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조금씩 지쳐가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애써 차곡차곡 돌을 쌓아보려 해도 자꾸 툭툭 무너지듯이. 나의 마음도 소리 없이 무너져갔다.
뭘 해도 통 안 됐다. 난 잘하고 싶은데, 열심히 했는데. 가장 나를 흔들어 놓았던 것은 실은 영어학원이다. 해외생활 2년 했다고 나름 가지던 영어를 향한 자부심은 이미 사그라든 지 오래다. 솔직히, 많이 어려웠고 어렵다. 문법은 너무 헷갈렸고 모르는 단어와 표현 투성인 지문들을 이해하기도, 매번 60개가 넘는 단어를 외우기도 버겁다. 2년 내내 영어 수업만 들어왔는데 듣기는 뭐 ~ 떡이지,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들은 것은 미처 접해보지 못한 외계어였다. 시간이 지나면 적응되지, 믿었다. 오산이었다. 듣기 교재에는 늘 빨간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자존심이 제대로 긁혔다. 더 수치스러웠던 건 내 위에 올라가 있는 다른 모두를 보았을 때다.
영어가 아닌 다른 것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수없이 비틀대고 넘어지는데 다른 아이들은 꼿꼿이 잘도 걷는다. 심지어 누구는 뛰고 누구는 난다. 비참하고 씁쓸했다. 나만 못나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다 잘난 도자기인데, 나만 깨진 유리그릇처럼 초라하게 느껴졌다. 다들 다 웬만해서는 잘하는데 난 웬만하면 거의 못하고, 다 아는데 난 모르고. 이러다 존재감 없는 사람 13 쯤 되지 않을까. 홀로 구불구불 돌아가고 있단 생각이 들었을 때, 울컥 눈물이 났다.
그렇게 끊임없는 실패의 자괴감과 괴로움의 연속이었다. 어제 체육수업이 끝나고는 정말 힘이 푹 빠진 상태였다. 그런 나를 따뜻하게 감싸 안아 일으켜준 분은 바로 국어 선생님이셨다.
국어 수행평가를 제출하기 위해 교무실에 들렀다. 평소처럼 국어 선생님은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반겨주셨다. 수행평가지를 제출하고 돌아가려 하는데 갑자기 서랍을 여시 더니 학용품 세트를 건네주셨다. 어? 뭐지? 도서반장들(일주일에 한 번 있는 독서 날에 북카트를 교실로 가져오는 역할) 한테만 열심히 했다고 주시는 거 아니었나?
선생님께서 내가 선물드렸던 책 잘 읽었다고, 고맙다 말씀해 주셨다. 무슨 말이냐면, 1학기 때 도서관에서, 가족이나 존경하거나 좋아하는 선생님 혹은 친구에게 편지와 함께 책을 선물하는 이벤트를 했다. 그때 내가 고심해서 골랐건 책을 기억해 주시고 이렇게 나까지 주시는구나! 이것만으로 이미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그다음 해주신 말씀이 나를 날아오르게 했다.
선생님은 ㅇㅇ이가 반짝반짝하면서 봐줄 때
너~무 행복해.
순간 진심으로 울컥하고 감동했다. 다 아시고 있었구나, 나를 나름 봐주시고 있었구나.. 마음이 찡, 하고 따끈하게 데워졌다. 국어와 국어 선생님, 모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자 선생님이다. 선생님께서는 늘 모두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시고 친절하시다. 매사에 다정하시지만 아무래도 최애 선생님이니까, 괜히 더 칭찬받고 관심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 반 도서반장 친구가 학용품 세트를 받았다 했을 때 은근히 부러웠다.) 하지만 왠지 나는 조용하고 수업태도와 수행평가 성적이 괜찮은, 그저 그런 애로 남을 것만 같았다. 수행평가를 분명 나보다 잘 본 애도 있을 테고, 질문도 수시로 해가며 수업 듣는 열정적인 애들도 있으니깐.
그런데 선생님은 내가 얼마나 수업을 열심히 듣는지 알아주셨나 보다. 정말이지 행복했다. 감사 인사를 하고 교무실에서 나갔다. 반짝반짝한다니! 행복하시다니! 어쩜 그렇게 말씀을 예쁘고 상냥하게 해 주실까.
그 후로 종일 기분이 들떠있었다. 고작 한마디에 이렇게 기분 좋을 줄이야. 고작 한마디가 이토록 따뜻할 줄이야.
따뜻한 말의 힘이 이렇게나 강력하구나, 깨달았다. 내가 한심하고 무능하고 존재감 없는 엑스트라 같아 위축될 때, 네가 있어 힘이 난다, 행복하다 말해주는 게 얼마나 상대를 뭉클하게 하는 것인지 말이다. 얼마나 상대의 어깨를 다시 쫙 펴주는지 말이다.
선생님의 말씀이 오래도록 기억날 것 같다. 선생님의 따스한 마음을 고이 내 마음속에 꼭꼭 접어두고 싶다. 그리고 나도 언젠가 그 마음을 다른 지친 이에게 심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