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에 감정을 입힌 독창적인 예술가, 앙리 마티스
주말에 화가 앙리 마티스의 전시를 보았다. 그것도 전라북도 군산에 가서 말이다. 집은 서울인데. 아침부터 2시간을 운전해서 데리고 가주신 아빠께 감사하다. 정말이지 만족스럽고 가치 있는 시간이었다. 원래 돌아온 당일 저녁에 이 글을 쓰려고 했다. 가장 여운이 남아있을 때 즐겁게 싶었지만, 점심때부터 머리가 조금씩 지끈거리더니 저녁에 훅 두통이 와서 침대에 쓰러졌다.
(다행히 다음 날 일어나 보니 괜찮았다.)
앙리 마티스는 프랑스의 화가이자 대표적인 야수파 화가이다. ‘야수주의 (fauvism)’는 20세기 초반에 잠시 나타났던 미술 사조(미술이 지닌 사상의 시대적 흐름)인데, 강렬한 표현과 색을 선호해 밝은 색을 사용한 거친 붓질이 특징이다. 구글에 ‘야수파‘라고 검색해 보면 알록달록한 색들을 과감히 칠한 듯한 여자 그림이 나온다. 그 작품이 바로 앙리 마티스의 ‘모자를 쓴 여인‘이다.
사실 난 전시회를 가기 전부터 마티스와 그의 작품을 좋아하고 있었다. 한 번은 미술 공부를 해볼까, 하고 ‘모마 미술관 도슨트북 그림들‘을 빌려 읽어보았다. 그림 도슨트가 저자라 그런지 설명이 쉽게 이해되고 재밌어서 술술 읽혔다. 화가들의 그림에 담긴 생각과 가치관 같은 것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어 좋았다. 수많은 낯선 화가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자꾸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 자신만의 빛나는 색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다채로운 색의 팔레트에서 가장 내 마음을 흔들었던 것은 마티스의 강렬한 색채였다. 처음 본 순간 자연스레 이상한 황홀감에 젖었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아름다운 색깔에 부드럽게 휘감기는 느낌이었다.
‘삶의 기쁨’이란 작품을 보고 그런 감정들을 느꼈다.
몽환적인 꿈같은 세계 속 사람들 모두 기쁨에 취해 있는 모습이다. 손에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도는 사람들도 있다. 밝은 색들과 부드러운 곡선들을 보니 편안함과 행복감이 몰려온다. 정말이지 '삶의 기쁨'을 잘 녹여낸 것 같다.
책의 다음 페이지에서 '모자를 쓴 여인'을 보았다. 그냥 보기만 했지만 일단은 꽤 마음에 들었다. 피부를 초록색으로 제멋대로 칠하곤 다른 부분 역시 거침없이 원하는 대로 쓱쓱 칠한 게 보였다. 옛날 그림들은 아주 현실적인 묘사와 색을 입힌 게 많던데, 개인적으로 조금 지루하다 느꼈다. 다 잘 그리긴 했지만 솔직히 나에겐 비슷비슷해 보이고 어딘가 밋밋한 구석이 있어 아쉬웠다. 그런 작품들 사이에 불쑥 튀어나온 개성 있는 독특한 반항기가 좋았다.
그런데 내가 그의 세계에 진심으로 푹 빠져버린 것은 그림에 대한 마티스의 말을 읽었을 때이다.
과거에 처음 그가 이 그림을 공개했을 당시에는 심하게 혹평을 받았다. 실은 이 그림의 모자 쓴 여인은 바로 그의 아내 아멜리에였다. 사람들은 자신의 아내의 얼굴을 초록색으로 칠한 그를 비난했다. 예술가들이 한 동이의 물감을 대중의 얼굴에 퍼부은 것 같다는 둥, 야만적인 짐승 같다는 둥 말이다. 이런 야수스럽다는 혹평에서 '야수주의'가 탄생했다고 볼 수 있긴 하다.
그렇게 마티스만의 예술방식을 이해하지 못한 대중들에게 그는 말했다. 자신은 아멜리에의 모자, 드레스의 색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고 오직 그녀에게서 느꼈던 설렘과 흥분의 색만을 기억한다고. 그녀의 행복한 감정을 캔버스에 담았을 뿐이라고.
순간 머리가 띵 울렸다. 설렘과 흥분의 색이라니, 마음의 색을 칠한다니!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탄과 감격이 거세게 밀려왔다. 그가 만약 이때의 나를 그렸다면, 그의 그림 속 나는 아멜리에처럼 봄날의 행복감의 색채를 뒤덮고 있지 않았을까? 그 후부터 그의 세계가 더욱 깊이 와닿았던 것 같다.
처음 좋아하게 된 화가의 작품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니, 입구부터 가슴이 두근댔다. 알고 보니 모작들을 전시한 거였지만, 작품에 대해 더 알아갈 수 있다면 충분했다. 처음 들어가니 딱 '모자를 쓴 여인'이 나와 반가웠다.
그림은 알고 보는 거랑 모르고 보는 게 천지 차이라고, 정말 맞는 말이다.
화가가 어떤 배경에서 어떤 생각과 가치관으로 이렇게 표현했는지, 대강만 알아도 한 작품에 더욱 오래 머물고 더 느끼고 생각하고 싶어졌다. 눈으로 직접 보니 확실히 더욱 여운이 강렬했다. 참 아름다웠다. 처음 보게 된 작품들도 있었는데 그것들 역시 원근법 같은 회화기법은 무시한 채 그려졌다. 그런 현실감을 위한 전통적인 방식이 무시됐는데도 뭔가 보면 볼수록 몰입되었다. 마치 저 장소가 진짜 존재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 그림 속 바다의 출렁임이 들리고, 이 그림 속 꽃들의 향기로움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림 속 세계 하나하나가 나를 행복 속으로 끌어당겼다. 자, 잠시 스크롤을 멈추고 한번 감상해 보시라. 물론 눈으로 보는 게 더 좋겠지만 사진으로도 충분히 만끽하실 수 있을 듯하다.
더 들어가 보니, 그의 생전의 화실로 꾸민 방이 있었다. 그 화실 안에는 자신의 ‘붉은 화실‘을 그린 작품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실은 그의 화실은 흰색이었다고 한다.
보이는 대로 색을 입히는 것이 아닌, 심상에서 우러나온 색을 표현하는 걸 진정한 예술로 여겼을 것이다. 마음속 붉은 방을 그리다니, 또다시 반해버렸다.
이쯤 되니 궁금해졌다. 마티스의 마음속 화실은 왜 하필 붉은색이었을까? 그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을 가장 강렬히 표현할 수 있던 색이었던 걸까?
이 ’붉은 화실’ 외에도 ’붉은 방‘처럼 붉은색을 사용한 그림이 많다. 나중에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겠다.
출구 쪽에는 이런 문구가 보였다.
나는 내 그림들이 봄날의 밝은 즐거움을 담고 있었으면 했다.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무도 모르게 말이다.
이 말에 살짝 마음이 찡했다. 실은 70세 무렵에 그는 건강이 많이 악화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예술에 진심이었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물감 사용 대신에 종이를 오려 붙이는 (The cut - outs) 새로운 방식을 창조해 예술활동을 이어갔다.
그가 대나무 막대를 이용해 침대에 누워 벽에 그림을 그리는 사진을 봤다. 사진 속 그는 미소 짓고 있었지만 실제론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었을까.
아픔 속에서도 생의 끝까지 밝고 따스한 봄날의 즐거움을 그려냈던 그에게 존경을 표한다. 그의 아름답고 찬란한 마음이 그의 그림들을 통해 와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