터 오지 않는다. 내가 그 사람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그 사람과 함께 했을 때 느꼈던 행복도 이젠 느끼지 못하는가? 와 같은 감정이 우리를 더욱 슬프고 외롭게 만든다.


 사랑은 이렇게 이기적인 우리들을 잠시나마 이타적으로 만드는 수단일지도 모른다. 아휘는 보영과 이별하자,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들으려 하고, 이구아수 폭포에 혼자 온 것을 후회한다. 그때 그 사람에게 더 잘했다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 더 생각했다면 나는 지금 즈음 혼자 있지 않을 텐데 와 같은 생각들이 마음을 찌르고 우리를 더욱 고독하게 만든다.


 아휘는 지구의 반 바퀴를 돌아 남극 앞 등대에서 보영에 대한 기억을 가슴 속에 묻고자 했으나, 실패하고 다시 보영이 지낸 홍콩으로 돌아온다. 그는 식당을 운영하는 보영의 부모님을 만나게 되고, 몰래 보영의 사진을 가져간다. 그리움과 미련이란 사실 이기적인 감정이다. 내가 그 사람을 떠나보냈음에도 , 결국 그 사람 없이는 내 마음이 괴롭고 허전하기에 그 사람을 찾을 수 있는 곳에 가고, 그 사람이 찍힌 사진을 본다. 함께해서 행복하다는 뜻인 영화의 제목,happy together는 사실 거짓말이다. 함께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행복하기 위해 우리는 함께 하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나와 같을 수 없고, 그러기에 하나가 되려하면 할수록,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 사람과 나 사이의 성격차이, 그 사람의 결점들이 더욱 눈에 들어온다. 이 것은 같은 신체 구조를 지닌 동성들끼리도, 다른 신체를 지닌 이성들끼리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하나가 될 수 없는 한계 속에서도 우리는 사랑하는 누군가를 가슴에 품고자 노력한다. 아휘가 홍콩에서 보영의 부모를 만나고 보영을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을 찾은 것에 위안을 가졌듯, 헤어진 누군가를 가슴에 품고 사는 것은 그 행위 자체로 사랑하는 사람과 끝까지 함께 할 수 없던 자신에게 작은 위안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김종서의<아름다운 구속>의 가사 말처럼, 사랑은 아름다운 구속이다. 나도 모르게 어느새 그 사람이 내 인생의 중요한 부분이 되어 있고, 그 사람이 원하는 것들을 들어주고 있다. 그 구속에 갇혀 있을 땐 우린 모두 자유를 갈망한다. 하지만 그 구속이 끝나면   다시 혼자 남는 다는 두려움과 절망이 자유를 향한 갈망을 대체한다. 사랑이란 감정은 우리가 혼자였다는 사실을 잊게 만들고, 나를 구속했던 누군가와의 날을 떠올리며 그날들을 그리워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 모든 날들이 좋았던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왜 그 좋지 못한 날들을 알면서 우리는 왜 계속 사랑을 갈구하는 것일까? 사람은 원래 홀로 완전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완벽한 사람이라도 가슴 속엔 병이 있고, 다른 누군가가 모르는 콤플렉스가 있기 마련이다. 이런 개인의 불완전성은 아휘의 시점에서 보이는 흔들리는 화면, 뚝뚝 끊기는 프레임을 통해 영화 속에서 연출된다. 보영없는 아휘의 삶은 흑백이다. 다시 보영이 아휘의 삶에 찾아오자 영화는 이내 색감을 되찾는다.


 이성애든 동성애든 그들이 느끼는 사랑의 크기와 본질은 다르지 않다. 지구 반대편인 아르헨티나에서 홍콩을 바라보면 홍콩은 거꾸로 보인다. 이성애자의 관점에서 그 반대인 동성애를 바라본다면, 뒤틀린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홍콩의 풍경은 거꾸로 보일지라도, 홍콩에서 들려오는 도시의 소리는 같은 것처럼,  그들이 하는 사랑의 본질은 같다. 한 사람의 겉모습은 관점에 따라 왜곡되고 뒤틀린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그 사람의 성대를 거쳐 나오는 소리는 왜곡되거나 뒤틀리지 않는다. 영화는 인간에게 있어 가장 보편적인 사랑이라는 감정은 개인마다 갖고 있는 형태만 다를 뿐, 그 본질은 같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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