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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어가는 11월

by 작은 브러시

어릴 적 다니던 수영 학원의 셔틀 운전기사 할아버지가 하셨던 말씀이 문뜩 떠오른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인생이 흐르는 속도가 시속 1km씩 빨라지는 것처럼 느낀다고. 점점 빨라지는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마냥 느리지도, 기다려주지도 않는 게 세월인 건 조금 알 것 같다.


월요일 아침, 나가보니 아파트 단지 놀이터가 울긋불긋한 나무들로 뒤덮여 있었다. 깜짝 놀랐다. 어느새 변한 걸까. 너무 갑작스러웠다. 조금씩 선선해지기 시작한 지는 꽤 되었지만, 하루아침에 이제 정말 가을이라고 선을 찍 그어버린 것만 같았다. 생각해 보니 봄이 지나 여름이 될 때도 그랬다. 말없이 푸르러진 잎사귀들을 보며 마음이 참 두근댔다. 동시에 이상하게 시렸다.

또다시 제멋대로 찾아온 계절, 가을에게서 느끼는 건 다르다. 정말 휘리릭 지나가 버리는구나, 하고 만다. 그냥 편안하고 좋다. 붉게 익어가는 이 하루하루가.


올해 상반기는 확실히 지금과는 달랐다. 왠지 조급했다. 끊임없이 방황하고 지치고 우울하고 걱정했다. 요즘에 더 이상 그러지 않는다는 게 아니다. 얼마 전엔 꽤 지치고 울적했다. 그런 때가 상반기 때 더 잦았던 것 같단 말이다. 전체적으로 불안정했다. 난 아직 이뤄낸 게 없는데, 적응도 안 됐는데. 매일이 쉴 새 없이 지나고 또 지났다. 언젠가는 괜찮아지겠지, 다 되겠지. 아니었다. 흔들리던 믿음에 점점 금이 갔다. 모두가 스며든 계절에 나만 스며들지 못하고 그렇게 봄이 저물어갔다.


그래서였을까, 더 마음 졸인 채 보낸 여름날들이 마냥 웃으며 보낸 날들보다 많았다. 이젠 익숙해지지 못한다면 앞으로 긴 시간을 외톨이로 쓸쓸히 보내야 한다는 두려움이 날 짓눌렀다. 그까짓 인간관계, 하고 내려놓을 자신이 없었다. 또다시 그때로 돌아간대도 내려놓지 못할 것이고 않을 것이다. 끝끝내 놓지 않았던 그 마음 덕분에 나름 노력하고 애썼다. 그렇기에 평온하고 행복한 지금이기도 하다. 내가 마음이 아픈 건, 오랜 낮과 밤동안 그 일 하나로 메마른 모래사막을 걸어왔던 나 자신 때문이다.


그렇게 날 꽁꽁 묶어버릴 일이었나. 그땐 어쩔 수 없었던 거 아닐까. 초조하고 불안한 기분을 떨쳐내려고 아무리 책을 읽고 눈을 감아도 여전했으니. 어울리고 싶은데, 한 발짝 다가가볼까? 발을 내밀다가 주저했다. 이미 늦은 것 같아. 이제 와서 낄 자리가 어디 있다고. 망설이고 주저하고 후회하고 괴로워하고. 이렇게 반복되는 일상은 사실 많이 힘들었다. 심장에 작은 가시가 자꾸만 꽂혔다. 아픈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덮었던 천 조각은 어쩌면 날 더 꽉 조였나 보다.


그래도, 그럼에도 조금이라도 가시를 빼내보려 애썼으면 좋았을 텐데. 애초에 빠지지 않는 가시였나. 그래도 조금이라도 덜 무겁게 여겼다면, 한결 편안했을 텐데. 자꾸 그렇게 할 수조차 없던 무게였다는 생각이 든다. 한마디로 답이 없었던 것이다. 쥐어뜯는 수밖에는. 모르겠다. 어찌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해줄 말이 더 이상 없다. 후회하기보다는 그냥 지금이라도 과거의 나를 다독여 줘야겠다. 마음고생 참 많았다고, 수고했다고. 이 악물고 울며 노력한 끝에 소중한 관계를 이었어. 지금 난 너무 행복하고 편안해. 고마워. 그래도 시간이 가면 점차 세상의 버거운 것들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지지 않을까.


생각보다 많은 것이 차근차근 익어가는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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