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속 수행자의 행복 찾기>
얼마 전, 찜질방이 현대적인 모습으로 새롭게 탈바꿈한다는 뉴스를 보았다.
하지만 관련 영상에 달린 댓글들의 반응은 그리 환영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중 유독 내 시선을 붙잡는 댓글이 하나 있었다.
"가장 한국적인 형태를 띤 곳에는 오히려 외국인들이 몰리고, 정작 한국인들은 그저 가장 편안한 곳을 찾는다"는 문장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의 내면을 탐구하고 '참나'를 각성해 나가는 과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수행의 초입에 들어서 참나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는, 무언가 특별하고 강렬한 방식을 고집하기 마련이다.
정신을 극도로 집중하거나, 두 눈을 부릅뜨고 수 시간 동안 미동도 없이 꼿꼿하게 앉아 있어야만 비로소 내 정신이 발달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래야만 참나가 내 안에 단단히 똬리를 틀고 자리 잡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가장 정형화된 한국다움을 좇아 힘을 잔뜩 주고 관광에 나서는 외국인의 모습과 묘하게 겹쳐 보인다.
하지만 명상에 점차 익숙해지고 참나의 본질에 다가갈수록, 우리는 비로소 억지스러운 노력을 내려놓게 된다.
그저 지금 이 순간, 여기에 마음을 두고 차분히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온전한 만족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내면에서 요동치는 생각과 감정, 오감의 자극들은 어차피 스쳐 지나갈 구름과 같다.
나아가 그토록 갈망하던 황홀한 영적 체험조차도 결국엔 생각과 감정, 오감이 한데 어우러져 빚어낸 무상한 현상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을 담담히 깨닫게 된다.
그러니 이제는 어깨의 힘을 더 빼야 한다.
그저 '내가 존재한다'는 명백한 사실, 그리고 이 세상을 1인칭의 시점으로 생생하게 경험하고 있다는 그 느낌 자체에 머물며 만족해보자.
세상과 나는 결코 둘로 나뉘어 있지 않다.
내 눈앞에 펼쳐지는 이 세상은 그것을 인식하는 참나와 뗄 수 없는 한 덩어리다.
순수한 인식, 즉 '나'라는 존재의 바탕이 없다면 그 어떤 생각이나 감정도, 오감도 애초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참나가 거대한 바다라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그 수면 위를 찰나에 스쳐가는 파도에 지나지 않는다.
내면에 꽉 쥐고 있던 힘을 더욱 부드럽게 풀어내길 바란다.
애써 용쓰지 않고 그저 가벼운 알아차림만 남겨두어도, 우리는 결코 참나의 품을 벗어날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 깊은 진실에 도달할 때 비로소 우리는 참나와 온전히 하나 되어 삶을 영위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가장 마음이 편안하고 후회 없는, 올바른 삶의 결로 돌아오는 길이다.