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그냥 좀 내버려 둬
아래는 이 글의 전편을 안 읽어 보신 분을 위한 링크주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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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집에 갔던 어느 날이었다. 놀이시간이 되어 또다시 친한 아이들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여자아이가 날 부르곤 따라와 보라고 했다. 이제부터 그 애의 성을 따서 U 양이라 부르겠다.
U양이랑은 엄청 친하진 않지만 너무 서먹한 사이도 아닌 그런 관계였다. 꽤 의아했다. 왜지?
그렇게 난 U양을 따라가 책상에 앉았고, U양은 서랍에서 미니 화이트보드를 꺼내왔다. 그러곤 보드마카로 어떤 단어를 하나 썼다. 기억은 안 나지만 '나비'같이 쉬운 단어였을 것이다. 아무튼 그리고는 단어를 소리 내 읽으면서 나한테 따라 말하라 했다. 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두리번거리자, 말할 것을 재촉했다. 그래서 최대한 (물론 나에게 최대한 이었어서 지나가던 개미도 갸웃거릴 정도였다) 크게 따라 말했다. 하지만 U양은 얼굴을 찌푸리고 답답해하며 소리쳤다.
"아니, 더 크게! 더 크게 좀 말해보라고. 왜 말을 못 해?"
그 말에 내 가슴은 쿵 내려앉았다.
너무 큰 타격을 주는 말이었다. 폭탄 하나가 세게 펑 터진 느낌이었다. 말을 하고 싶어도 그게 하늘에 별따기였던 7살짜리 꼬맹이에게는 아주 큰 상처였다. 물론 내가 답답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그걸 온몸을 동원해서 그렇게까지 표현하는 애는 처음 보았다.
한숨을 쉬며 U양은 다른 단어를 보드에 쓰고 말했다.
"이건 말할 수 있지? 어? 말해, 말하라고! 너 진짜 말을 못 하는구나? 너 아기 아니잖아, 어?"
U양은 더욱 신경질 적이게 말을 이어갔고 나는 온몸이 경직된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말이 없는 데다가 꽤 온순하고 기분 나쁘다 표현을 잘 못하는 아이였기에 찍소리는커녕 얼굴도 찡그리지 못했다. 순간 머리가 지끈거리면서 눈앞이 하여졌다. 끔찍하고 무서웠다. 혼란스러웠다. 화가 났다기 보단 그땐 그저 공포스러웠다.
말을 안 하면 안 된다는 압박감을 받으며 점점 불안해졌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못하고 화이트보드만 바라봤다. 그날따라 화이트보드가 참 미웠다.
주변을 둘러봐도 나와 U양 쪽을 보고 있는 애는 없었다. U양의 말을 들은 아이도 없었던 것 같다(설마 들었는데 못... 아닐 거다.. 아닐 거라고 믿었다) 선생님도 좀 멀리서 일하고 있었던 터라 우리 쪽을 보지 못하셨다. U양이 갑자기 "뭐 해! 앞에 봐, 집중 안 해" 하고 호통(?)을 치자, 난 화들짝 놀라 고개를 다시 돌려야 했다. 눈물이 나올 거 같았지만 꾹 참았다. 그저 악몽을 꾸는 것이라 믿고 싶었다.
그렇게 30분 정도인 놀이시간이 마치 3시간으로 느껴졌다.
그래도 나의 최대 장점은 힘든 일이 있으면 부모님께는 재빨리 말한다는 점이다. 내가 모든 걸 털어놓고 눈물 폭포를 쏟아내자, 엄마가 다음 날 어린이집 끝나면 U양에게 이야기해 주겠다고 했다. 아빠도 혼쭐을 내 줄겠다고 거들자 내심 기분이 좋아졌다.
다음 날, 이야기했던 대로 엄마는 잠깐 U양에게 할 말이 있다고 다가갔다. 나는 차마 못 듣겠어서 반으로 다시 들어가서 선생님과 있었다. 선생님도 이미 그 일에 대해 들어셨는지 내가 서성이자 괜찮다고 다독여주셨다. 그리고 약 3분 후, 반을 나가자 U양은 무표정인 얼굴이었다. 그 애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또 어떤 가시 같은 말을 꺼낼지 두려워서 빠르게 엄마에게 달려 같다.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U양은 아무 말 없이 나를 지나쳐갔다. 휴... 안심이었다.
그리고 엄마께 안겨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보니, 이제 괜찮다 하시며 우리 두 모녀는 집으로 향했다.
이 일은 나에게 꽤나 큰 충격이었지만, 그래도 7년 전인지라 많이 잊혔다.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두려웠던 상황이었슴에도 불구하고, 그 일에 대한 트라우마는 단 한— -개도 없다는 것! ㅎㅎ
지금 그때로 돌아가면 가만히 있지만는 않았을 텐데.
아주 그냥 혼을 내줬을 텐데. 약간 아쉽다. 너 우리 엄마야? 네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이렇게 말할 수 있었는데 약간 아쉽다. ㅎ
(그런데 나중에 U양을 학교에서 만나며 위치가 완전히 뒤바뀌어 버리는 에피소드도 넣을 예정이니 기대해 주세요!)
저번 회차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내가 좀 어두운 이야기만 썼던 것 같아서 말이다. 하지만 기대하셔도 좋다.
다음 회차는 초3이 되면서 나의 캐릭터가 자연스레 확 바뀌어 버리며 일어나는 일에 대한 짜릿함을 느낄 수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