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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바라기 Jul 30. 2024

11살 한글 떼기 도전기(5)

새로운 경험, 용기 있는 선택

  매년 우리 반 학생들은 학기 말에 장기자랑을 한다.  혼자 나와서도 하고, 팀을 만들어서도 한다. 무조건 한 번은 앞에 나와서 발표해야 한다는 조건 외에는 형식도, 내용도 자유롭다.

  몇 년 전, 진짜 장기자랑할 게 없다고 했던 2학년 친구는 주먹밥 재료를 가져와 친구들 앞에서 주먹밥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한 개씩 나눠주기도 했고, 어떤 아이는 인터넷에서 퀴즈를 검색해 와 문제를 내고 맞춘 친구에게 작은 선물을 주기도 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방학을 앞두고 장기자랑을 한다고 공지했다. 대다수의 아이들이 신이 나서 신청서를 작성하는데 지윤이는 할 생각조차 안 했다. 할 게 없다고만 했다.


  친구들 앞에서 책 읽어보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잠깐 머뭇거리더니 좋단다. 그날 오후, 받침 없는 동화 시리즈 중에서 마음에 드는 책 한 권을 고르고, 4페이지 정도 읽는 연습을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기에는 시간이 많이 걸려 읽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혹시나 한글 공부하는 걸 지윤이가 창피하게 생각하면 어쩌나 잠깐 고민했지만, 그것 역시 넘어야 할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지윤이가 모르는 걸 알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당당함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고, 그것을 지켜보는 친구들 역시 색안경을 쓰고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칭찬과 격려를 해주는 학급 문화를 만들고 싶었다.


  장기자랑 순서에 따라 친구들이 차례차례 나와서 발표를 했다. 지윤이 차례가 되었을 때, 지윤이는 어린아이들이 읽을 법한 그림 동화책을 들고 앞에 나왔다.  유창하진 않지만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 담듯이 읽어 내려가는 지윤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실물화상기로 책을 보여주지 않고, 보면대 위에 책을 놓고 게 한 것은 혹여 틀리게 읽는 글자를 친구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는 나름의 전략이었다. 그림책 4페이지를 읽는 시간이 왜 그리 더디게 흐르는지... 내 손에 있는 땀샘이 고장 난 듯했다. 지윤이와 매일 둘이서 공부하던 시간들이 떠올라 괜히 울컥했다. 지윤이는 긴장했는지 연습한 글자를 몇 개 틀리긴 했지만 별 탈 없이 잘 읽었다.


  왜 이런 걸 장기자랑으로 하냐며 의아한 반응을 보인  몇몇 남자아이들의 목소리는 다행히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하는 센스쟁이 여학생들한테 묻혔다. 약속했던 분량만큼 다 읽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지윤이에게  "지윤아, 잘했어!" 외치는 몇몇 친구들의 응원 섞인 말들로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졌다.


  장기 자랑이 끝나고 지윤이는 어김없이 남아서 한글 공부를 했다. 지윤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너무 궁금했다.  워낙 표정이 없고 말로 표현하는 걸 어려워하는 아이라 쉽게 자기감정이나 생각을 드러내질 않아 공부가 끝나고 집에 가기 전, 슬쩍 물었다.

  "오늘 발표해 보니까 어땠어?"

"  재미있었어요."

  말 끝에 입꼬리가 올라가며 미소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재미있고, 행복하고 뿌듯했어요." 미처 표현하지 못한 말들이 재미있었다는 한마디에 담겨있는 것 같았다.


  나도 할 수 있는 게 생겼다는 자신감, 앞으로 더 잘해보고 싶다는 용기가 지윤이 마음 한편에 자리 잡게 된 것 같아 너무 기쁘고 뿌듯했다. 


친구들 앞에서 책 읽어보겠다고 용기 내 준 지윤가 기특했고, 지윤이가 새로운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준 나도 대견했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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