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을 하면 어떨까?'
그동안 가슴 속에 꾹꾹 눌러 놓았던 이 단어가 '툭' 튀어나오게 된 이유가 있다.
베트남에서 한 여교사가 심각한 교권침해를 당하는 장면이 담긴 영상이 공개 돼 이슈가 되었다. 기사에 따르면 학생들 수 십 명이 음악 수업을 빼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여 교사 한 명을 구석으로 몰아 세우며 욕하고, 신발을 집어 던지고, 때리면서 공격했다고 한다.
지나가는 수많은 뉴스 중 하나로 넘길 수 없었다. 잊고 있던 사건 하나가 떠오르며 나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지난 5월, 화가 난다고 큰 소리로 욕하며 교실 뒤에 있는 쓰레기통을 뒤집어 엎고, 발로 차고서도 화가 풀리지 않아 교실 밖으로 뛰쳐 나갔다가 나를 공격하겠다면서 창문을 두드리고 문을 발로 찼던 한 학생이 생각났다. 그것이 트라우마가 되어 그 때 이후로, 그 학생이 폭력적인 성향을 내비칠 때마다 내 가슴은 방망이질쳐댔다.
그것이 '트라우마'였다는 걸 알게 된 건, 학교에서 벗어나 오롯이 내 자신을 보게 되면서였다.
이젠 괜찮아졌다고 생각해 내년에 복직하기로 마음 먹었지만, 이 기사를 읽으며 '내가 이런 상황을 또 만나면 어쩌지?' 라는 두려움이 몰려왔다. 가슴이 답답해졌다. 두려움은 생각의 꼬리는 물고 놓아주질 않았다. 계속 이어진 생각의 끝은 '도망'이었다.
'도망'이란 표현이 너무 거북하면, '회피'라고 생각할까? 어차피 같은 말이라고 한다면, '대안'이라고 해두자.
노후를 생각하면 그냥 붙어있다가 정년을 채우고 퇴직을 하는 게 낫겠지만, 이런 상황이 또 생기면 버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내 인생에서 한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사직서'라는 단어가 현실로 다가온 기분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기자 출신 막노동꾼을 인터뷰한 기사를 읽게 되었다. 이 분은 기자로 살다가 50세 즈음에 무슨 일이든 못할까, 싶은 마음으로 사직서를 제출하고 이런 저런 일을 하다가 대기업 공사장에서 '막노동'이라 부르는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젠 주말에 쉬고 월 400만원씩 벌면서 공사판에서의 이야기를 글로 써 책도 냈다.
이 분의 용기있는 결단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어떤 이유에서건 이 분 역시 결정을 내리기까지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기사를 읽는 내내 마음 속에 꽁꽁 묶어두었던 '사직서'가 있었기에 이 분의 상황에 감정 이입이 되었다. 사회에서 인정받는 직업을 스스로 내던지고 직업의 귀천을 따지지 않는 그 당당함에 기대보고 싶었다. 내가 교사를 그만두어도 밥 벌어 먹을 일 하나 없을까, 혹시 의외로 내가 정말 잘 할 수 있는 일을 발견하는 기회가 되지 않을까, 별별 생각이 다 들지만 결국 나에게 가장 필요한 건 '용기'였다. 다른 길을 선택할 용기......
트라우마에서 시작된 고민은 나의 미래까지 바꿀 생각을 하고 있다.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훗날 '트라우마'탓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